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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1. 조국을 향해 앞으로(5)
막걸리를 권하면서 정이 대청에 앉아 있는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서울에 있는 유명인사라면 정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 안면이 있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얼굴들이 더 많았다.
박가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 잔치는 어제 칙선 귀족원 의원으로 선임된 7명의 대표로 자신이 자청해서 벌인 잔치였다. 법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인은 7명의 칙선 귀족원 의원과 23명의 중의원 의원이 왜국 의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박가는 왜왕이 직접 지명하는 귀족원 의원이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왜왕에게 충성을 다해 온 지 근 30년 만의 일이었다. 귀족원 의원이 됐다는 것은 자신의 충성을 왜왕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다. 결국 해낸 것이었다. 박가는 자신이 기특해 죽을 지경이었다.
‘일국의 독립은 상당한 영토와 인구, 국민의 정신・실력이 완비돼야 하는데 영토와 인구는 있으나 국민의 정신과 실력이 따르지 못하니 조선의 독립은 불가하다’ 고 주장했다가 독립운동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던가. 공자님이 들어도 치하할 말을 그놈들은 왜 잘못이라고 우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과 실력이 따르지 못하니 왜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경학원 대제학 자격으로 전승기원제 회장이 됐을 때도 그랬다. ‘우리 반도 2백만 유림은 대동단결하여 대(對)영・미 선전포고에 즈음해 결사보국, 모든 힘을 국가에 바쳐 총후 국민의 책무를 완수하자’는 선서문을 결의했다가 지사들로부터 들어먹은 욕은 수천 년을 밥먹지 않고 살아도 배가 꺼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놈들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오래전에 대일본제국에 잡아먹힌 나라가 아닌가. 그러면 당연히 왜국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신하고 백성된 도리가 아닌가. 왕씨 정권을 이성계가 무너뜨린 것과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집어삼킨 것이 무엇이 다른가. 왕이 바뀐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닌가 말이다. 이성계에게 붙어도 역적이라 안 하면서 왜 대일본제국에 협력하는 사람은 역적으로 모는가 말이다. 힘 없는 자는 어쩔 수 없이 강한 자에게 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자신이 왕이 될 사람이면 모를까 어차피 백성으로 살 거면 누가 왕이 돼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같은 조선놈이 다시 왕이 된다고 해서 그놈이 권력을 쪼개서 백성들에게 주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어느 놈이 왕이 되든 그저 순종해서 일신을 지키는 것이 왕도요, '신체발부 수지부모'가 근간인 효를 행하는 길이 아닌가 말이다. 괜히 나섰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주리를 틀려 신체라도 상하면 그것이야말로 불효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박가였다.
과연 그날 박가의 집은 부왜파들의 대회장이라고 할 만했다. 경성의 택시와 인력거는 다 박가의 집에 몰린 것 같았다. 잘 차려입은 부왜분자들이 대문이 닳도록 들고나기를 계속하는 빛이었고, 내로라 하는 장안의 기생들도 인력거를 타고 속속 도착했다. 소리하는 기생, 춤추는 기생, 옆에 앉아 술 따르는 기생이 따로였다.
흐드러진 풍악과 자지러지는 기생들의 웃음소리 속에 오후가 됐다. 요란한 자동차 경적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지더니 정무총감 엔도가 들어섰다. 엔도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박수소리와 풍악소리가 한결 높아졌다. 여기서 잔치는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한껏 거들먹거리고 있던 박가가 맨발로 뜰로 내려와 엔도를 맞았다.
저놈이 바로 정무총감이라는 놈이렷다! 강성종은 순간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도한이 그의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축하객에 섞여 있을 고등계 형사들과 밀정들이 눈치 챌지 모르니 긴장을 풀라는 뜻이었다.
정중앙에 붙어 앉은 엔도와 박가가 술잔을 주고받았다.
“축하합니다, 의원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총감 각하!”
있는대로 머리를 조아리는 박가였다. 의회에서는 수상도 불러서 조리돌림하듯이 따지고 든다고 들은 터였다. 그러면 수상이나 의원이 동급이요, 총감 따위는 발아래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습성처럼 몸이 굽신거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센징으로 태어난 설움이었다.
“총독 각하께서도 오시려고 했는데 감기가 드셔서 못 오셨습니다.”
“총독 각하께서 오시려고 하셨다구요?”
박가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이 다 듣게끔 큰소리로 되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박가 쪽을 쳐다봤다. 엔도가 그냥 하는 소리인데도 박가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들었느냐, 이놈들아! 총독이 내게 오려고 했다지 않느냐! 그것만으로도 오늘 돈을 쓰는 보람은 충분했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박가가 건배를 제의했다.
“자자, 이러지 말고 우리 천황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면서 한잔 합시다. 천황폐하 만세!”
밤이 되도록 잔치는 계속됐고, 강성종과 정도한 일행은 저녁까지 잘 얻어먹고 청계천으로 돌아왔다.
마동주는 민상희와 고애숙의 석연치 않은 태도에서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제대로 첩보원 훈련을 받은 마동주의 눈에는 당 재건도 시늉만 하는 것이 다 보였다. 여러 경로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먼저 주목한 것은 왜인강도들이었다. 아직도 왜인강도들은 잊을 만하면 나타난다는 것이었고, 덕분에 주먹잡이들도 재력가들을 보호해 주면서 벌이가 짭짤하다는 것이었다. 왜인강도들과 주먹잡이들의 연관성에 대해 캐고 들어갔다. 어딘가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냄새가 났다. 이제 강도놀음이 성공할 확률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시도를 한다는 게 이상했다. 작정하고 주먹잡이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주먹잡이들이 칼에 찔리기도 하고 머리가 터진 경우도 있었으나 그 정도라면 자작극도 가능했다. 실제로 집주인이 직접 본 경우도 있다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재력가들의 신변보호로 벌어들인 수입의 쓰임새도 의문이었다.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돈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무엇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니 작년 가을 최우용과 장태식이 세력을 규합해서 대규모 패싸움을 벌였다는 것이고, 그 후부터 왜인강도들이 극성을 부렸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최우용과 장태식이 싸웠다는 것이 믿겨지지를 않았다. 평소에 막역한 정도를 떠나서 구역 따위에 욕심이 없는 최와 경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장이 싸울 일이 없었다. 아무리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집단이라고 해도 개인적인 원한으로 대규모 패싸움을 벌일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 캐고 들어가니 주먹잡이들과 걸인들이 긴밀하게 움직이는 게 감지됐다. 소가 닭보듯 하는 사이들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리고 김경재가 은밀하게 정도한의 움막을 출입하는 것을 알아냈다. 독립투사 김경재가 걸인들의 도꼭지가 된 것은 분명 아닐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 예사롭지 않은 낯선 걸인 하나가 있었다. 바로 강성종이었다. 거기까지 파고 들어가자 전모는 밝혀졌다. 그 뒤에는 건국연맹이 있었고, 그 중심에 여운형이 있었다. 또 여운형을 보좌하는 강성종이 있었다. 놀랍게도 김재관을 비롯한 광복군의 지도부 일부도 국내로 들어와 있었다. 건국연맹의 계획이 상당히 진척된 것이었다. 수집한 정보를 종합해 볼 때, 강성종은 여운형 등과 더불어 건국연맹의 실질적인 지휘자고 거의 모든 계획이 강성종에게서 나오는 것을 알게 됐다. 건국연맹의 ‘김대철‘이 OSS의 ‘오재두‘란 것도 알아냈다. 미국의 속셈은 강성종을 앞세워 봉기를 성공시킨 후, 소련을 배제하고 조선을 통째로 삼키려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얄타에서의 합의를 미국이 파기한 것은 아니게 된다. 소련도 할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