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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즉문즉설]기독교인으로서 다른종교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게시물ID : lovestory_717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edIUm
추천 : 0
조회수 : 78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1/30 16:07:24

질문자:

저는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술이랑 악연이 좀 많아요. 아버지께서도 술을 많이 드셨고, 지금은 거의 안 드시시지만, 할아버지 쪽 친가, 외가 다 옛날부터 술이랑 악연이 많아서... 술이랑 몸이 잘 맞으시면 모르겠는데 술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런 문제에 있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그렇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어린나이에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어떻게 보면 참 웃긴 소리긴 한데 어린나이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고, 그런 해답을 신앙에서 찾았어요. 가족 중에 한분도 교회 다니는 분도 없고, 주위에 친구들도 교회와 거리가 멀었지만 저는 그런 해답을 찾기 위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아무튼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 교회에 가게 됐어요. 거기서 주일학교에서도 공부를 하면서...교회가면 천국가고 안다니면 지옥 간다는 목사님 말씀이나 교리를 철석같이 믿어왔습니다. 저희 다니는 교회도 엄청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였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소위 말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그런 가르침들? 그런 것들이,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배운 것들이 고등학생이 되니까 너무 혐오스러워요. 그런 와중에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될까하는...

 

 

법륜스님:

. 알겠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정의가 뭐예요?

 

 

질문자:

. 예수님의 희생하심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법륜스님:

그러면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가 끝날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나리 듯이 나리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하는 이런 얘기 성경에 있죠?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임을 알았다?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다는 것은 세상에 겁날게 있어요? 없어요?

 

 

질문자:

없습니다.

 

 

법륜스님:

없죠? 그러니까 세상에 나가서 진리를 설파했어요. 근데 그 진리를 설파하는 내용이 전통의 종교, 유대교와 가르침이 달랐어요. 그래서 그게 갈등이 생긴 거예요. 그중에 한 개 예를 들면, 유대교는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만 받을 수 있어요. 유대인 아닌 사람은 구원을 못 받아. 유대인만 구원을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이게 선민이야, 선택된 민족이야. 그러니까 구원의 기준이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교는 다른 민족이 믿겠어요? 믿지 않겠어요?

 

 

질문자:

믿지 않습니다.

 

 

법륜스님:

안 믿죠. ? 자기들은 구원 다 못 받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냐? 비유대인, 유대인 아닌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그랬어.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말했어.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난리가 났어. 도데체 네가 누군데 그런 엄청난 얘기를 하냐 이거야. 지금 보면 우리가 상식적인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얘기다, 혹세무민하는 얘기란 말이야. 그때 예수님께서 주위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 여기 중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버려진 사람이 하나 있는데, 율법주의 학자나 바리새교도들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 환자를 보고 잘 돌보고 또 자기볼일 보고 와서 돌봤다 이거야... 이런 구체적인 예를 딱 들면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누가 더 좋아 보이시겠느냐?’ 그러니까 거기 앉아있던 대중이 전부다 사마리아인이요이랬어요. 이게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고 이게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 소식이에요. 그러니 구원의 기준이 유대교는 민족인데, 예수님께서는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라 여기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이게 구원의 기준이다 이거야. 이건은 뒤에 가면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 날 왕께서 오셔서 산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떼와 이리떼를 나누듯이 나누고 너희들은 지옥에 갈지어다.’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됩니까?’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나가렛에 있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면회 안 왔다이거야.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구원의 기준이에요. 이게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거예요. 태양이 지구를 돈다.’ 이런 얘기는 없어요 예수님의 말에. 구약에는 있는지 몰라도. 그러면 그대로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기 환자가 하나 있는데 신부님, 목사님은 그냥 지나갔다. 근데 스님이 지나가다가 그를 돌봤다. 하나님 보시기에 누가 좋아 보이시겠느냐?’ 똑같이 적용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간다면 구원이 교회 안에 있다.’ ‘기독교 시스템 안에 있다.’ 하는 거는 유대교적 논리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이미 기독교가 유대논리에 빠져있다... 마치 불교가 사람이 죽으면 미련하면 소 되고, 욕심 많으면 돼지 되고, 사람 됐다가 소 됐다가 개 됐다가 돼지 됐다가 하는 건 힌두교 논리지 불교논리 아니에요. 그러나 오늘날 불교인들은 그것이 마치 불교인양 전부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데서 본인이 그러한 지금 상황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십자가 정신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죠. 그 사랑이 어느 정도냐? 혹세무민한다고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 그분은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지금 우리가 흉내내려고 해도 안돼요. 즉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그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수 있어도 그의 마음은, 그의 영혼은 아무 상처도 줄수 없었다... 이게 부활이에요. 몸은 죽여도 그 마음은 죽일수 없는... 뭐 몸뚱이가 3일 만에 살아나서 어쩌고 그런 거는 핵심이 아니에요. 제가 볼 때는. 그러니 그걸 다른 종교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기독교속에서 이미 세상에 열린 자세를 갖는 길이 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시면 돼요. 질문 있으면 하세요.

 

 

질문자:

. 정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금요예배를 갈까 여기를 올까 하고(웃음)(청중들 박수) 고민을 하고 여기를 왔는데, 하나님께서 제 생각을 스님을 통해서 열어주신 거 같고요. 스님과 예수님께서 항상 동행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청중들 박수)

 

 

법륜스님:

기독교 논리로 얘기해도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세상의 천하 만물은 뭐에요? 하나님의 피조물 아닙니까? 그럼 스님도 뭐다? 피조물이죠. 그러면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로 해서 역사를 해요. 자기 뜻을 관철시킨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스님을 통해서 역사를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맞는 얘기에요. 그러니 스님을 통해서도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성경 속에 이미 수행 적 관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불교에 이런 말이 있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가 그 상황에서 주인이 되라.' 이걸 갖다가 우리가 '수처작주'라고 하잖아 그죠? 그런데 그게 성경의 말을 빌리면 뭐에요?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 '겉옷을 달라 그러면 속옷까지 벗어주라' 그 말이란 말이에요. 누가 5리를 가자 그러면 내가 끌려가잖아요? 그럼 내가 종속적인 존재이지 않습니까? 근데 내가 10리 가줄게 그러면 그 상황에서 주인이 누가 되는 거예요? 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그는 육신이 죽어도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었잖아요. 우리는 몸이 아프면 마음이 따라 움직여가지고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이, 그 마음이 거기에 구애를 안 받았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라 하는 마음을 냈잖아요. 이걸 우리가 불교식으로 하면 뭐예요? 그거 '해탈'이에요. '열반'이에요. 몸을 죽여도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 그러니까 꼭 불교가 아니어도, 자 기독교 신자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이 놈이?’하다가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나를 죽여도 그를 용서했는데 바람정도 피웠다고 용서 못할 일이에요? 신앙적으로 보면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저 인간?’ 하면 이건 신앙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저 인간 하지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크리스천이라면 거기에 예수를 통해서 나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내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다르잖아요? 나 같으면 저거 정말 그러는데 저 사람은 신안이 있다 보니까 저렇게 살아가구나... 그러면 이게 전파력이 굉장히 생기죠. 그러니 우리가 불교다 기독교다 불교안의 무슨 종파다 이런 얘기 그리 중요한 거 아니다... 그렇다고 똑같다는 얘기 아니에요. 각각 거기 묘미가 있고 맛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넘어서서 한 단계 넘어서서 진리를 봐야 됩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을 넘어서서 보는 거를 가르쳤지,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폐쇄적으로 넣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불교를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 넣어버리니까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법상진리라는 상이라고 규정했잖아요. 진리라는 상을 지어도 그것은 뭐다? 진리가 아니다... 노자도 말했잖아요?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너머의 세계, 그걸 보고 그 길을 가야 우리가 해탈이 가능하다 이거야... 아까 한 처녀가 물었죠. 아버지로 성추행을 당했다... 윤리로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이 여인을 해방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그는 아무런 더러움이 없습니다. 그가 본래 내 몸이 더럽힐래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어리석은 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을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을 뿐이지 그것을 탁 내려놔버리면 바로 해방되는 거예요. 문제는 이 깨달음의 길을 자기가 갈 거냐... 그래서 해탈로 갈 거냐 아니면 어리석은 생각을 움켜쥐고 괴로움의 세계를 갈 거냐... 중생이 될 거냐 부처가 될 거냐의 갈림길의 자기 선택이에요. 그런데 여기 계시는 분 대부분은 부처는 되기 싫고 중생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가시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부처가 좋아 보이면 이쪽으로 가면 돼요. 다만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습관이 되어가지고 일로 가겠다고 해도 나도 모르게 한눈팔면 저쪽에 떡 있어요. 이게 습관화가 돼서.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되어가지고 안 피우겠다고 해서 끊겠다고 했는데 친구가 피우니까 나도 모르게 입에 떡 물다가 보니 벌써 빨고 있는 거예요. ‘!’ 하고 내려놓고 다시 돌아가면 돼요. 그래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면 본래 자리로 우리가 갈 수 있다... 누구나 다... 누구나 다... 일체중생계유성불.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했던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해탈의 길이 열려있다 이거야...


https://www.youtube.com/watch?v=SOCrHmXJj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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