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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함께 슬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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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5. 북소리(5)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세계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어 그 안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 붉은 군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해방군이라는 인상을 세계인민들에게 심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조선책임자를 단시일에 부각시키는 데도 꼭 필요합니다. 조선에서의 우리의 목표는 북부지역만이 아니라 남부지역에서도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조선에는 우리를 추종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숫자도 우파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오래잖아 남부지역도 우리 연방에 흡수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조선에서 철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기어코 신탁통치를 강행하려 들면 그때 다시 점령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미제의 마수에서 북부지역만이라도 구해내자면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명분도 섭니다. 미군은 영락없는 점령군이 되고 말입니다......”
“미국이 신탁통치를 철회하자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두옌코프가 또다시 제지하고 들었다. 근래 들어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듯한 네멘스키에게 경고를 하는 의미였다. 네멘스키는 두옌코프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스타로프를 향했다.
“ 대원수 각하, 미국이 그렇게 나오기 전에 먼저 조선의 자력 독립을 명분삼아 일본을 반분하자고 요구하십시오. 관철이 안 된다고 해도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일본을 철천지 원수로 아는 조선 인민들이 우리 소련을 혈맹으로 굳게 믿게 될 테니까요.”
마동주의 의견은 골돌린의 것이었다가 이제 네멘스키의 것이 됐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던 스타로프가 ‘짝짝짝’ 박수를 쳤다.
“동지의 견해는 훌륭하오. 코앞이 아니라 우리는 먼 곳까지 볼 필요가 있소. 병력을 당장 철수시키시오.”
명령을 받은 소련군은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철수를 시작했다. 건국연맹에 왜군 포로들은 물론 왜군에게서 획득한 무기까지 남김없이 넘겨주고서. 소련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해안도 신속하게 봉쇄됐다.
이시이를 확보하라는 미국과 소련의 지령이 강성종과 마동주에게 각각 하달됐다.
간간이 들리던 만세소리가 오후가 되자 그예 참지 못하고 거리거리 골목골목마다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부왜파들과 왜인들을 색출하라는 건국연맹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청화정에서 술자리를 가진 부왜문인들 중에 제일 먼저 잡힌 자는 우오한이었다. 우가는 벌거벗은 채 여사에서 자다가 끌려나왔다. 신새벽, 함께 자던 게이꼬는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우르르 몰려다니는 소리에 깨어 우가를 깨우려 세차게 흔들어 보았지만 곤드레가 된 우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포기하고 혼자서 줄행랑을 쳐버렸다.
지정받은 시설물의 점령을 끝낸 사람들은 청년단원들을 앞장세우고 부왜분자들과 왜인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졌다. 우가는 꼼짝없이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청년단원 하나가 우가를 우악스레 흔들었다. 누구라도 의심을 살 만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술에 취해 여사에서 벌거벗고 자고 있는가 말이다.
겨우 깨어난 우가는 화들짝 놀랐다. 험상궂게 생긴 청년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었다. 금세 무슨 일인지 가늠이 됐다. 덜덜 떨면서 발치에 있는 옷을 끌어당겨 입으려 했다. 그러나 청년들이 거칠게 옷을 빼앗았다.
“이름이 뭐요?”
“우...... 박문수요.”
곧이곧대로 말해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떠올린 이름이 박문수였다.
“암행어사 박문수 말이오?”
“그, 그렇소. 동, 동명이오.”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왜 하필 박문수라는 이름이 떠올랐을까. 조선조 청렴하고 명민한 관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박문수와 지금 여사에서 벌거벗은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들의 심문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한 청년이 물었다.
“당신 이름이 정말 박문수라는 말이지?”
“그렇소. 내 이름은 박문수요.”
더듬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법 또록또록하게 말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에 서 번갯불이 번쩍했다. 그 청년이 사정없이 따귀를 갈긴 것이었다.
“동지들, 이놈이 바로 그 유명한 왜놈 앞잡이 우오한이라는 놈이오.”
“정말요?”
재수 없게도 그 청년은 자신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름이 확 끼쳐 왔다. 언제 이 쓸개빠진 조센징놈들이 이런 일을 꾸몄단 말인가. 우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마당에 패대기쳐진 우가의 몸뚱이에 발길과 몽둥이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최소한의 폭력만 쓰고, 피치 못할 경우를 빼고는 특별법원의 재판을 받게 하라는 것이 건국연맹의 지시였지만 지켜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청년단원들에게 은밀하게 따로 내려온 지시는 즉결처분을 해버리되 되도록이면 교살을 하라는 것이었다. 피를 흘리면 비린내도 비린내지만 전염병이 발생할 염려 때문이었다.
김광주가 인천 부둣가에서 잡힌 것은 해질녘이었다. 군중들의 발소리에 새벽에 잠이 깬 김가는 상황이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낮게 선동하는 소리들도 들렸다.
“여러분! 민족반역자 부왜파놈들을 찾아냅시다! 그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찾아내서 때려죽입시다, 여러분!”
“여러분! 왜놈들도 찾아내서 다 죽입시다, 여러분!”
“아니오! 왜놈들은 무조건 죽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 동포들과 교환해야 하니 무조건 죽이지는 마시오!”
등골이 오싹하면서 술이 확 깼다. 김가는 잽싸게 옷을 입었다.
“선생님, 같이 가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우리말을 제법 알아듣는 왜인 기생이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이년아, 내가 지금 너하고 같이 가게 생겼냐, 나도 죽을 판에? 거칠게 뿌리치고 여사를 나온 김가는 일단 군중 속으로 묻혀들어갔다. 군중들에게서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아니, 이 바가야로 조센징놈들이 언제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했더란 말인가. 놀랍고 두려웠다. 자기네들이 조센징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다. 그래도 지난밤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평소 같으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김가였다. 예술가들은 그렇게 마셔야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터였다. 취하지 않고 어떻게 예술이 나올 것인가. 예술은 항상 꿈결 속에서 탄생하는 무엇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어젯밤에는 일찌감치부터 아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대는 우오한을 구경하느라고 다행히도 술은 적게 마신 것이었다. 우가의 작태는 가관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거시기를 덜렁거리며 나대는 꼴이라니. 아무리 기생집이고 술이 곤죽이 됐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우가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벌써 길에는 여기저기 시체가 나딩굴고 있었다. 김가의 등에는 식은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집으로 가면 안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농사를 짓는답시고 김가는 몇 해 전에 고향 사릉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말만 앞세웠을 뿐, 지금까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제 손으로 심어본 적이 없었다. 문인협회다, 임전대책협의회다, 강연회 다 해서 서울에서 살다시피 했던 것이다. 왜국으로 가야만 했다. 살길은 그것 뿐이었다. 조선땅에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이제 다 틀린 일이었다. 문득 애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지웠다. 자신부터 살고 볼 일이었다.
김가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인천으로 향했다. 가다가 보니 수중에 돈이 별로 없음을 깨달았다. 부천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문귀동은 부천에서 손꼽히는 지주에다 거물 부왜파인지라 벌써 변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문가의 집으로 향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대궐 같은 문가의 집에서는 여러 사람이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죽어도 통곡도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김가는 얼른 발길을 돌렸다. 노를 저어 본 적도 없었지만 쪽배라도 훔쳐야 했다. 맞아 죽느니 차라리 왜국으로 가다가 바닷물에 빠져죽는 것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