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몸도마음도 너무지치고 힘이들어 신세한탄 한번 하고갑니다....
게시물ID : gomin_9548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ZmRmb
추천 : 12
조회수 : 672회
댓글수 : 70개
등록시간 : 2013/12/28 01:17:42
안녕하세요.
여기는 항상 눈팅만 하면서 웃고 가다가 처음 글을 써보네요.
사실 저도 다른 분들처럼 고민 게시판에 글 한 번 써보고 싶어서... 회원 가입까지 했습니다.
마음은 착잡한데 털어 놓을 곳도 없고... 그냥 참 기분이 그렇더라구요.
사는 게 참 힘이 드네요.

저는 며칠 뒤면 스물둘이 되는 여대생입니다.
저는 사실 이십이 년 남짓 살아오면서 그다지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보시면 고작 그만큼 살아놓고 무슨 투정을 부리느냐,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하시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리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봐도 너무 힘이 듭니다. 도저히 버티기가 힘들어요.

제 동생은 후천성 뇌성마비 1급입니다. 제가 두 살 때의 이야기라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원래는 정상으로 태어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급하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병원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구급차를 타고 가는 동안 산소 부족으로 결국 뇌성마비가 왔다고 해요.
그 아이는 평생을 방 안에 누운 채로 살았습니다.
말도 못 하고 걸을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눈을 뜨고 방 천장을 올려다 보는 게 전부거든요. 

저희 집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껏 줄곧 달동네, 판자촌, 산꼭대기만 전전하며 살아온 형편이었고...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저희 부모님께서는 이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심각한 알콜중독자라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 어머니께서 내리신 결론이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자궁경부암 2기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항암 치료를 받으시던 와중,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끝내 아버지가 간경화 말기와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솔직히 아버지는 별로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좋은 가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렸을 때 가족에게 버려져 한 평생을 혼자 살아오신 분이었어요. 친척도, 형제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외가 친척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 어머니께 술만 마시면 늘 하는 소리가 있었는데,
"니가 죽으면 니 영정 사진 앞에 꽃 한 송이 놔 줄 사람이 나 말고 있을 것 같냐?" 하는 말이었어요.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를 속여 어머니 이름으로 진 빚만 3000만원 가까이 됐던 것 같습니다.
돈이 생기면 족족 친할머니에게 갖다 바쳤고, 술이 들어가면 족족 집안 가구를 때려부수고, 나중에는 어머니께 손지검까지 하더군요.

그래도 그런 악몽 같은 기억만 심어주던 사람조차 죽었다고 하니 눈물이 나덥니다.
영정 사진을 보고 서 있으니 평생 조금도 그 사람을 위해 흘리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나기는 나더라구요.
물론 딱 십 분 울고 말았습니다. 왜냐구요? 우리 가족도 아닌 웬 모르는 여자가 버젓이 상복 입고 자리에 앉아 있는 꼴이 너무 기가 차서요.
우리 가족 몰래 재혼을 해서 딴 여자와 살았었대요. 그 여자도 이혼하기 전부터 만나던 여자였다는 걸 장례식장 가서 처음 알았습니다.
참... 사람이 어떻게 끝까지 그러냐... 싶더라구요.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암이 재발하셔서 결국 4기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그 암이라는 나쁜 놈은 결국은 어머니의 폐와, 뼈와, 갑상선과, 온 몸을 전부 갉아먹었더군요.
대학교 1학년 (작년) 여름 무렵, 응급실에서 사망 판정까지 받으셨던 어머니는 정말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병상에 몸을 앉히셨습니다.
제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그건 아마 없는 살림에 대학에 합격했던 날도, 아버지와 떨어져 편히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날도 아닌,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와 우리집 침대에서 다시 잠드셨던 날일 거예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힘겨웠던 여름이 지나고, 작년 겨울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그 겨울만큼은 아무 일 없이 보낼 수 있길 바랬습니다. 제발 잠잠하길 빌었습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 줄이야...
법원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앞으로 만들어 둔 빚들을, 저와 제 동생에게 갚으라며 독촉장을 보내왔어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파산 신청을 했기 때문에, 그 빚을 어머니 대신 저와 동생에게 갚으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걸 해결하려고 정말 온 사방을 발로 뛰어다니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다행히 법원 근처 법률 사무소를 돌아다니다 정말 마음씨 좋은 어떤 여성 변호사 분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재판이 잘 끝나서 무사히 해결됐지만, 지난 겨울에 그 일로 고생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 벌떡 일어납니다.
내 아버지라는 사람은 끝까지 우리에게 악몽만을 안겨주는 지옥 같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참 용케 버티셨습니다. 오늘까지도 힘들게나마 살아계시니까요.
근데 이젠 저까지 몸이 성치 않게 됐어요.

얼마 전에 샤워를 하다가 가슴쪽에 뭔가 이상한 게 잡히는 것 같아 병원에 가봤더니 가슴에 혹이 생겨 수술을 해야 한다더군요.
다행히 악성 종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술을 해서 떼어내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 집은 수술할 형편이 되지 않아요. 저는 성적 장학금과 국가 장학금으로 겨우 학교를 다니고 있고, 우리 집은 기초생활수급 대상 집안이라 한 달 먹고 살기도 빠듯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친척이라고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딱 세 명입니다.
정말 되다되다 안 되길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수술해야 하는데 좀 도와주실 수 없냐고.
그러니 한 시간 동안 오만 죽는 소리를 다 하더라구요...
나도 지금 어디가 아파서 고생이다, 병원에 입원해서 링겔 맞느라 정신이 없다, 어디가 어떻다, 집에 돈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우리도 생활비가 없어서 힘들다.

그 가족들, 저희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계실 때 찾아와서 돈 빌려간 사람들입니다.
미련한 저희 어머니는 그 인간들이 "옛 일은 그만 잊고 다시 잘 지내보자"하는 식으로 구슬려가며 몇 번 웃어주니까 그러마고 하시면서 돈 삼백을 그냥 빌려주셨더군요. 저한테 얘기하면 제가 화낼 게 뻔하니까 계속 비밀로 하시다가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참 퍽도 생활비가 없고 병원비가 없어서 고생을 하겠다 싶더라구요.
그 친할머니라는 사람, 우리 가족이랑 같이 살던 시절에 우리 어머니 하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여자였는데.
너 같은 못 배워 먹은 년이 우리 순진한 아들을 꼬셔먹은 바람에 우리 집안이 이렇게 망한 거다, 너 같은 년만 아니었어도 우리 아들 저렇게 안 됐다. 그러면서요.

아무리 저 어릴 때 일이라지만 솔직히 다 기억 납니다. 다 기억하게 되더라구요.
내 어머니 무시하고 구박하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으면 제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어머니 요즘은 옆구리가 너무 아파서 밤에도 몇 번씩 뒤척이고 일어나십니다.
병원에 가 보니,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라네요. 길어야 3개월이라고. 몇 년 가까이 이렇게 버틴 것도 기적이라고. 이제는 정말 준비를 하셔야 된다고.
이제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진통제 처방뿐이니 그거라도 많이 처방해 주겠다고 잔뜩 쥐여주덥니다.

그 얘기 듣던 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ㅋㅋ..........

어렸을 땐 나도 다른 애들처럼 꿈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글쓰는 걸 정말 좋아해서 작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실컷 노래 부르며 사는 게 꿈이기도 했고.

중학교 땐 엄마, 아빠 손 잡고 놀이공원 가는 애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고,
고등학교 땐 건강한 엄마, 아프지 않은 가족들이랑 사는 애들이 죽을만큼 부럽더니,
이제 곧 엄마 있는 애들이 부러워지겠죠. 저는.

열심히 살려고 진짜 노력 많이 했는데.

남들 하는 두 배로 공부해서 올A 성적으로 장학금도 받아보고, 어떻게든 몰래 생활비라도 좀 보태볼라고 일일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아무 걱정 고민 없이 사는 척, 남들처럼 그냥 다이어트를 언제 할까 디카를 언제 살까 여행을 언제 갈까 하는 평범한 고민으로 매일매일을 사는 척 웃고 다니고, 열심히 인사하고, 발랄하게 떠들고, 모르면서 아는 척도 해보고,
엄마 몸에 좋다는 음식 적혀 있는 책도 읽어보고, 그거 같이 먹자고 사다 요리도 해보고, 스스로한테 주문도 걸어보고...

나는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만만하지 않은 걸까요.
어렸을 때부터 피해의식 같은 거 절대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 많이 했고, 남들 다 가지는 흔한 물건 하나 없어도 욕심 한 번 안 냈습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이런 거 가지고 투정 부리면 안 된다고, 이렇게 힘들수록 더 강하게 커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았어요. 나는 가난한 게 아니라 그냥 조금 불편한 거다, 나는 불행한 게 아니라 그냥 좀 덜 행복한 거다.
대신 남들은 평생 못 겪어볼 경험을 했고, 그걸 남들보다 미리 봤으니까, 그만큼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더 빨리 자랄 수 있다.

진짜 슬픈 게 뭔지 아시나요?
엄마가 나한테 생전 안 가르쳐주던 거 어느 날부턴가 하나씩 가르쳐줄 때...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구나 본인도 직감하시고 나한테 혼자 살 땐 이런 거 이렇게 해야 된다 하고 가르쳐줄 때...

이제 도저히 못 버티겠어요.
저는 그래도 아직까지 자살 같은 건 생각도 해본 적 없고, 오히려 힘들수록 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라서...
솔직히 말하면 자살을 생각하시는 분들 마음을 이해 못 했었어요. 그거 정말 세상에서 제일 바보같고 멍청한 생각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요즘은 그 생각을 제가 하고 있네요... 참 이대로 그냥 끈을 놓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어요.

아니, 버틸 때 버티더라도 뭐 버틸 이유가 있어야 버티지 않나요...
이 넓은 허허벌판에 이제 엄마마저 가고 없으면, 저랑 제 동생이랑 어떻게 사나요.
그날로 천애고아가 되는 우리 둘은 뭘 대체 어떻게 살아야 이 고난을 이겨내고 살 수 있는 걸까요....
하다 못해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죽을 때까지 천장만 보고 살아야 하는 제 동생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어떡하나요...

아둥바둥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버티는데, 왜 이렇게 세상은 하루도 우리를 못 버티게 하는지,
이젠 그냥 어서 빨리 가버리라고 우리를 아주 기를 쓰고 밀어내는 것 같기도 하고...
딴 애들 보면 잘만 살던데... 왜 나만 그게 안 되지... 하다 못해 판자촌에서 살아도 좋으니까 그냥 건강한 가족만 옆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실 너무너무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냥 저한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음 좋겠어요.
힘내라, 기운내라 같은 말 필요 없으니까. 언젠가 밝은 날이 올 거다, 조금만 더 기운을 내라, 그런 말도 다 필요 없으니까...

나도 혼자 사는데 그거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처음에만 힘들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해볼 만하다.
가끔 가족들 보고 싶을 때는 있어도 나중에 가면 괜찮아진다.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많다. 다 그렇게 산다.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거다.

그렇게요......

거의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소연을 해보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신세한탄을 해본 적이 없어요... 누구한테 말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자존심이 워낙 강해서 가장 친한 친구들한테도 이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거든요.
정말 털어놓을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이래서 다들 하소연을 하는구나 싶어요.
그래도 마음이 정말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인가... ㅎㅎ

혹시 한 분이라도 시간 내서 이 긴 글 읽어주신 분이 계셨다면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마음이 조금 더 강해져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