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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 갈 '흥했으나 몰락의 길을 걸었던 나라...' 로마사 반박.
게시물ID : economy_94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nsi5120
추천 : 50
조회수 : 1862회
댓글수 : 67개
등록시간 : 2014/12/18 12:41:02
http://todayhumor.com/?humorbest_990103

이 글을 쓰는 순간 89/0이니 아마 베오베에 갈 걸 염두에 두고 씁니다.

댓글로 달까 하다가 굳이 글로 쓰는 이유는 이미지와 함께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볼까요?

bandicam 2014-11-11 22-28-14-660.pngbandicam 2014-11-11 22-28-58-011.png

한 가지 흥미로은 점은 
난파선의 수가 계속 증가하다가
갑자기 정점에서 
급격히 감소하는데...

이 시기는 로마의 정치제도가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바뀔 때와 거의 일치한다.



일단 이 부분부터.

고대 지중해의 난파의 이유는 거의 두가지였습니다.
1. 태풍
2. 해적

그 외의 건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겁니다.
지중해는 내해라서 태풍이 불 땐 무섭게 휘몰아치지만 보통 완만하니까요. 게다가 어디로 가도 지중해 안이면 근처 육지로 난파할 수도 있지요.(이 경우엔 '난파선'으로 남지 않겠지요)

이중 태풍은 인위적인 이유가 아니니 태풍으로 인한 피해엔 인간의 영향이 없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러면 2. 해적만 남는데....

자, 로마사를 잠깐 보죠.

저 그래프에서 보인 B.C. 27은 옥타비우스의 내전 종료 및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받은 연도입니다.
40년 전의 기원전 67년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해적소탕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피랍된 적도 있었으니 확실히 해적의 극성은 심했습니다. 당초 폼페이우스의 소탕전 자체가 당시 해적의 피해가 어마어마했기에 수습하기 어려워했던 그리스 및 클리엔테스들이 로마에게 청원한 일이었습니다.

흠. 그렇다면,

난파해야 할 배가 내전이 종식되자 덜 오고갔다보다는 난파의 주원인이었던 해적이 말소됐었다 가 '난파의 양이 줄어들었다'란 이유에 좀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애초에 저 그래프를 보면 정확하게 BC 27에서부터 떨어지는데, 저 그래프를 보고 결론을 내리기보다 그래프 자체를 의심하는 게 더 합리적이 아닐까요.
또 하나, 텍스트만 봐도 '이 시기가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바뀔 때와 거의 일치한다고 해놓고 굳이 BC 27이라 정확하게 꼬리표를 붙이는 건 무슨 의도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결론은 잠깐 미뤄두고(*) 다음 부분을 보지요.

bandicam 2014-11-11 22-29-48-291.pngbandicam 2014-11-11 22-30-42-710.png

로마가 번영했던 시기
공기 중에는 유난히 많은 납성분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은 로마의 활발했던 화폐유통을 말한다.

빙핵분석 결과...

대기의 납성분은 난파선의 수와 마찬가지로
꾸준하게 증가하다가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감소한다.
그러다가 산업혁명 때... 다시 같은 수준으로 올라온다.

그렇다면 왜
로마 경제는 황제정으로 넘어가면서 위축되었을까?


후....

일단 어떻게 하면 '대기중의 납성분이 높다' = '화폐유통이 활발했다'로 되는 걸까요?
그리고 산업혁명 이전부터 지폐 사용이 있지 않던가요?
산업혁명 이후엔 금괴 내지는 지폐가 많아졌고 납이나 구리 화폐사용은 줄어들었을 텐데, 그러면 왜 그 이후엔 대기중의 납성분이 안 줄어든 겁니까?
그리고, 저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산업혁명 이전까지 서구세계의 화폐유통이 공화정 당시 로마보다 적었단 말입니까? 가장 금권권력이 컸던 르네상스 때는 어디 갔어요?

애초에 공화정 로마시대의 주요 화폐였던 세스테르티우스는 순수 은화였습니다.
물론 아시스(동화)나 아우레우스(금화)도 있었죠.

솔직히 이 공기중 납 함유량은 인류정치학보다는 지구과학쪽에서 다뤄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일천한 지식으로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위에 말했던 난파선(*) 예시하고 같이 보면. 글쓴이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난파선의 양이 적어졌음' '(어쨌거나) 동화 유통이 적어졌음' => 로마 경제가 위축했음 => 이 때는 제정 시작과 맞물림.
=>  로마 경제는 황제정으로 넘어가면서 위축되었을까?

'로마 경제는 황제정으로 넘어가면서 위축되었다'를 이미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묻는군요(**).
인과에 의한 결과를 입증하지도 않고 두루뭉실 결론을 내는 건 이미 오류 이전에 고의에 가깝습니다. 참 통탄할 레토릭입니다.


여하튼 넘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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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상징이 된 호민관은
매년 평민들이 직접 선출했고

호민관은 평민들의 요구를 외쳤다.

호민관의 힘은 강력한 것이었다.
평민들을 대면하고
평민들의 권익에 위배되는 정책에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귀족들을 대변하는 원로원과 호민관이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일단 이 호민관이란 시스템부터 조명해보죠.

저 글에서 말하는 호민관의 존재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매년 평민이 직접선출함'
'평민의 요구를 외침'
'거부권'
'원로원과 호민관이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있음'

하나하나 조명해보죠.

'매년 평민이 직접선출함'
 - 네. 평민이 직선했죠. 로마에서만의 민회가요. 라틴 시민권을 지닌 이들은 그런 거 없었고, 이 차별의 모순은 이후 B.C. 91년의 동맹시 전쟁의 발단이 됩니다.
'평민의 요구를 외침'
 - 그랬죠. 근데 그거 없어도 애초에 결정적인 거부권은 민회에 이미 있었어요. 이 부분은 후에 다시 이야기하죠(**)
'거부권'
 - 및 신변불침권. 이거야 뭐 좋은 특권이고.
'원로원과 호민관이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있음'
 - 자,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데... 성산사건 이후 생긴 호민관은 이후 한번의 수정을 거쳐서(세르티르티우스 법이었던가요,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이렇게 됩니다.
1년 임기를 마친 호민관은 심사 후 원로원으로 편입됨.
 이게 무슨 뜻이냐고요? 호민관이 평민의 요구를 외친다는 건 즉 간헐적으로 원로원에 반대해야 한단 거죠(**). 근데 임기 후에 그 원로원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물론 안 가도 됩니다만(***) 기득권층으로 편입될 기회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면 자연 후의 선배들 앞에서 말을 가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보고 보면 다음 부분이 새롭게 보일 겁니다...

bandicam 2014-11-11 22-34-46-339.pngbandicam 2014-11-11 22-35-00-684.png

이 네개의 문자는 원로원과 민중이 상생할 때 비로서  로마도 존재한다는 로마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분과 계급은 있었지만 
평민들의 재능과 열정은 
경제 발전으로 연결시키는 제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원로원과 민중이 상생할 때 비로서 로마도 존재한다는 시대정신'

상생이란 건 대략 동등한 양자가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우면서 같이 발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로마의 공화정을 찬양하는 논리는 원전을 따져보면 키케로와 타키투스의 저술에서 시작합니다. 후에 미국 헌법의 기본 정신이 키케로를 많이 참고했단 건 널리 알려진 주장이죠.
그리고 그 키케로가 찬양했던 건 2차 포에니 전쟁의 그 공화정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를 위한 정치서적 De Officis를 제외하면 그 때의 대응을 주로 이야기하죠. 물론 그 무서운 대적 한니발을 상대할 때 원로원과 민회가 합심하여 외적을 물리친 그 때를 말합니다.

뭐 거기까진 좋아요.
문제는 2차 포에니 전쟁은 BC 200에 일어난 일이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황제정 전환은 BC 30쯤이니까요.

이 170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언급도 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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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사람이 등장하면서 부터....

전쟁 영웅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호민관이 서로 견제하는 공화정을
1인 독재 체재로 중앙집권화 했다.

대충 이 레토릭만 보면 공화정 로마는 신분/계급을 불사하고 소통을 통해 다같이 경제발전했던 꿈의 시대로 보이죠. 카이사르가 등장할 때까지요.


포에니 전쟁하고 카이사르의 등장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 대충 설명하면...
 - 3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카르타고발 노예 대량 유입
 - 로마의 정복전쟁 시작
 - 수많은 정복전쟁으로 원로원 의원 출신인 대지주가 늘어남. 원로원에 대한 부의 집중 심화
 - 전쟁에 끌려가서 생산력이 떨어진 민중은 땅을 팔고 무산자(프롤레타리아)로 떨어짐
 - 민중의 질이 떨어짐(중산층의 붕괴)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
 - 질이 떨어진 민중으로 인해 로마 군대의 질이 떨어짐(유그르타/게르만 전쟁 난조)
 - 애초에 전쟁 경제 및 농업 경제였던 로마의 경제 퇴화
 - 시민권 차별로 인한 로마의 우방들이 들고일어선 동맹시 전쟁
 - 마리우스의 군제개혁(군단의 직업군인화)
 - 술라의 대개혁(호민관 권한 대축소)
 - 폼페이우스의 등장, 술라의 시스템 붕괴)
 - 카이사르의 등장

아까 위에서 말했죠? 호민관은 원로원으로의 등용문일수도 있다고요. 물론 안 가도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원로원 체제에 대한 반체제운동이었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장한 건 대충:
 - 과도한 사유재산(대농장) 제한
 - 민중에게 부(땅)의 재분배
참고로 이 사람들은 호민관을 무려 재선한다는 전대미문의 일을 벌였습니다. 원로원에 엿을 날린거죠.

그리고 이 두사람은 신변불가침권에 불구하고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자, 저 글에서 뭐라고 했었죠?

다시 볼까요.

로마 공화정에서는 귀족들을 대변하는 원로원과 호민관이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중략..]
신분과 계급은 있었지만 
평민들의 재능과 열정은 
경제 발전으로 연결시키는 제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중략..]
전쟁 영웅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호민관이 서로 견제하는 공화정
1인 독재 체재로 중앙집권화 했다.

그리고 좀 후의 말이지만,

로마 정치의 미덕이었던 자유로운 토론과 소통은 증발되었다.


음. 한마디로 말해서
그까이거 없었습니다.

좀 풀어 말하자면,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이야 말로 '평민들의 재능과 열정이 경제 발전으로 연결시키는 제도'가 없었다는 반증입니다.

애초에 '제정으로 인해 로마의 멸망이 시작됐다' 자체가 18세기의 통념이었어요. 기번의 대작이 그 통념을 더 부채질했고요.


후.

계속 가 보죠. 이제부터는 제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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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전쟁과 사치로 로마엔 돈 줄이 말라갔다.

결국 은 함유량이 낮은 화폐를 유통시켰고
시장에 강제 유통시켰다.
심지어는 은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은화도 유통시켰다.

결국 로마의 화폐 경제는 몰락으로 치닫게 된다.



이 문단은 가장 저열한 역사적 기만을 쓰고 있습니다.
문장 별로 보죠.

"막대한 전쟁과 사치로 로마엔 돈 줄이 말라갔다."
 - 전쟁 자체는 공화정 때 더 잦았습니다. 로마 내의 내전은 잦았습니다만 정쟁에 가까운 양상이었기도 하고, 애초에 '사치'?

결국 은 함유량이 낮은 화폐를 유통시켰고
시장에 강제 유통시켰다.
 - 이거 아우구스투스가 한번 했던 개혁이고(BC 23), 그 뒤에 네로가 잠깐 손대다가 말았습니다.(AD 60?)
   당시의 이유는(두번 다) '경제권이 통합되어 규모가 커지자 세스테르티우스 은화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서 일어난 일입니다.
심지어는 은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은화도 유통시켰다.
 - 이 부분이 제일 가증스러운데, 저 글만 보면 사치부릴 돈이 부족하자 황제가 더 큰 악화를 강제로 유통시킨 거로 읽히죠.
    이거 3세기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AD 240~260. 자세한 연도는 기억이 안 나는군요. '3세기의 위기' 때였으니까요)
    무슨 말이냐고요? 무려 300년 사이를 두고 일어난 일의 인과관계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결국 로마의 화폐 경제는 몰락으로 치닫게 된다.
 - 애초에 3세기는 국가 레벨의 생산력 발전이 한계에 다달았고(인력에 의존했던 이 때보다 더 높은 생산력을 기대하려면 증기엔진이 상용화된 산업혁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세금 면제인 시민권 소유자가 늘어나서 세수가 붕괴했으며,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방위 지출도 최고였던 때였습니다.
화폐가치가 저평가된 건 이 모든 일의 결과이지 이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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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부는 모두 황제에게 집중되었고
로마의 경제는 모두 노예들에게 의존하는 허약한 경제로 전락한다.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할 혁신적인 기술도 절대 나올 수 없었다.

티베리우스 시절
한 장인이 잘 깨지지 않는 유리를 개발했으나
황제는 오히려 장인을 살해하고 신기술을 묻어버렸다.
이유는 황제가 보유하고 있던 은과 금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

이런 창의력과 신기술은 권력자의 탐욕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악질적인 곡해를 하는 겁니까?
이 부분도 문장별로 짚어보죠.

나라의 부는 모두 황제에게 집중되었고
로마의 경제는 모두 노예들에게 의존하는 허약한 경제로 전락한다.
 - ??????????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할 혁신적인 기술도 절대 나올 수 없었다.
 - 그냥 참고로 말하자면...
현대 건축 기술의 베이스는 로마시대때 나온 겁니다. 시멘트의 기초 이론도 이때 나왔고요.(이건....9객에서 한번 봤던 거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치형 건축도 이때에 개발된 거고, 인프라스트럭쳐의 개념도 이때 나온 거였고, 애초에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및 지금까지 남아있는 로마시대 건축물은 제정때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죠.
참고로 로마의 몰락 이후 서구의 기술개발은 완벽히 퇴화를 거듭합니다. 그나마 귀중한 지식을 전승해준 게 아랍이었죠.


"티베리우스 시절
한 장인이 잘 깨지지 않는 유리를 개발했으나
황제는 오히려 장인을 살해하고 신기술을 묻어버렸다.
이유는 황제가 보유하고 있던 은과 금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
이런 창의력과 신기술은 권력자의 탐욕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 이거 타키투스의 기록 갖고 하는 말인거 같은데(알루미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요즘 들리긴 합니다만...)

당시 기축통화였던 은화와 금화의 가치를 한꺼번에 떨어트릴 만한 일이잖아요?

죽이는 거까지는 고대의 경우를 봐도 좀 너무합니다만, 티베리우스는 어떤 황제보다도 더 내수경제를 중시했던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이미 황제의 재산이 국가예산으로 된 상태였습니다.
제국 전체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만한 일을 멈춘 게 겨우 개인의 은/금의 가치가 떨어질 걸 우려했다는 식으로 곡해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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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로마에선 
연일 검투와 전차경기가 지속되었다.

황제는 끊임없이 오락거리를 제공하면서
시민들의 비판정신을 무력화시켰다.


일단 저 콜로세움 황제시절에 세운 거고요.

그리고 저 '빵과 서커스' 말은 공화정 때 나온 말입니다.
비판정신을 무력화시켰다고요? 공화정 때도 그런 거 없었어요.
시민들이 황제에게 요구한 건 두가지였습니다. 대외안보와 식량안보. 그 둘 중 하나라도 잘못했으면 황제 입장할때마다 그대로 야유가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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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시민들은 한 때 세상의 주인이었다.
그들은 투표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었으나
황제정 시대에는 비판정신을 잃은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아 그러니까 이미 사장된 18세기 주장 그만 좀 가져와요.

애초에 투표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조차도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로 수도 로마의 민회에만 국한된 말이었고요,
그나마도 삼두정치때 붕괴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크라수스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폼페이우스가 자기 군단병을 제대시켜서 투표하게 했습니다. 일개 군벌이 수도의 선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단 말입니다.(좀 지독히 제한된 예시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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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학자들은 
로마의 멸망원인은 공화정의 몰락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로마 번영의 열쇠였던 포용적인 제도는
황제들에게 집중되면서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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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잘은 모릅니다만 적힌 생몰년만 보니 저 비온도란 사람 15세기 역사가지요. 페트라르카 역시 14세기 시인이네요.
애초에 14-15세기와 르네상스를 거쳐16세기 초엽에 일어난 게 사코 디 로마였죠. 르네상스 이후 교황과 로마의 권의를 마구마구 깎아내리려고 하던 때 아니었습니까?

수 많은 학자라고 하는데 그 많은 학자중에 왜 하필 6세기 전의 인물들을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걸까요? 하다못해 에드먼드 기번도 비슷한 투로 말을 했는데. 로마제국 쇠망사란 제목으로 책도 냈었고요.

로마사 뒤는 제 전문도 아니며 지식도(이렇게 반박하기엔) 부족하니 넘기겠습니다.

이 긴 글도 마쳐야겠군요.

우선 저 다큐멘터리(및 글 작성자)가 하고싶은 말은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동의하고 또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논파되고 사장된 사학을 그대로 가져오면 곤란합니다.

사학 이전에, 먼저 결과를 자아놓고 모든 근거를 그 결과에 맞도록 짜맞추는 행위는, 설득을 위한 행위로는 참 저열한 일입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 반대 없이 매우 빠른 속도로 베오베로 향한다는 점이 특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 지식 없이 보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거든요.

애초에 로마 내전시 카이사르가 아닌 폼페이우스가 이겼더라면, 체제의 모순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붕괴했거나 아니면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 대신 최고권력자가 됐으리란 게 중론입니다.(체제 개혁은 없었겠다만)

그리고, 황제정 당시 로마는 최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당시의 체제적 모순을 해결했고, 그로서 야기된 또 다른 모순에 의해 붕괴했지요. 지금까지 이 패턴을 벗어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략 반백년쯤 전부터 사가들은 왜 로마는 제정이 되었기에 붕괴했느냐보다, 로마는 제정이 되었기에 400년을 더 버텼는가가 더 옳은 질문이라고 논해왔습니다.

노파심에서 덧붙입니다만 '요즘 사학계의 의견이 이렇기에 옳다'고 논하지는 않습니다.
위에 제가 전개한 의견은 단순히 글에 대한 반박입니다.

자기 편의에 맞는 정보만 가져와서 주장을 펼치는 건 지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좀 격해져서 격의 없이 썼습니다.
삼가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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