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던 제 일상에 그이가 들어온 건, 떄이른 벚꽃이 한창이던 3월 말의 어느 늦은 오후였습니다.
그날 저녁 귀한 손님들이 오신다해서 부랴부랴 칠레산 대패삼겹살을 사러, E마트에 들른 참이였죠
주말이라 그런지 그날따라 식품매장에서는 이런저런 시식행사들이 많기도 참 많더라만은.
시식이란게 사실 그렇습니다. 오며가며 만두 한두개쯤 부담없이들 드시라고 벌려 놓은 판이지만서도
우리 같은 촌사람들이야 어디 그리 쉽게 발이 떨어지나요, 거 노릇노릇하니 만두 한번 집어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지만서도,영 남사스럽기도 하고 두 눈을 부라리고 서있는 시식아줌마들만 보면 영판 오금이
저리니,시식대의 군만두도 떡갈비도 괜시리 내꺼 인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인지라 그저 썸이나 좀 타다가
볼장 다 보는게 태반이지요. 술기운에 아니고서야 시식코너랑 진도 한번 빼보는게 여간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오늘은,파크랜드 양복에 랜드로바도 신었겠다,대처에 나온지 벌써 십년이겠다, 이만하면 나도 일류는
못되도 시식코너 앞에 설만한 규모있는 손님은 된다싶어 "거 만두나 두어개 먹어 볼까!" 하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못난 발걸음을 내심 나무래가며 뱃심 좋게 한번 나서보려는 참인데, 때마침 간드러진 명품정장에
멋스러운 발리구두를 매치한 왠 송중기 닮은 젊은 친구가 사뿐사뿐허게 만두시식코너로 가더군요
1 시식코너당 1 시식인이 불문율이라 좀 기다려볼 양으로 저이를 슬쩍 보니, 왠 손가방에서 뭘 꺼내는 눈친데
가만보니 개인식기함에 소금통입디다. 그리곤 꺼내든 번쩍번쩍 빛나는 스댕젓가락으로 만두를 척하니 집고는
갖고온 소금에 착착 찍더니만 만두 댓개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길래 거 젊은 친구가 만두 한번 걸지게도
먹는다 허허하는데 이내 아줌마한테 세련된 북유럽미소를 살짝 건네고는 경쾌한 투스텝으로 어딘가로 사라지
길래 이제 가나보다 싶은데 아뿔사 순식간에 떡갈비코너에 떡하니 등장하더니만 어느새 또 삼겹살코너에
나타나지를 않나, 제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는 아 글쎄 너비아니코너에 가있지 뭡니까.
발리구두에는 GPS도 달려나오는가, 내치는 스텝마다 매번 다른 시식코너 앞이니,도무지 당해낼 재간은 없고,
그저 만만한 제 랜드로바놈한테나 이놈아 너는 왜 저렇게 못하느냐하고 공연한 화풀이나 부려볼 밖에요.
10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그 젓가락 앞에 유린당한 시식코너가 무려 6곳이니 이거 예삿놈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시식코너를 활보하길래 혹시 E마트의 위트가이 정용진씨인가 싶어 유심히 봤지만 아직 뼈가
영판 덜여문게 암만봐도 새파란 숫총각이라 이상한 노릇이다 싶은데 가만보니 나한테는 장비마냥 서슬이 시
퍼렇던 너비아니아줌마도 이 친구 앞에서는 새초롬하니 다소곳이 서있는 모양이 따끔한 한마디는 고사하고
우리 낭군님 고운 손에 나뭇잎 동동 띄운 냉수 한사발 못건네드려 매양 아쉽기만한 새색씨 꼴이라,
세상 참 더럽다,이제는 시식도 완얼이구나,이 놈의 E마트 확 다 망해버려라하며 샐쭉해선 그 친구를 보는데.
이제사 이 친구도 막판이라,예의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젓가락 무빙과 신명나는 퀵스텝으로 입구쪽의 족발
세네개를 낼름 집어먹고는 총총히 전자매장쪽으로 떠나가는 눈치입니다.
아아.말로만 듣던 프로 시식인이였구나. 개인장비 들고다닐때 눈치챘어야 하는건데하며 못난 저를 탓해보는데,
그 순간, 제 몸을 덮쳐오는 미묘한 위화감,그리고 순식간에 팽팽해진 매장안의 긴장된 분위기.
곧 그 이유를 알게된 저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쳐와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자세히보니 그가 마지막으로 집어먹은 그 족발은 시식용이 아니라 팔려고 담아놓은 판매용 족발.
넋놓고 있다가 졸지에 통수맞은 족발아줌마도 송아지마냥 눈만 끔뻑끔뻑하다 뒤늦게 어하지만 이미 끝난 일.
그는 제이슨 본씨 마냥 인파속에 종적을 감추어버렸고 식품매장안엔 그가 던지고 간 화두만이 오롯이 남아
영롱히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젓가락이 나고 내가 젓가락인 젓아일체의 순간, 소유의 구분은 오로지 젓가락만이 결정할 뿐이니.
젓가락으로 집을 수만 있다면,그리고 들어올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세탁기라도 이제는 나의 것.
내 젓가락이 닿은 것이라면 다 내것이라는 강한 소유욕과 규칙따윈 깨부숴버리는 파괴적인 박력을 무기삼아
천민자본주의의 첨병 SSM의 횡포에 홀로 맞서는 E마트의 게릴라이자 요식업계 최후의 로빈후드인 그가
내 손안의 작은 악마,젓가락이 이끄는 곳으로 유유히 흘러간 곳은 아직 그 어떤 젓가락아티스트도 감히 도전
하지 못했던 금단의 영역, 전자제품코너.
티브이나 냉장고야 젓가락리프트 40정도는 예사로 드는 그로서도 다소 무리이겠지만,
고까짓 알량한 전자렌지니 토스트기쯤이야 손 부끄러워 못할 노릇이지,마음만 먹는다면야 솔찬하겠지요.
프로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엔 늘 죄가 없으니 그에게 돌을 던지는 건 못난 자들 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