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어디를 좀 가야 할 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습니다. 늙수구레한 기사님이 모는 택시였고, 당연히 화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얘기에서 출발해서 정치 얘기로 옮아 가게 되었습니다.
기사 : 분명히 빨갱이들이 뒤에 있는 거에요. 나 : (헉) 예? 기사 : 저렇게 떼거지로 몰려서 노제니 뭐니 하는거 다 뒤에 빨갱이들이 조작하는 거라니까요. 나 : (아니, 이분이..) 에이.. 설마요,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기사 : 손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촛불시위, 용산난동(분명히 기사님은 난동이라는 표현을..) 그런 거 뒤에 다 빨갱이들이 돈 대주고 조정하는 겁니다. 이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거에요. 나 : 설마요. 그럼 뭐 박원순 같은 사람들도 다 빨갱이인가요? 기사 :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유명한 사람들 중에도 빨갱이 많아요. 증거도 다 있고, 그래도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다 빨갱이라서 다 봐주고 있는 겁니다. 참~ 이 손님 순진하시네.. 나 : 증거도 있단 말이에요? 기사 : 암요.. 저보고도 증거 대라면 다 대겠구만.. 나 : (잠시 침묵..)
나 : 아저씨, 경찰서로 가 주세요. 기사 : 네? 왜요? 서대문 가신다고.. 나 : 중요한 일이니까 바로 서대문 경찰서로 가 주세요. 기사 : (어안이 벙벙..) 나 : 기사님이 분명히 유명한 사람들 중에 누가 빨갱이인지도 알고 증거도 있다고 하셨죠? 기사 : 그거야 그랬지만.. 나 : 그거 알고서도 경찰에 신고 안하면 국가 보안법상 불고지죄입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기사님한테 그 얘길 들었으니 저도 신고 안하면 걸리거든요. 신고하게 경찰서로 가시죠. 기사 : 하하하.. 농담도.. 나 : 농담 아닙니다. 지금 경찰서로 안 가주시면, 우선은 손님이 요구하는 목적지로 안가시는 거니까 승차거부쯤으로 문제가 될거고, 제가 112에 핸드폰 걸어서 기사가 제가 신고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찰서 도착하면 저랑 같이 대공상담실로 가서 아시는 빨갱이 이름 다 대시고 증거 아시는 거 다 제출해야 됩니다. 그거 안하시면 제가 기사님 성함, (조수석 앞에 있는 기사 신분증을 가리키며) 아, 000씨군요. 000씨를 경찰에 정식으로 불고지죄로 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 : (차를 길가에 세우면서) 아니, 이 사람이.. 나 : 차 세우지 마시고 당장 경찰서로 가주세요. 자꾸 다르게 행동하시면 더 수상해보입니다. 잔소리 마시고 당장 갑시다.
그 이후로 한참동안 기사는 자신이 한 얘기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고, 저는 계속 잔소리 말고 경찰서로 가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결국 기사님은 사과를 거듭하시고, 빨갱이라는 말을 다시는 안 쓰겠다고 다짐까지 하시고서야 저의 뗑깡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내리면서 괜히 뗑깡 피우고 시간 끌어서 죄송하다고, 대신 앞으로는 빨갱이 소리좀 하지 마시라고 당부를 하며 택시비를 좀 후하게 얹어서 드리고 내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사님의 생각이 바뀔까요? 저는 단지, 우리 사회에 소위 레드 컴플렉스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동안이나 그 후유증이 남게 될지 걱정이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