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위키백과)
서북청년회는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 서북청년회 중에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
출처http://ko.wikipedia.org/wiki/%EC%84%9C%EB%B6%81%EC%B2%AD%EB%85%84%ED%9A%8C
“서북청년단, 제주 4·3사건 때 악명 떨쳤다”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jeju/newsview?newsid=20100916153215386
"서청대원들은 군경의 신분으로 최일선에 나서서 토벌전을 수행했다"며 "이들에게 제주도는 남한을 평정한 이후 남은 마지막 평정 대상지였다"고 분석했다. 법에도 없던 경찰보조기능이 부여된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아래 백색테러가 노골화됐다. 논문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며 "잡혀간 이들을 구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밝혔다
'잔혹한' 서북청년단, 그 실체가 첫 공개됐다
http://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80559
"3.1시위 이후 갑작스러운 정부군의 증강으로, 침체에 빠져있던 제주도 경제는 새로운 경찰.우익 청년단들을 부양해야 하게 되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경찰의 봉급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명목으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해야 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정기적인 봉급이 없었고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공공질서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뇌물수수, 공갈, 사기 등을 거리낌없이 일삼았습니다. 경찰과 우익들은 반항하는 섬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처녀들을 강제로 아내로 삼는 행위도 다반사"
그는 1947년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제주에서 자행한 서청의 테러행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며 그 내용을 설명했다.
"서북청년단 순회 집회 때 저질러지는 제주도 주민에 대한 계속되는 테러에 관해 서청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조직원이 더 이상 제주에서 테러사건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11월18일 CIC에 사과했다. 우익들은 서청의 자금모금 캠페인을 벌임에 있어서 테러에 의존해 왔다. 서북청년단 제주도 단장이 지난 주 제주 CIC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자신의 주장을 CIC에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무자비한 테러와 탄압으로 도민들의 감정이 격하됐다"며 "경찰과 서청의 테러가 심해지면서, 젊은이들은 낮에는 산으로 올라갔다가 밤에만 마을로 내려오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서청은 비록 '반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제주에 투입되었지만 이들의 행위는 오히려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며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다 보니, 우익계통의 사람들도 상당히 포함돼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북청년단'은 월남한 청년들이 해방직후 결성한 단체로 '반공'을 앞세워 테러를 일삼은 우익단체이다.
배성관 대표는 <사이버뉴스24> 발행인, 정함철 대변인은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현재 '구국을 위한 행동하는양심실천운동본부' 대표를 맡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엄마부대 주옥순의 행적을 보면 정말 어이없는 관심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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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를 이용하는 새누리 김무성은 국민앞에 석고대죄하고,
부정선거 바뀐애는 당장 하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