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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5세가 겪는 이민
게시물ID : economy_105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김모양
추천 : 14
조회수 : 1964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5/02/06 08:20:40
뉴질랜드 1.5세분이 쓰신 이민 글을 읽고 동감가는 점과 생각하게 되는 점이 몇 있어 글을 써봅니다.

캐나다 이민 15년차인 1.5세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투자이민으로 캐나다에 정착했고, 지금은 평범한 캐나다의 한 시민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민가는 이유 중 하나로 '자녀 교육'을 꼽습니다만 막상 이민 오신 후의 아이들의 교육과 적응은 어리니까 쉽겠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겠지, 하고 방치하시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을 빚게 되고, 이 갈등은 수년이 지나도 치유가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또한 아무리 적응을 잘 하더라도 1.5세들은 1세와 2세들과는 또 다른 그들만의 애환이 있지요. 어린 자녀들과 이민을 준비하시는 분이라면 이민 1.5세가 겪는 삶이 어떤 지 한번 알아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1. 언어로 생겨난 문제는 단순히 나중에 언어를 잘 하게 됨으로서 해소되지 않는다. 

물론 어린 아이들은 어른보다 언어를 더 빠르고 쉽게 배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언어를 습득하는 방식과 속도는 아이마다 다릅니다. 저와 제 동생은 살면서 현지어를 꼭 배워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을 두 번 겪었는데, 첫번째는 불어였고, 두번째는 영어였습니다. 동생은 흔히 생각 하시는대로 가르쳐주는 대로 모방하고 이해했지만 저는 달랐어요. 

한 문장을 가르치면 금방 따라하는 게 아니라 왜 한국어가 그런 문장으로 변하는지, 각 단어의 뜻을 배우고, 또 거기에 따른 문법 체제를 배워야 납득이 갔고, 그걸 다 외워야 했지요. 제게 불어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부모님께 저는 꼭 어른 가르치듯이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제 인생 최고로 힘들게 공부했던 시기를 처음 불어를 배워야 했던 초등학교 2학년으로 기억합니다. 이게 꼭 동생이 더 어려서만도 아닌게, 훗날 영어를 배울 때도 동생은 불어를 배울 때와 비슷하게 배웠고, 그때 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른보다 빠르게 배운다고 해서, 쉽게 배우는 아이만 있는 건 아니란 소리지요.  

또 어린 나이에, 낯선 환경에서, 언어가 안 통해서 겪은 답답함과 상처들은 어른들이 겪을 때보다 훨씬 크게 아이에게 다가옵니다. 어른보다 더 위축되기 쉽고, 이미 다 자라서 성격이 확고해진 어른과는 다르게 성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성인이 된 후 낯선 것을 대하는 방식이나, 사람들과 관계맺는 방식등에도 미치지요. 예를 들어 저는 언어가 유창한 지금도 주위 사람들이 제 말을 이해 못 하면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약간의 콤플렉스가 생긴 거지요. 


2. 정체성의 문제. 내가 확고하더라도 주위에서 그렇게 알아주지 않는다. 

저는 자라면서 특이할 정도로 정체성의 혼란이 없었어요. 내가 한국인인지, 캐나다인인지 꼭 정의해야 할 필요도 못 느꼈고 그냥 한 나라만 알고 자란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즐길 수 있으니 이득이라 여겼지요. 근데 꼭 내가 혼란스러워야지만 정체성의 문제가 있는 건 아니더군요. 주위 사람들이 알아주는 내 정체성과 스스로가 정의한 내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게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좀 어려운 문젠데, 예를 들어 제가 한국에서 쭉 자랐다면, 주위에서 저를 볼 때 이십대의 여자, 정도로 본다면 캐나다에선 젊은 '동양' 여자, 혹은 젊은 '한국'여자, 라는 필터가 하나 더 붙어요. 그리고 모든 종류의 필터에는 그에 따른 선입견이란 게 있지요. 제가 젊기에 활발할 거다, 여자기에 달콤한 걸 좋아할 거다라는 식으로 제가 동양인, 한국인, 이기에 따라붙는 선입견이 꼭 있어요. 이건 사회 전반의 인식이기에 제가 아무리 영어를 잘 하고 현지 사람들을 많이 사귀고 시민권이 있어도 개인의 노력만으론 바꿀 수 없는 거에요.

이게 꼭 인종차별이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게, 한국 사람은 이러이러해서 좋다/나쁘다,라는 평가를 내리는 게 아니라, 한국 사람은 이럴 것이다, 라고 그냥 하나의 특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그 특성을 실제로 제가 가지고 있을 경우엔 그게 배려로 느껴지지만 그 특성을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엔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에요. 마찬가지로 이민 1세들이 이민 1.5세, 2세들에게 가지는 선입견도 있어요. 쟤는 1.5세니까, 2세니까 영어가 더 쉬울 거다, (한국에 관련된)xx를 이해하지 못할거다, (한국에 관련된)yy를 모를거다, 한국 아이들에 비해 더 버릇이 없을 거다, 등등이 흔한 선입견이지요.


3. 양측 변호와 동시 통역의 삶.

제가 읽은 글을 쓰신 분은 이 부분에서 부모님과 갈등이 좀 있으셨던 것 같아요. 이건 케바케로 정도가 달라지긴 하지만 모든 1.5세들이 겪는 일이에요. 설사 부모님이 영어가 유창하시고, 자식한테 의지를 안 하셔도 생기는 일이에요. 1.5세들은 중간자의 입장에서, 현지인들한테 부모님을, 부모님께 현지인들을 변호하고, 통역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어요. 설사 언어가 통하더라도, 양 문화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양 문화를 다 아는 사람이 해결하는게 가장 쉽거든요. 본인이 하기 싫더라도 부모님들에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자식이고, 현지인에겐 갈등을 빚는 외국인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사람의 자식이다 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부모 자식간의 권력 관계를 바꿉니다. 부모 자식 사이에 권력이라니, 좀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자식이 갖고 있는 현지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월등한 언어실력이 현지 사회에서 자식을 부모보다 더 인정받는 인원으로, 혹은 그런 인원으로 보이게 만드는 거에요.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인정받았을 부모의 예전 경력과 인생경험이 현지에선 현실과 무관한 일이 되버리는 거지요. 개인적인 예를 들자면 제 부모님은 제 대학 진학이나 진로 고민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못 해주셨어요. 두 분 다 한국에선 석사까지 마치셨고 전문적인 직업이 있으셨지만 캐나다에서의 상황은 고등학생이었던 저보다 모르시니 어쩔 수 없었지요. 저도 상대적으로 부모님의 조언을 가볍게 흘려듣고요.

거기다 이민자들의 사고는 이민갔을 당시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교포사회가 더 보수적이라고도 하고요. 예를 들어 결혼 전 성관계를 갖는 일이, 캐나다 사회에선 당연한 일이고, 요즘 한국에서도 좀 더 숨길 뿐, 나쁜 일은 아니라고 믿지만 이민 사회에선 아직 부도덕한 짓이란 의견이 더 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고 자란 2세들은 현지인이라 여겨 상대적으로 좀 관대한 취급을 받는 데 비해 1.5세들은 말이 통하니 더 많은 간섭을 받습니다. 그래서 1.5세들은 자라면서 보통 가정에서보다 더 심화된 세대 차이와 문화 차이를 동시에 겪어내야 합니다. 

이민 가정의 가족관계는 그래서 참 특이합니다. 양 나라의 문화와 언어가 섞인 이상으로 독특한 감정교류가 있어요. 부모가 다 큰 자식을 보고 느낄 법한 대견함을 자식은 현지인과 서툰 영어나마 자신있게 대화하는 부모를 보고 느끼게 됩니다. 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안 겪었을 일들을 겪으며 내 의사와 무관하게 이민을 간 사실에 짜증을 느끼다가도, 한국에선 더없이 당당하고 유능하셨을 부모님이 안쓰러워지기도 하고요. 보통 가정보다 갈등의 소지가 많기에, 부모와 자식 둘 다 좀 더 열린 사고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필요로 해요. 


그냥, 어리니까 잘 적응하겠지, 선진국에서 사니까 잘 자라겠지, 하고 방관하지 마세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와 제 동생은 주변에서 정말 적응 잘 했다, 잘 컸다 라는 소리를 듣는 케이스에요. 학창시절엔 전교에서 손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 했고, 영어와 한국어 둘 다 유창하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번듯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각종 경조사를 챙기고 휴가를 꼭 부모님과 보낼 정도로 돈독합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제가 부모님께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애증이었고, 저도, 부모님도 서로를 이해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지금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이해 못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감싸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주위에서 보기에 아무 풍파없이 무난했던 저희 가정이 이럴진대, 다른 가정들은 어떨까요.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들, 특히 자녀 교육때문에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민 후의 교육방침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해 보세요. 이민은 무척 힘든 일이고, 적응할 때까지 신경써야 하는 일이 한둘이 아니라 어리고 적응이 빠른 자녀들은 다른 문제들 뒤로 밀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거고, 선진국의 학교가 자녀를 대신 키워주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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