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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소설]다윈 탄생 250주년
게시물ID : readers_183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부우부
추천 : 0
조회수 : 4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2/02 20:44:48

   

다윈 탄생 250주년

 

#1.

서점에 갔다. 나를 피해 도망친 그 사람이 이리로 뛰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저 뒤를 따라갔을 뿐인데 도망부터 치다니. 

가뜩이나 나는 걸음도 느린데 말이다. 크게 한 숨 한 번 내쉬고 여느 때처럼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사람한테는 안 된 일이긴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쫓은 게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내 눈 앞에 보인 게 그 사람이었을 뿐.

 


#2.

누군가를 쫓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 였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어서 따라가기 시작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걸음이 느리다보니 대상은 하루에 한 사람이기도 했고, 일주일에 한 사람이기도 했다. 효율적인 추격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추격의 성공률은 높은 편이다. 성공률이 높은 데는 내가 하나의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원칙을 따르다보니 내 체력이 좋지 않음에도, 대개는 내가 목표로 한 대상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원칙이란 단순하다. 꾸준히 따라가는 것이다. 빨리 도망치든 멀리 도망치든 개의치 않고 따라가면 된다. 

도망치는 사람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라, 서두를 것 없이 그 흔적을 따라가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쫓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잡을 수 있다. 이 원칙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3.

들어간 곳은 3층이나 되는 큰 규모의 서점이었다. 장사가 잘 됐던 것일까. 학습지로 연명하는 동네 서점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크기다. 

하지만 높이와 크기가 무색하게 서점 안에는 한 명의 사람도 없어 썰렁하기만 하다. 

책을 사보는 사람이 없는 요즘이라 서점이 불황인 것도 이해는 가지만.

1층에는 베스트셀러가 많았다. 인문학책이 거의 없는 대신 시험 대비용 책이나 재테크 서적, 자기계발서가 진열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재밌는 건 베스트셀러의 저자 대부분이 멘토를 자처한다는 점이다. 토익 멘토, 성공 멘토, 힐링 멘토.

한때 20대는 사서 고생해야 하고, 악착같이 참고 버텨야 성공한다는 책이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독설과 힐링이 공존하며 성행하던 그때는 뭐 그리 대단한 말씀이라고 새겨들었던 것일까. 지금은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말들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이런 책을 사보지 않는다.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해진 시대의 흐름 탓이다.

베스트셀러다운 알록달록한 표지, 그 위로 내려앉은 먼지 더께가 쓸쓸함을 더한다. 1층에는 찾던 사람이 없어 2층으로 올라갔다.

 


#4.

2층에는 분야별 전공 서적이 많았다. 경영학, 사회학, 국문학 등. 그 중 경제학 코너의 고전 명저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익숙한 탓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주무른다는 국부론부터 시작해 리카르도의 비교 우위론,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있다. 

이 중에서 내 눈을 잡아끄는 건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대학 다니던 시절 인구론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맬서스는 인간이 생산하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필연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진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러나 현재에 와보니 맬서스의 비관적인 예상과는 달리, 

비약적인 기술 발전 덕분에 식량 생산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식량이 모자라지 않게 됐다는 수업이었다.

그때는 교수님의 말이 맞았는데, 요즘 같이 다 같이 굶는 시절에는 맬서스의 주장이 다시 맞는 말이 돼버렸다. 

다들 밥그릇 싸움하기 바쁘지만 먹을 수 있는 파이는 한정돼있으니 말이다. 그래,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다.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2층에도 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5.

이 서점건물의 끝인 3층에는 과학책이 많았다. 과학이라. 고등학교를 다닐 적, 나는 과학이 싫었다. 

물리 법칙이니 과학적 사고방식이니 하는 말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인문학이 좋았던 게 아니지만, 과학이 싫어 나는 대학도 문과로 결정했다. 인생 가장 큰 실수였다.

정작 대학에 가보니 어려운 말은 문과에서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령 개혁과 개방이라는 간단하고 짧은 말이 있음에도 굳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처럼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게 

문과의 언어사용 방식이었다. 오히려 과학에서 하는 말들이야 말로 현실적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이미 늦은 뒤였다.

전공에 흥미를 잃은 덕에 전공 공부는 내팽개치고 뒤늦게 과학에 몰입했다. 

교양 과학 수업도 나에게는 너무 어려워서 번번이 낮은 학점을 받긴 했지만, 그때는 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다. 

그때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하나가 저기 보이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다.

 


#6.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기계일 뿐이라 말했다. 

종족을 영위하는 주체가 통념과는 달리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인간을 유전자에 종속된 존재로 격하시킨 도킨스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나 역시도 읽던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이 유전자의 지시에 따른 것마저 아니라면, 

나는 인간이란 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7.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지만, 인간은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유전자가 거쳐 가는 일종의 숙박업소에 불과하다.

인간은 유전자를 부여받으면서 태어나고,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 번식하며, 성공적으로 유전자를 전달한 뒤에는 죽어도 그만이다. 

인간의 생존 목적은 유전자의 보존이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긴 해도 인간이 나고 죽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끝끝내 인간은 유전자의 지휘 아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유전자에 종속된 인간은 위대하건 아니건 쓰고 버려질 소모품에 불과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8.

유전자의 선택에 따라 쓰임이 결정되는 소모품으로서의 숙명도 모른 채, 정치니 전쟁이니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여전히 일삼고 있는 게 

인간이란 종의 현실이다. 인간이 처한 현재의 위기는 그들이 자초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인간은 여전히 남 탓하기 급급할 뿐, 

대책을 세울 생각은....

 


-이이익 쿵-

 


#9.

구석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3층에는 더 올라갈 곳이 없으니 구석에 숨은 것이다. 잘 숨었다 해도 결국에는 발각될 터였지만, 

그 사람은 그마저도 유예시키지 못하였다. 숨다 실수한 탓인지, 책장이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숨는 것 하나 제대로 못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기나긴 추격의 끝이 보인다.

 


#10.

결과론적이지만 구석에 숨은 것은 제 발로 독에 들어간 셈이 됐다. 

자신이 넘어뜨린 책장에 발이 끼어 도망치지 못하는 한 명의 인간, 독 안에 갇힌 한 마리의 쥐.



#11.

몇 걸음만큼 가까이 다가가니 무어라 말을 한다. 하지만 이제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 청력이 많이 줄어든 탓이다. 

그렇게 쳐다볼 필요 없다. 내 온몸이 엉망인 건 나도 잘 안다.

 


#12.

대꾸가 없어서인지 이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체념한 것일까, 공포에 질린 것일까. 어느 쪽이든 자신의 끝을 예감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명멸하는 형광등이 더러운 볼 위 눈물 마른 자국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바들바들 떠는 그의 뒤로 종의 기원이 보인다. 다윈 탄생 250주년을 맞아 출간된 한정판 종의 기원이다. 

종의 기원을 모르는 사람도 사고 싶게 만들만큼 잘 만든 한정판이다. 제목도 멋있지 않은가, 종의 기원.

 


-뚜벅-

 


#13.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이래로 무수한 논쟁이 이어졌다.

 


-뚜벅-

 


#14.

대부분 진화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모르고 하는 말들이었다.

 


-뚜벅-

 


#15.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으며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는, 적응의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뚜벅..-

 


#16.

나는 나의 모습이 이렇게 변한 것을 진화로 받아들였다.


 

-으아아아아-

 


#17.

그러니 당신도 이 세상의 적자가 되지 못한 것을 받아들였으면 한다.

 


-우적우적-

 


#18.

그렇죠? 내 말이 맞죠, 다윈?

 


-우적우적-

 



#19.

제발.

 



#20.

맞다고 말해줘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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