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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의 닮은 꼴은 우연일까?
게시물ID : history_193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rontenac
추천 : 3/7
조회수 : 232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1/19 15:52:01
조선시대의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이나, 실은 정조의 비서실이자 정책연구실이었다.   정조시대 무(武)의 상징이 수원 화성이라면 문(文)의 상징은 규장각이었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내가 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을 위해 국내 서적은 물론, 청나라 상해 유리창 골목의 모든 책들까지 수레로 싹쓸이 했다.   규장각 신하들은 성질 급한 정조가 열흘마다 시제를 내리는 바람에 신하들은 죽도록 공부에 매달려야했다.   지독한 서적 수집광인 정조는 창덕궁 규장각으로도 부족해 강화도에 외규장각까지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외규장각 도서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훔쳐가 돌려주지 않고 있다.   규장각은 정조의 야심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을 아시아 맹주로 키울 프로젝트를 꿈꿨다.    (그런데) 훗날 규장각에서 술판을 벌인 두 남자가 있었으니,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두 사람에겐 묘한 공통점이 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정상까지 무섭게 출세했으며, 공교롭게도 사망일과 원인까지 일치한다.   이토는 1841년 10월 14일,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에 태어난다.   이토 생일의 한 달 후가 박정희 생일인 셈이다.   이토의 일본 국장일이 11월 4일인 것을 감안하면 11월 14일이라는 박정희의 생일이 예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망일과 원인은 똑같다.   이토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이 쏜 총에 의해,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쓰러진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의 죽음을 가리켜 ‘규장각의 저주’라고 부른다.   함부로 정조의 아지트에서 술을 마시고 놀았다는 죄로 죽었다는 얘기다.   사망월일과 원인까지 닮은 두 남자가 어쩌다 규장각에서 술까지 마셨을까?   이 또한 전·현생의 카르마로 연결된 것은 아닌지?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려 곳에서 발견된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한 사람은 무사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한 사람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무인(武人)으로 시작한 두 사람은 근대화를 이끌어 간다.  이토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며, 박정희는 한국 근대화의 지도자였다.    둘 다 헌법을 새로 고쳤다.   이토는 일본 메이지 정부의 헌법초안을 만들었고, 박정희는 세 번이나 헌법에 손을 댄다. 제5차 개헌으로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환원하고, 이른바 3선 개헌인 제6차 개헌으로 대통령 재임을 3번까지 허용했으며, 유신헌법으로 불리는 제7차 개헌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간선제를 도입하고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바꿨다. 성격은 다르지만 개헌을 통해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권력을 한층 강화시킨 점은 같다.    또한 유신(維新)에 매달렸다.   1868년 12월, 일본은 막부가 종식된다. 메이지 천황을 앞세운 하급무사출신 개화파 혁명군이 정권을 잡고 입헌군주제를 세운 것이다. 존왕양이 운동이 성공하자, 여기에 가담한 28세의 이토는 처음으로 조정관직에 진출, 메이지유신의 총아로 활동한다.   박정희도 비슷한 루트로 이토처럼 정권에 본격 진출했다.  그는 5·16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의 장기독재를 끝냈다. 2년 3개월 군사정부의 수령으로 활동한 뒤, 대통령제로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이 된다.   문제는 그가 장기집권을 하면서부터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가동하는데, 아무도 유신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가 시해될 때까지 7년 동안 지속된 유신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일인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비상조치였으며, 유신체제를 정당화시키는 정체불명의 프로파겐다였다.    만주와도 인연이 깊었다.   이토는 진즉부터 만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일본이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만주가 필요했다. 그의 꿈은 1932년 만주국 건설로 잠시 빛을 발하기도 한다. 1909년 10월, 고령의 몸으로 만주 하얼빈까지 간 이유도 러시아와 철도협상을 벌이며 조선의 미래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토의 계획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으로 무산된다.   박정희는 알려진 대로 만주의 신경(新京:지금의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만주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했다. 박정희 정부는 만주국의 지도체제를 그대로 가져왔다.   일본의 만주국은 당시 일본 최고 엘리트가 구상한 실험적 정부였기 때문에 공격적 성향의 박정희 정부와 궁합이 잘 맞았다.   이토는 만주에서 죽고, 박정희는 만주를 발판으로 대통령이 된 셈이다.    배꼽 아래 역사를 논하지 말라는 철학 역시 비슷했다.   이토의 엽색은 매일 신문을 장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토는 순순히 긍정하며 “술이 취하면 나는 미녀의 무릎을 베고 쉰다. 술이 깨면 나는 권력의 고삐를 힘차게 잡아 쥔다.”고 변명했다.   박정희의 여자관계는 지금도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두 사람의 결혼도 인상적이다.   이토는 22세에 같은 학교 동창의 여동생인 스미코와 결혼하지만 3년 후 이혼한다.   정치에 몰두한 이토가 3년 동안 아내가 사는 집에 들른 적은 딱 하루였다.   당시 시모노세키의 기생 고우메와 동거해 아이까지 임신시킨 이토는 1866년 4월 고우메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녀가 바로 이토 옆에 묻힌 우메코다.   우메코는 이토와 결혼한 뒤 일본 현모양처의 전형이 됐으며 일본총리 부인 중 가장 미인으로 회자된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4학년 때인 1935년 18세의 나이로 결혼한 뒤 1949년 이혼, 1950년 훗날 영부인이 된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다.   둘 다 재혼으로 제 짝을 만난 셈이다. 육영수 여사 역시 한국 현모양처 영부인의 전형으로, 미인이며 선행에도 늘 앞장섰다. 그녀는 충북 옥천의 삼정승 터에서 내어났다. 조선시대 삼정승을 배출했다고 유명해진 터인데, 거부였던 육 여사의 부친이 집주인 민대감에게 재산의 반을 주고 집을 사서 낳은 첫 아이가 육영수 여사였다고 한다. 은근히 아들을 기대했던 부친은 딸이 태어나 실망했다는 얘기가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이토의 부인 우메코 사망(1924년 4월 15일) 이듬해인 1925년에 육 여사가 태어났으며, 우메코가 죽은 지 50년 후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에 의해 피살된다.   이토 히로부미-박정희 대통령, 이토 우메코-육영수 여사의 닮은 꼴은 과연 우연일까? 

출처: b1bzb1.egloos.com/m/355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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