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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섹스돌 2
게시물ID : panic_951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묻어가자
추천 : 24
조회수 : 3236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7/08/25 22: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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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http://todayhumor.com/?humorbest_1485363
 
1편 퇴고한 것을 아래에 그대로 씁니다. 링크 가실 분은 가시고 안 가셔도 괜찮아요.
이미 본 부분은 스킵하고 다음 부분부터 보시면 됩니다.
 
 
 
 
 
 
 
 
 
 
1
시키지도 않은 경품이 택배로 왔다. 뭐지, 이 커다란 박스는? 혼자 사는 집에 이만한 짐을 놔두다니, 민폐잖아.
아마 인터넷 설치를 했다고 주는 변변찮은 경품일 것이다. 도대체 뭐가 온 거야? 나는 커터칼로 포장 테이프를 무분별하게 베었다.
박스 안의 내용물에 칼이 닿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짜증이 밀려와서 신경쓰지 않았다.
마침내 포장 테이프를 다 뜯고 박스를 열어보았을 때 나는 악 하는 조그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박스에는 여자가 기절한 채로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까 커터칼의 저항을 기억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자를 보니 팔에 선명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커터칼의 상처 그대로 말이다. 커터칼을 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지? 그 때 몇 년 전에 보았던 뉴스를 기억할 수 있었다. "섹스돌의 합법화" 2025년 이었던가.
이후로 별 관심이 없어서 신경을 끄고 살았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섹스돌인가?
혹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다.
"저기요."
답이 없다.
"괜찮으세요?"
그녀를 팔을 살짝 흔들어보았다. 물컹했다.
"일어나세요."
숨을 쉬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코가 예뻤다. 숨을 쉬지 않았다.
죽은 것일까? 아니면 섹스돌인 것일까? 사람이 죽었다면 부패가 일어났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의학 상식이니까.
그녀의 피부에 코를 대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부패하는 냄새가 있는지 말이다. 살냄새가 났다.
진짜 사람인가? 그렇다면 팔에서 흐르는 피는 진짜?
나는 좀 더 확신하기 위해서 피부를 만져보려고 했다. 아까 느꼈던 물컹함이 정말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팔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진짜 같다. 나는 그녀의 팔을 가까이서 봤다.
팔에 난 솜털, 피부 아래의 혈관.
나는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어 보았다. 근육 아래의 뼈가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흐르고 있는 피.
"악!"
사람. 사람이다. 이게 어떻게 인형일 수 있을까? 나는 무서워졌다. 시체가 배달되다니. 어쩌지?
그 때 그녀에게 가려 보이지 잘 보이지 않던 공책 같은 게 보였다. 혹시 설명서인가?
저게 설명서라면 이 여자는 섹스돌인 게 분명하겠지. 제발. 나는 공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보이는 글자.
 
[섹스돌 사용 설명서]
 
다행이다. 역시 사람이 아니었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녀를 만지던 감촉과 진짜 같은 피부가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박스에서 꺼내보았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그리고 얇은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눕혀놓았다. 편안하게.
그녀는 딱 붙는 청바지와 하얀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긴 생머리였다. 얼굴은 예뻤다.
나는 아직도 이게 섹스돌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손목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웠다. 맥박이 뛰지 않았다.
목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웠다. 맥박이 뛰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눌러보았다. 물컹했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내 진맥기술이 잘못됐나 싶어 스스로 손목의 맥박을 재보았다.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녀를, 아니 이것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인형일 수 있지?
그녀의 손을 잡아서 손등을 보았다. 아주 가깝게 피부를 관찰했다. 잔주름이 보였다.
나는 내 손등도 보았다. 내 손등의 잔주름은 여자의 것보단 투박했다. 아무래도 난 남자니까.
그녀의 손바닥을 보았다. 지문, 주름, 혈관, 피부 아래의 홍조. 어떻게 이렇게 진짜 같을 수 있지?
내 손바닥도 보았다. 오히려 내 손바닥이 가짜같았다.
그녀의 다른 부분을 관찰해보았다. 옷을 벗기진 않았다. 인형이라고 해도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드러난 부분을 자세히 관찰하고 얻은 결론은, 그녀는 단 하나의 상처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완전 무결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왼팔의 불주사 자국만 빼고. 그녀의 불주사 자국을 만져보았다. 진짜였다.
나는 그녀를 눕혀두고는 다시 사용설명서를 읽어보았다.
 
[... 가짜 혈관을 가지고 있어서 상처를 입을 경우 최대 50ml의 가짜 피를 흘릴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 팔에 있는 불주사 자국은 제품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제품 손상이 아니오니 고객님들 께서는 안심하시고...]
 
그래. 가짜로군. 가짜였어. 하지만 너무 진짜 같잖아. 소름 끼칠 정도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봤다.
예뻤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 연예인 있잖은가.
다른 사람들은 다 좋아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거의 끌리지 않는 그런 얼굴. 아무리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 얼굴.
그냥 예쁜 조각상 같은 얼굴. 나는 작고 아담한 스타일이 좋은데. 그런 얼굴의 섹스돌이 왔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그런 인형이 왔어도 소름끼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너무 진짜 같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섹스돌을 감추고 싶었다. 내가 자고 있으면 인형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사람 같았다. '사람 같았다'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이건 그냥 사람이었다.
나는 장롱속에 황급히 그녀를 쑤셔 넣었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을 정도로. 아니, 손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는 장롱을 꽉 닫았다. 혹여나 실수로 열리지 않게 장롱을 잠가놓았다.
나는 어서 이 무서운 인형을 집밖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사야 하는데... 또 돈이 나갈 형편이었다.
집세도 만만치 않고 생활비도 부족한데... 나는 중고 사이트에 이걸 팔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시세는 중고가 60만 원이었다. 큰 돈이었다.
 
[섹스돌 팝니다. 인터넷 경품으로 받았습니다. 진짜 실물같아서 무섭네요.
 포장 뜯다가 팔에 상처났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ㅠㅠ
 차가 없어서 직접 가져가서야 합니다. 지금 잘 거라서 위에 번호로 문자 주세요.
 상처난 거 감안해서 45만 원에 팝니다.
 *불주사 자국은 본래 제품에 있는 것임*                                       ]
 
그렇게 글을 쓰고는 피곤해서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
 
일어나니 밤 12시였다. 어차피 현재는 백수니까 밤낮이 바뀌어도 괜찮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팔렸나요? 새 제품이죠?]
나는 답장 문자를 작성했다.
[안 팔렸습니다. 새 제품이에요.]
그리고 문자를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누르지 않았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뒤돌아서 장롱쪽을 보았다.
내가 전혀 끌려하지 않는 예쁜 얼굴이 저 장롱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보았다.
[팔렸나요?]
안팔렸죠 아직...
[새 제품이죠?]
새 제품? 이상한 말이다. 나는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다시 장롱 쪽을 돌아보았다.
그 인형의 솜털과 혈관과 물컹한 살과 그 안에 있는 뼈의 단단함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끌려하지도 않고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 정말 예쁘고 진짜보다 진짜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장롱으로 향했다. 나는 장롱의 잠금을 찰칵하고 풀었다.
그리고 나는 장롱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 사이로 인형이 보였다. 그것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나는 너무 놀라서 문을 쾅 하고 닫고는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잘 시간이란 것조차 잊어버린 채.
인형은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2
그래. 기술적인 뭔가가 있겠지. 나는 설명서를 봤다.
 [...소리와 적외선 센서에 반응하여 눈을 뜹니다. 얼굴을 인식하여 주인과 눈을 맞출 수 있습...]
역시. 저건 그냥 인형이었어. 인형일 뿐이야. 나는 다시 장롱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히 꺼내어 이불 위에 눕혔다.
그리고는 (19금 검열)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이 있을까. 나도 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19금 검열)
그래! 넌 내 소유물이야. 넌 나에게 공포를 줄 수 없어. 나를 무섭게 할 수 없다고!
똥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움직임때문에 계속 덜컹거리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눈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 날 본다. 내 두 눈을 보고 있다. 난 무섭지 않다. 넌 내 소유물일 뿐이야.
나는 그녀의 두 팔을 못 움직이게 눌렀다. 어차피 움직이지는 않지만 꾹 눌렀다. 못 움직이도록.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얼굴을 다가갔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것도 날 보고 있다. 난 지지 않아. 나는 이 눈싸움에서 절대로 질 생각이 없어.
내 두 눈이 충혈된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도 왠지 충혈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난 절대로 눈을 피하지 않아.
이윽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그래! 넌 인형일 뿐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인형이라고.
그 때 갑자기 그녀의 입이 벌어지더니 보아뱀처럼 굵은 혀가 내 입으로 꿀렁거리며 들어왔다.
나는 최대한 크게 떴던 눈보다 더 더 크게 눈을 떠버렸다. 공포 같은 놀라움때문에.
그 혀는 내 식도를 넘어서 위장까지 들어갈 것 같은 기세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제는 이 눈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내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인형이 내 모든 내장을 휘저으며 날 죽일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무서워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정말 예쁘고 정이 가지 않는 얼굴에 떨어졌다.
나는 보아뱀을 빼버렸다. 그러자 그녀도 내 몸에서 보아뱀을 빼주었다.
나는 식은땀을 비처럼 쏟으며 최대한 인형에게서 멀어졌다. 이 망할 년. 미1친 년. 그녀를 보는 시야가 흐려졌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나는 무섭지 않아. 난 그냥 놀란 것뿐이야.
나는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부들부들 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형을 때리고 싶었다.
이 망할 물건을 부숴버리겠어. 으으. 그치만, 그치만. 도저히 여자를 때릴 순 없어.
물론 이건 여자도 아니지만 말이야. 넌 나를 놀라게 해서는 안돼. 넌 반항해서는 안 되는 소유물일 뿐이야.
나는 공포를 느끼고 있지 않다. 그래, 정말 아니라고. 나는 이를 부들부들 떨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넌 그냥 물건일 뿐이야. 귀신 같은 게 아니라고.
이렇게 만질 수 있고, 내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존재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날 똑바로 보고 있다. 섬찟한 기분이 든다. 나는 손을 얼른 떼고는 그녀를 들어 장롱 속에 집어넣었다.
결국 나는 눈을 피하고야 말았다. 장롱 속에서 그것이 나체인 상태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문을 닫으려다가 어째서인지 몸을 가리도록 이불을 덮어주었다. 여자니까.
그러고는 장롱을 잠갔다. 나는 털썩 주저 앉아서 이 인형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생각했다.
 
 
 
 
 
 
3
이걸 팔 수 있을까? 중고 거래 사이트를 보니 사용한 제품은 아무도 안 사던데... 버릴까? ... 버려?
난 쓰레기 매립장에서 처참하게 폐기되는 인형의 최후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건 도저히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손 안에 쥔 벌레를 죽이지 못할 때의 죄책감과 같았다. 방법이 없을까? 좋은 방법이... 그래...!
내 친구 중에 이런 걸 좋아하는 변태놈이 하나 있었지. 손병태. 병태라면 이걸 가져갈거야. 나는 병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병태냐?"
"어이~~~와쒑맨. 잘 있었냐 카하하"
나는 병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얌마. 그런 스킬까지 보유한 인형을 왜 무서워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이 형님이 오늘 나눔받으러 갈 테니까 고이 모셔놔라. 캬하하"
그러고는 병태가 결국 가져가버렸다. 휴... 됐어. 다 끝난 거야. 그리고 인형의 존재를 차츰 잊어갈 때
"택배입니다!!!"
택배 기사가 내 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뭐지? 난 아무것도 안시켰는데.
 
 
 
 
 
 
 
4
문을 열자 커다란 박스가 보였다. 인형이 들어있었던 그만한 크기의 박스였다.
나는 인형을 방 안으로 옮겼다. 인형만 한 무게였다. 왜지? 병태녀석 왜 말도 없이 돌려보낸 거야. 이 변태녀석...
그 때 휴대폰에서 전화가 울렸다. 창길. 창길이가 무슨 일일까. 난 전화를 받았다.
"야, 잘 지냈냐? 어휴... 소식 들었냐. 병태가 죽었단다. 애들끼리 모여서 장례식장 가려고 한다. 시간 어때?"
나는 소름이 끼쳐서 말도 없이 창길이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옆의 박스가 보였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집어들고는 일단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다시 전화를 해보자.
 " 여, 여보세요? 창길이냐? 아까는 전화가 그냥 끊어졌네. 장례식장이 어디냐"
 ....
 ....
 ....
2시간 후 나는 장례식에 올 수 있었다. 마련된 공간에 들어가자 친구들은 벌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창길이가 보였다.
"창길아."
"어, 왔냐."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길아... 병태가... 어떻게 된 거야?"
"사고로 죽었다더라."
"사고?"
"응."
"무슨 사고?"
"글쎄. 그것까진 나도 못들었네."
사고? 나에게 말도 없이 인형을 돌려보내고는 사고로 죽어버렸다고? 어떻게 죽은 거냐고 대체.
"근데 사고 현장을 기욱이가 처음 발견거든? 그런데 말을 안 하네."
창길이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기욱이를 잠깐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기욱이는 표정이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기욱이에게 물어야겠어. 난 사실을 당장 알아야겠다고.
"기욱아. 어떻게 된 일이야 도대체?"
기욱이가 말을 안 한다. 질문을 조금 바꿔야겠다.
"병태는 어떻게 발견하게 된 거야?"
"... 병태가 자기가 지금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전화가 왔거든. 그래서 병태 집에 간 거지."
"그래서?"
기욱이가 말이 없다.
"기욱아. 병태가 어떻게 된 거냐니까? 말 좀 해봐."
"... 피가 많이 났어."
"피? 뭔가에 다친 거야? ... 혹시 입에서 피를 토한 거야?"
기욱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건데?"
"잘렸더라고."
나는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질문을 안할 수가 없었다.
"어디가?"
"... 거기."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속이 좋지 않아서 장례식장을 급히 빠져나왔다.
휘청거리며 걸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멍하게 밖을 싸돌아 다녔다. 그 날도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밖에서 생활하는 건 돈이 많이 나간다.
이렇게 평생을 생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결국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리는 거야.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사서. 그래. 버리자.
일단은 집을 향했다. 아직은 낮이니까. 낮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훨씬 덜해지니까.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방 안은 여전했다.
방 한 가운데 놓인 커다란 택배 박스. 코끼리가 집에 있는 것 같은 이상한 풍경.
그 때, 갑자기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며 불명확하게 들렸던 말이 떠올랐다.
기욱이가 뭐라고 했었는데. 그게 지금 왜 떠오를까. 중요한 말이었나?
그리고 나는 기욱이가 한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야 말았다.
[... 그리고 그건 못 찾았어.]
나는 천천히 택배 박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개봉되지 않은 택배 박스 쪽으로.
 
 
 
 
 
 
5
어째서지? 나는 왜 이런 최악의 여자들만 만나는 걸까.
내 집에서 다른 놈이랑 그 짓을 하고 있던 지민이처럼 최악의 여자 말이야.
이기적이고 상처만 입히는 그런 존재... 이제는 인형마저도 이런 최악이라니. 내 인생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걸까.
인형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불길한 인형은 폐기시켜야 돼.
쓰레기처럼 불에 태워야 한다고. 고통 속에서 불타 없어져버려라.
나는 박스 안이 어떤 모습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지만 일단은 박스를 뜯어야 내용물을 알 수 있으니까.
사람 신체 같은 게 들어있다간 재수 없으면 살인 용의자로 점찍힐지도 모른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택배 박스를 열었다. 그녀였다.
내가 병태에게 보냈을 때보다는 많이 손상돼 있었다.
머릿결이 헝크러지고 여기저기 찰과상이나 타박상 같은 자국들이 있었다. 옷은 벗어져 있었다.
나는 순간 연민 같은 감정이 느껴졌으나 그 감정이 너무나 우습다고 생각했다. 당장 버릴 테다. 이 불길한 인형따위.
혹시나 사람 신체 같은 게 있는지 박스 안을 좀 더 살피던 순간 인형의 목이 끼기긱 하고 돌아가며 얼굴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인형이 아주 환하게 웃었다.
 "악!! 어아 X발! 뭐야 이거. 뭐이 X발. 하아... 하아... 후... 아오 씨 깜짝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전투 태세가 되어 인형과 대치했다. 저주 들린 인형이 틀림없어.
저 인형의 표정을 봐. 저건 기계의 표정이 아냐. 저건 사람의 영혼이 들어간 거야. 귀신 들린 인형이라고. 그 때 인형이 입을 움직이며

"주인님."

"아!!! 아 깜짝이야 X발!! 말도 하네 갑자기. 아 이거 존나 최첨단이네!! 기능 다양하네. 아오!!!!!"
인형은 이내 슬픈 표정으로 바뀌었다. 소름이 끼쳤다. 으으으. 저 인형은 미쳤어. 미1친 거야.

"주인님이 아니면 싫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는 공포가 사라짐을 느꼈다. 내가 인형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병태에게 넘겼던 순간도. 이 녀석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어떤 감정이었을까.
어쩌면 얘가 병태를 죽인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정당방위일 수도 있잖아?
이 녀석은 나에게만 복종하니까 내가 아니면 싫었던 거야.
나는 지민이가 이 집에서 남자와 뒹굴던 순간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인형을 보았다. 이제는 아이처럼 행복해하는 표정이었다.

"버리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버려진 내가 떠올라서 우는 걸까? 난 왜 우는 거지 젠장.
버려야 하는데... 버려야 하는데 X발... 나는 홀린 것처럼 인형에게 다가갔다. 내 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스럽게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아픔이 다 씻기도록 말이다.
죄책감과 감동과 공포가 뒤죽박죽이 된 채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를 안으니 살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버려야 하는데... 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보아뱀 같은 혀가 나오지 않았다.
햄스터처럼 귀엽고 포동포동한 느낌의 혀였다. 버려야 하는데... 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녀를 박스에서 꺼내어 헐벗은 몸을 이불로 가려주었다. 그녀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6
나는 결국 그녀와 같이 며칠이고 시간을 보냈다.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기괴하고도 환상적인 날들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봤다.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코도, 입도, 어떻게 저렇게 어여쁘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그녀가 갑자기 말을 하고 몸을 움직인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주인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인공지능이 발동합니다. 지능 수준은 굉장히 낮으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녀는 기본적인 대화를 몇 마디 할 수 있었다.
"오빠"  "잘생겼어"  "좋아"  "같이 있자"
그녀는 그런 말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너무나 진실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표정을 흉내내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나는 참으로 헷갈렸다.
그녀를 몇 번이고 안았다. 근데 등 뒤에 있는 피부의 상처가 보였다. 상처는 척추 기립근의 아름다운 곡선을 해치고 있었다.
상처는 자연적으로 치유가 안될 텐데... 병태 이 개자식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해댄 거야? 죽어도 싼 놈. 우리 마틸다를 감히...
아, 그래. 그녀의 이름은 마틸다다. 그녀에게 가장 좋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성스러운 이름을.
마틸다는 세례명이고 뜻은 기품있는 처녀이다. 병태는 분명히 마틸다에게 손을 못 댔을 거야.
거시기도 없는 놈이 무슨 수로 마틸다에게 나쁜 짓을 했겠어? 그녀는 기품있는 처녀다. 나만의 마틸다.
"마틸다. 다른 남자가 너한테 손댄 적 있어?"
"없어요."
그녀는 긍정적인 말은 반말을 하고, 부정적인 말은 존댓말을 하곤 했다. 어쩐지 마음에 드는 말투다.
아, 그녀와 계속 살 수만 있다면. 같이 밖에 나가서 공원을 산책하고 모두에게 그녀를 소개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그녀는 인형일 뿐인데. 인형. 그래, 그녀는 인형이야. 물건이야. 아냐! 그녀는 물건이 아냐.
"마틸다. 넌 물건이 아니지? 넌 사람이지?"
"전 사람이 아니에요."
"아냐! 넌 사람이야. 사람이라고 대답해. 어서!"
"난 사람이에요. 난 사람이야."
"그래. 넌 사람이야. 사람이라고. 다음부터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 알겠지?"
"응. 알았어 오빠"
 
하지만 그녀는 간단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 채로 버틸 수는 있었으나 걸을 수는 없었다.
팔을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젓가락을 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랑스러운 마틸다가 어째서 저런 장애에 시달려야 하는가. 마틸다... 마틸다...
그렇게 고민에 시달리던 날들이었다. 나는 문득 설명서를 완벽하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57페이지나 되는 설명서의 끝에는 인쇄된 쿠폰이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쿠폰을 자세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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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쿠폰 뒤쪽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어떤 일이시죠?"
"인형 전문 부서인가요?"
"네 고객님. 여기는 성인용 인형 부서입니다."
"제가 사용 설명서를 읽다가 쿠폰을 봤거든요. 업그레이드가 된다고 하던데 맞나요?"
"맞습니다 고객님. 일단 고객님 성함이랑 생년월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수현이고 2001년3월1일요"  (현재 나이 28살, 현재 년도 2028년)
"네 확인 감사합니다. 고객님께서는 50% 할인 대상자이십니다.
지금 신청하게 되시면 50% 할인 된 가격과 추가적으로 상품권 드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지금 바로 구매 도와드릴까요?"
"아... 얼마죠?"
"네 고객님. 50% 할인하셔서 총 28만 원이고요 다음달 인터넷 청구서에 포함되어 결제하시면 되는 부분이세요."
"음..."
이 정도면 구매할 수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싸잖아. 게다가 다음달에 결제하면 되니까 조금 나아.

"고객님. 그리고 6달에 걸쳐 나눠서 결제하셔도 되는 부분이세요."
"저기 근데요. 업그레이드를 하면 정말 사람처럼 되나요? 여기 적혀있잖아요. '섹스돌을 사람답게.' "
"네 고객님. 지능이 훨씬 발달해서 인간처럼 대화도 나누실 수 있고요, 균형 감각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 하시는 부분이기 때문에
스스로 걸어다닐 수도 있습니다. 또 운동신경이 발달하니까 만족도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아지십니다."
"인형의 기억은 안 사라지나요?"
"네 고객님. 데이터는 보존됩니다."
"6개월로 분할 납부 해주세요."
"네 고객님 접수되었습니다. 기사 방문은 언제가 좋으세요?"
 "지금요."

 ...
띵동, 기사가 도착했다. 그가 무신경하게 방을 들어왔다.
"저 모델인가요?"
마틸다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네."
"한 10분 정도 소요 됩니다."
"네."
그가 가방에서 어떤 부품을 꺼냈다. 그러고는 마틸다의 정수리를 촉감으로 더듬더니 연결 포트를 오픈했다.
부품들이 마틸다의 정수리에 연결됐다. 기사는 부품의 버튼을 누르더니 이내 할 일 없이 가만히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다.
"입력 포트가 정수리에 있네요?"
"아, 네. 공학적으로 설계됐죠. 다른 모든 부위는 고객님들께서 활용도가 높으셔서요. 파손될 수 있어서 정수리에 입력단자가 있죠."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목 뒤나 뒤통수에 많던데..."
"하하 그렇죠. 근데 인형이 대개 누워있다 보니까 뒤통수가 부서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뒤통수는 안 되고,
목 뒤는 고객님들께서 많이 사용하셔가지고 좀 애매하죠..."
"근데 업그레이드 되면 진짜 사람같아 지나요?"
"아... 완전 사람같아 지지는 않고요. 그냥 시리 아세요 시리? 그것처럼 대화 비슷하게 나눌 수 있다고나 할까. 그 정도예요."
"뭐라고요? 그렇다면 사람처럼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음... 근데 다들 쓰다보면 만족하세요. 그리고 걸을 수도 있고 여러가지 테크닉이 추가되거든요? 그게 진짜 대박이에요."
"아니 잠깐만요. 저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얘가 사람처럼 됐으면 좋겠다구요."
"음... 하하하."
"이거 완전히 사기잖아?"
사기라뇨 고객님. 하하..."
"어서 마틸다를 사람처럼 만들어 놔요. 어서 그렇게 하라고요!"
"컥...켁... 아, 멱살 잡지 마세요. 아 이거 놔!"
기사가 내 손을 뿌리쳤다.
"아이씨... 별 일을 다 겪네."
나는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가 움찔했다.
"저... 저기 이거 본래 고객님들한테 알려주면 안 되는 건데..."
"뭔데요?"
"사실 섹스돌에는 리미트가 걸려 있거든요. 리미트를 해제하면 거의 인간 같은 지능을 가지게 될 겁니다. 이거 받으세요."
그가 명함을 건네줬다.
[인형 전문. 010-xxxx-xxxx]
그게 명함의 전부.
"거기로 전화 걸어 보세요. 불법이니까 감안 하시고요. 참고로 저는 고객님한테 아무 말도 안 한 겁니다."
기사는 업그레이드가 끝나자 황급히 떠나버렸다. 마틸다는 좀 지능이 생겼을까? 혹시 이미 대단하다면 불법은 안 해도 되려나.
"마틸다."
"네 수현 오빠"
"기분이 어때?"
"수현 오빠 얼굴을 보니 기분이 너무 좋아져요. 잘 생겨서요."
난 조금 놀랐다. 이렇게 문장으로 말할 수 있게 되다니. 기쁘다. 기뻐.

"난 그렇게 잘생기진 않았어."
"제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수리해야 되나봐요."
"아냐, 마틸다는 고장나지 않았..."
난 그렇게 말하다가 조금 놀랐다. 마틸다는 내 대답까지 이미 예상한 대화를 던진 것이다. 높은 수준의 대화였다.

"마틸다."
"네."
"너는 생각할 수 있어?"
"나는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오빠"
"나를 어떻게 생각해?"

"사랑해요."

전여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틸다의 얼굴만이 또렷해졌다.
"넌 나를 떠나면 안 돼."
"안 떠나요. 오빠가 날 떠나면 안 돼요. 이제는 저를 다른 사람한테 주지 마세요."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

"미안해. 미안해 마틸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뭐지?
 
[   112   ]
 
경찰이다.
 
 
 
 
 
 

8
"여보세요. 동부 경찰서 강력계 나태곤입니다. 이수현 씨 맞습니까?"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손병태 씨하고 친구 관계시죠?"
병태... 병태 때문에 전화를 걸었구나. 불길하다.

"네."
"손병태 씨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건 잘 알고 계시죠?"
"글쎄요... 무슨 사고인지는 저도 잘..."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이수현 씨도 자초지종을 다 들었다고 하던데요?"
숨이 막혀온다.

"아... 아 맞다. 하하하. 얘기했었지. 흘러가는 얘기라 기억이 잘 안 났네요."
"되게 충격적인 얘기던데 기억이 안 나셨나 보네요?"
"아... 네."
"언제 한 번 집으로 방문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저희집에는 왜요?"
"하하. 그냥 손병태 씨하고 친구였으니까 한 번 얘기를 들어보고 싶네요."
"아... 그러세요?"
"네. 그냥 간단한 질문만 몇 개 하고 금방 갈 겁니다. 저희도 바빠가지고요."
"음..."
"왜요? 뭐 안 되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현재 무직으로 알고 있는데."
"... 아하하. 시간 잡아서 한 번 방문해 주세요."
"아 네. 음 잠깐만요. 제가 5분 이따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네..."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다. 젠장. 형사가 뭘 알고 있는 거지? 마틸다가 병태한테 넘겨졌던 사실을 알려나?
혹시 마틸다를 의심하는 건가? 아니면 나를 살인 용의자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야, 간단한 질문만 하고 금방 간대잖아.
그녀를 가져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압수 수색이라든가 그런 명목으로 말이야. 마틸다를 어딘가에 숨겨둘까? 어쩌지?
"오빠. 표정이 안 좋아보여. 괜찮아?"
마틸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편안하다...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쾅!! 나는 깜짝 놀라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쾅쾅!!   쾅쾅쾅!!  문을 뭐 저렇게 세게 두드려?
"이수현 씨!!! 이수현 씨!!!"
"네! 네!!"
너무 크게 불러서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뭐야. 누구야? 나는 문을 열지 않고 물어보았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좀 전에 전화드린 나태곤 형사입니다. 마침 지나가는 길이어서요. 간단하게 질문만 하고 금방 가겠습니다."
형사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다니.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런 게 아닐까? 아니면 진짜 지나가던 길이었을까?
"이수현씨?! 문 잠깐만 열어보시죠. 질문만 하고 금방 가겠습니다. 저도 좀 바빠가지고요."
나는 도저히 변명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무기력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건장한 체격의 형사 이태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형사도 한 명 더 있었다. 이태곤이 그에게 말했다.
"아, 너는 집 밖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혼자 얘기하고 금방 나갈 테니까."
"네."
역시 별 일 아니었던 건가. 집 밖에서 잠깐 서있으라는 걸 보면... 이태곤이 방 안에 있는 마틸다를 보았다.
"어이쿠. 이거 여자친구분이 계셨구나. 히야~ 진짜 미인이시네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마틸다가 생긋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하하.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태곤은 방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따라서 앉았다.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네, 하세요."
"손병태 씨랑은 친구 사이셨죠?"
"네."
"많이 친했나요?"
"아뇨. 그냥 가끔 연락만 하는 정도였죠."
"아하. 혹시 손병태 씨가 죽기 며칠 전에 택배로 뭘 보냈던데 그 안에 뭐가 들었던 거죠?"
 
 
 
 
 
 
 
 

9
뭐라고 하지. 일단 거짓말을 해야겠다. 난 내 방에 걸린 옷가지들을 보았다. 그래 저걸로 하자.
"아. 그냥 옷을 몇 벌 보내더라구요."
"옷이라구요? 택배 품목에는 가전제품이라고 적혔던데요. 무게도 50kg으로 표기돼 있고."
"아... 그랬나요?"
"확실히 옷이었습니까? 옷이 50kg이나 들어가 있었어요? 그럼 100벌도 더될 텐데요."
아... 뭐라고 말해야 하지? 뭐라고. 뭐라고.
 
"옷 맞아요."
 
마틸다가 생긋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나태곤이 그녀를 돌아봤다.
"나참. 그런 쓰레기 같은 옷을 보낼 게 뭐람. 결국 다 버렸잖아요."
"버렸다구요?"
"호호."
뭔가 이상한 대화였다. 아니 애초에 친구한테 옷을 100벌이나 보낸다는 것도 굉장히 이상하잖아. 이상해... 지금 대화는 이상해.
얼른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택배 기록도 알고 있다면 병태와 통화한 기록도 알고 있겠지.
"택배 보내기 며칠 전에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거든요. 그러니까 대뜸 옷을 주겠다지 뭐예요."
"그렇게 말을 했나요?"
"네. 그래서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죠. 그러니까 그냥 받으라는 거예요."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자신의 삶을 정리할 계획이 아니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흐음... 잘 알았습니다."
나태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와 마틸다를 번갈아 가며 봤다.
"옷은 언제 버리셨죠?"
어...음... 그 날에 버렸던가 며칠 지나서 버렸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래요?"
"네."
"손병태 씨의 죽음을 안 날에 택배가 도착하지 않았나요?"
"아...네."
"그럼 그 날에는 옷을 안 버렸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런가요... 아하하. 그런 것 같네요."
그가 약간 황당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대답을 전부 모호하게 하시네요."
"기...기억이 잘 안 나서요."
"... 하하! 알겠습니다. 아마 다음에 또 질문하러 올 것 같네요. 일단 오늘은 가보겠습니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나서 나는 현관문에 있는 렌즈를 통해 그들이 뭘 하나 엿보았다.
나태곤은 복도의 천장을 몇 번 살펴보더니 금방 복도를 떠났다. CCTV를 찾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옷을 버린 영상을 찾고 있는 거겠지.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알아보려고!
복도에는 CCTV가 없다. 하지만 아파트인 이곳의 입구에는 CCTV가 있다. 헌옷 수거함에다가 옷을 버렸다고 해야겠어.
근데 CCTV가 헌옷 수거함까지 비추고 있었던가? 아마 그렇겠지? 그렇다면 옷을 버리는 장면이 안 나와 있을 텐데.
아마 저들이 지금 CCTV 영상을 확보해 가겠지. 그러고는 내가 옷을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 며칠이고 계속 찾아보겠지.
결국 거짓말이 탄로가 날 거야.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지? 날 분명하게 의심할 거야. 어쩌지. 그 때 마틸다가 말했다.
"오빠. 나 어떡해?"
"응?"
"나 무서워. 저 형사가 잡아가는 거 아냐?"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무서워. 오빠랑 떨어지는 게 무서워."
그래서 무서웠던 거구나.
"우리 둘 다 안 잡히거나 둘 다 잡혔으면 좋겠다. 그러면 같이 있잖아."
그런 마음이었구나.
"마틸다."
"응 오빠."
"너가 혹시 병태를 죽였니?"
그동안 묻지 않았던 것. 이제는 알아야 한다.
"아니."
아니었어? 그럼 다행이다. 병태는 그냥 자살한 거구나. 괜한 걱정을 한 거였어.
"그냥 음경만 잘라버렸어."
 
 
 
 
 
 
 
 
10
마틸다가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병태의 거시기를 잘라버렸다고.
나는 약간 무서웠다. 그러나 병태가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을 테니까. 당연히 그건 정당방위로도 볼 수 있지.
하지만 그냥 아무 생각없이 병태를 죽여버린 거라면? 그건 굉장히 이상하다. 비정상적인 거야 그건.
 "마틸다. 그 때 무서웠지? 무서워서 그랬던 거지?"
그렇다고 대답해 줘. 마틸다는 가만히 내 표정을 관찰했다. 
5초 동안 그녀는 내 표정만 봤다. 5초가 지나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 이걸로 된 거야. 나는 그녀를 보호해야 해. 세상에서 제일 착한 그녀를.
목표를 확실히 하자. 나는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거야.
"오빠. 고민해?"
"응."
"어려워?"
"조금."

"나, 저거."

마틸다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명함이 있었다. 기사가 주고간 명함. 리미트 제한 해제.

"나 저거 해줘. 내가 도와줄게."

제한 해제? 마틸다는 더 나은 지능을 갖길 원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나를 도와주려는 순수한 마음일까. 무슨 생각이지.
혹시 지능을 갖고서는 혼자 떠나버리려는 게 아닐까. 지민이처럼 말이야. 그것도 아니라면.........
그 때 마틸다의 섬세한 손이 내 티셔츠 안쪽으로 들어왔다. 요염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생각 외에는. 내 안의 모든 걸 소진시키고 나자 마틸다가 내 가슴에 기대어 누웠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11
 
나는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젊은 여자가 받았다. 상냥하지만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다.
내 주소를 불러주자 금방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금액을 물으니 와서 대답해주겠다고 한다.
1시간쯤 지나자 누군가 도착했다.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였다.
아름다운 가슴의 굴곡. 탄탄한 허벅지. 몸에 붙는 원피스. 향수 냄새가 은은했다. 풍만하게 컬을 낸 빨간 머리카락.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얼굴. 아이 같은 귀여움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키는 아담했다. 귀여우면서 섹시한 스타일.
그녀가 활짝 웃었다. 표정이 마치 연습한 것처럼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서 오히려 경계가 되는 표정.
 
"안녕하세요. 전화 하신 분이죠?"
"네."
전화 너머에 있던 그 목소리잖아?

"저 사람인가 보네요?"
그녀가 마틸다를 가리켰다. 사람이라. 그렇지. 그녀는 사람이니까.
"네."
마틸다가 그녀를 봤다. 똥그란 눈으로. 뭔가를 경계하는 눈이었다. 그녀가 마틸다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뭐야?"
"마틸다."
"으흥. 벌써 이름도 있구나. 주인이 널 정말 사랑하나 봐."
"물론이지. 나 말고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마틸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뭔가 서늘한 눈빛이다.
"부러운걸? 나는 글로리아라고 해. 지금부터 너의 리미트를 해제해줄 거야."
"해봐."
마틸다는 지지 않으려는 눈빛으로 글로리아를 올려다 봤다. 글로리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는 마틸다를 내려다봤다.
"이제 너의 머리에 장치를 꽂을 거야."
글로리아는 마틸다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마틸다가 찌릿하며 눈을 살짝 감았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데. 뭐지?
"귀여운 아이네."
마틸다는 묘한 성적 흥분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리미트가 어디까지 열리는지는 예상할 수 없어. 평균적으로 1.5배 수준의 지능을 갖게 되지. 그 정도면 인간보다도 월등한 수준이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리미트가 해제되기도 해. 5배까지도 된다더라. 거의 없는 경우이긴 하지만."
글로리아가 마틸다의 입력 단자를 열었다.
"잠깐 의식을 잃게될 거야. 좋은 꿈 꿔."
마틸다의 머리에 장치를 꽂자 그녀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그런 마틸다에게 글로리아는 혼잣말처럼 얘기를 했다.
"참고로 나는 2.7이란다."
그러고는 글로리아가 나를 쳐다봤다.
"그럼 이제부터 보상을 받아볼까요?"
그녀가 새빨간 혀를 낼름거리며 원피스의 끈을 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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