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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서부희씨의 명복을 빕니다.
게시물ID : humorstory_961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핑크빛공주♡
추천 : 5
조회수 : 78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5/05/07 20:25:47
사랑하는 딸을 가슴에 묻고 너무나 답답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어떻게 나를 두고 먼저 갈 수 있는지..
어디다 하소연 할 곳도 없어
한자 한자 치며 사연을 올립니다.
길더라도 꼭 읽어주시고 답글 달아주세요..
(혹시 도와주실수 있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을 복사해서 많은 분들이 읽고
생각을 나눌수 있는곳에 게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제 딸의 싸이월드이니 꼭 한번 들러 주세요.
www.cyworld.com/tomato117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04년 4월 17일, 
이젠 고인이 된 사랑하는 딸 부희와 
‘D’ 출판사에 근무하며 ‘K’ 대학 경영학부 
야간 1학년에 재학중인 ‘김’군은 
서로에 대한 설렘을 안고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후 2005년 3월까지 둘은 보통의 남녀가 그러하듯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살 직전 내게 털어놨던
내용과 자살후의 유서, 그리고 친구들에게 들었던
제가 모르던 내용들은 안이한 제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답니다.
내 딸은 전부터 남자친구의 대한 주위사람들의 평판이 신경 쓰여 
늘 좋은 점만을 얘기했고 힘든 모든 일들을 나에게만 얘기했었습니다. 

그중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딸애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관계를 거부하다 
‘너와 결혼하겠다. 내가 널 책임질 테니 날 믿어라’는 한마디에 
너무도 어리석게도 허락하여 김군과 첫 관계를 맺었고
이후부터 돌변한 ‘김’군의 행동에 대해 딸애에게 듣고
나중에 직접 격게된 전 정말 김군에 대해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더욱이 유서에 남겨진 것과 같이 교제 기간 동안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을 믿으라며 ‘김’군은 고인과 함께 
구체적으로 혼수와 신혼 집에 대해 얘기했고 
시댁 부모님과 나한테도 직접 찾아와서 허락을 받아 
양가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교제를 해왔습니다. 

내 딸과 ‘김’군과의 만남부터 오늘의 이르기까지의 모든 얘기들을 
이 좁은 곳에 어찌 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내딸 부희가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마음 고생하며 
괴로워하던 몇까지의 일들을 이대로 그냥 흘려보내면
내 딸이 단순히 맘이 약해 자살한 멍청한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속에 묻혀질까 두려워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첫 번째로 2004년 8월 내 딸과 ‘김’군은 ‘김’군이 
여름휴가를 빌미로 만난 지 4개월 만에 제주도로 여행을 갔습니다. 
내 딸애가 어리석었던 것일까요? 
단순히 연인 관계에서의 여행이라 생각하고 
별다른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난 그곳에서 
‘김’군은 결혼을 전제로 하여 자신이 내 딸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후 
관계 맺기를 수 차례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딸애는 김군을 만난 지 4개월뿐이 되지 않았고 
더욱이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에 두려움과 걱정으로 
끝까지 관계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김’군은 이곳까지 왔고 
또 결혼을 약속한 상태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며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김’군은 독립해 나오라며 자신의 집 근처인 
화곡동 언덕 맨 꼭대기에 이미 경매로 넘어가 싸게 나온 집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려도 독립하고 싶다며 화곡동에 집을 얻은 딸은
그날 이후부터 결혼을 빌미로 집 열쇠를 얻어내어
자신의 집처럼 딸애의 화곡동 전셋집을 오간 김군과 만났습니다.
하지만 교제기간동안 딸애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여성으로서는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연 유산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군은 고인과 같이 병원에 몇 차례 다녀와 주었지만 
이때부터 딸애를 무시하며 결혼에 대한 얘기를 외면하고 행동마저 돌변하여 
관계를 요구하는 때 이외에는 외식이나 데이트 없이 연락하는 횟수가 뜸해졌다고 
딸애가 제게 자주 하소연 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며
잦은 다툼과 김군의 책임 회피에 상처를 받은 딸은
결국 ‘김’군에게 크게 실망하고 결혼까지 약속한 상태임에도
올해 3월 김군과 헤어짐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딸애의 모습을 보던 김군은 며칠 뒤 다시 만나 
“앞으로 사람답게 살겠다”, “당신과 당신의 어머님께 정말 잘할 테니 
지켜봐 달라”며 다시금 만나주길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사귀는 것을 빌미로 3일간 계속하여 관계를 맺고 이때의 관계로 인하여 
딸애는 두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3일이 지나자 다시 헤어지자고 하며 
내 딸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끝으로 핸드폰도 받지 않은 채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이에 너무도 화가난 저는 
제가 직접 ‘김’군을 만나겠다고 했지만 딸애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나 잘 얘기해 보겠다며 ‘김’군이 재학중인 K대학교로 
2005년 4월 11일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김’군을 만난 딸애는 
잠시 대화하기를 부탁하였고 이에 ‘김’군은 대화를 하겠다며 같이 
‘김’군의 차로 갔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김’군이 임신에 대하여 책임회피를 하자 딸애는 오른손을 들어 
‘김’군의 뺨을 때리려 하였지만 ‘김’군이 딸애의 오른손을 낚아채고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때리려 하였습니다. 그렇게 손을 잡힌 딸애는 
“차라리 때려라”고 말했고 이에 ‘김’군은 “개 값 물기 싫다”며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걸어와 딸애를 차문 밖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때 차에서 밀쳐져 바닥으로 떨어지며 구두굽이 부러진 제 딸은 
이에 너무도 상처를 입고서 내게 전화하여 ‘이제는 정말 끝났다’며 
하소연 하였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전 너무도 화가 나서 
평소 지병인 저혈압으로 집에서 쉬고 있던 2005년 4월 12일 
‘김’군에게 연락하여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더욱이 내 딸과 
결혼까지 약속하고 만나던 사위 같은 사람이었기에 
‘김’군이 만나기 편한 곳을 정하고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재차 전화를 했을 때야 ‘김’군이 정한 시간에 
인근 커피숍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커피숍에서 ‘김’군을 만난 저는 
그래도 내 딸이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좋은 말로 타이르며 
둘이 대화를 통해 잘 해보길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김’군은 
내 얘기는 듣는 척도 안하며 ‘어머님께 일일이 보고할 의무도 없고 
모든 얘기를 들으실 권리도 없지 않습니까? 라 말하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자 너무도 속상했던 저는 
끝내 딸이 ‘김’군이 걱정할 테니 얘기하지 말라던 두 번째 임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같이 병원에 다녔던 ‘김’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애가 내 애가 맞느냐? 
임신을 했다 해도 그저 정자 덩어리일 뿐이다. 임신은 어차피 당사자의 일이고 
성인 남녀로서 가질 수 있는 성적인 것일 뿐이다’며 저한테 반문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제가 ‘김’군에게 장모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으로서 
너를 안 때리고는 못 가겠다고 하며 안경을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김’군은 순순히 안경을 벗었고 저는 ‘김’군에게 
우리 사랑하는 딸 눈에 눈물 흘리게 한 죄, 책임지겠다고 약속해놓고 못 지킨 죄, 
마지막으로 앞으로 사람답게 살라며 ‘김’군의 왼쪽 뺨을 제 오른손바닥으로 
세 대 때렸습니다. 그러자 ‘김’군은 바로 안경을 쓴 후 커피숍의 웨이터를 
호출하여 경찰에게 저를 폭행혐의로 신고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웨이터는 몇 번이나 극구 말렸으나 ‘김’군은 지 어머님과 같은, 
장모님 되었을뻔한 저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그 후 출동한 경찰에게 연행당하여 
처음에는 파출소로, 그 후에는 경찰서로 불려갔습니다. 
제가 평소 지병인 저혈압으로 병원에 있었기에 몇 시간 동안 조서를 꾸미고 
온몸의 마비증상으로 열손가락에 지장 찍는 것마저 
겨우 마친 저는 유치장에 들어가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딸애는 어머니가 더 이상 험한 꼴 보시지 않도록 경찰서에 동행한 ‘김’군에게 
무릎을 꿇고 일단 합의하여 어머님 만이라도 집으로 모시자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김’군은 ‘법대로 해라’며 딸애가 발목을 잡고 애원하느라
벗겨진 신발을 손에 든 채 경찰서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 이후 제가 계속 쓰러졌나봅니다.. 계속되는 마비증상이 있자 보다 못한 딸애는 
다시금 ‘김’군에게 전화하여 울며 어머니를 풀어달라 애원했지만 
‘김’군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습니다. 
자신도 저와같은 연세의 어머님이 계시면서도 ‘김’군은 전화를 끊은 직후 
경찰서 담당 형사에게 전화해 ‘지금 연기하는 거 아니냐? 
혹시 동정을 얻으려 쑈 하는 거 아니냐?’고 담당 형사에게 한말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이때 전화를 받은 담당 형사님도 
모친이 저혈압으로 돌아가셨기에 제가 쓰러진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전화를 한 ‘김’군에게 
당신도 어머님이 계신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다른 누구도 아닌 
장모님이 되셨을 분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고함을 치신 후 
전화를 끊으신 채 위급한 상황의 제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후 제가 저혈압과 마음에 상처로 인하여 계속하여 마비 증세와 
호흡곤란까지 겪게되자 딸애는 저를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병원에서 호흡곤란으로 산소 마스크를 쓴 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를 지켜봐야만 했던 딸애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살아있는 저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유서에 나와있듯이 이때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간이 한참 지나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던 제가 눈을 떴을때 
제눈에 왜 그리도 많은 눈물이 흐르고 있던지..
딸을보니 가슴이 너무 아프더군요.. 제 눈가에서 쏟아지던 눈물을 보며 
딸애는 ‘엄마 미안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 
잔인한 사람 만나 엄마 아프게 해서 미안해. 엄마 미안해’란 말만을 되풀이 하다 
끝내 ‘엄마 다시는 이런 일 안 겪게 해줄게’라는 마지막 말을 하길래 
정말 힘들겠지만 이젠 모두 잊고 다 정리한다는건 줄 알았습니다..
이말을 마지막으로 딸애는 화곡동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 하나 정리한 뒤 2005년 4월 16일
(제가 병원에 입원한지 4일 후이자 ‘김’군을 만난지 
딱 1년에서 하루 모자라던 날)에 제가 불면증으로 처방 받고 
복용하던 신경 안정제 90봉을 한꺼번에 복용한 뒤 눈도 
감지 못한 채 코에서 한말의 피를 쏟으며 죽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딸애가 죽었을 당시 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고‘김’군 외에는 
집 열쇠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가족들의 연락이 없는 가운데 
딸애는 홀로 방에 남겨지신 채로 일주일이 지난 2005년 4월 22일 밤에야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딸애의 집에 들어가 딸애를 발견한 것은 
저와‘김’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서까지 
갔다가 사라졌고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김’군은 
한번도 연락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꺼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희 유가족과 지인들이 계속하여 음성을 남기고 문자를 보내자 
그제야 마지못해 장례식 마지막 날인 새벽1시경에 ‘김’군이 찾아왔습니다. 
분노한 저희유가족들과 살아생전의 지인들이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에서도 
‘김’군은 딸의 영정 사진 앞에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딸과 저한테 죄송하단 말 한마디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해둔 것인지 
나중에 ‘김’군의 둘째 형이 찾아와 ‘김’군을 
데려 가려 했고, 저희 유가족외 지인들은 그래도 1년간 교제하며 
헤어진 지 한달도 채 안되 고인이 되신 분 앞인데 
마지막 가는 길은 봐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둘째 형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찰관을 대동하여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둘째 형이란 사람이 경찰관에게 유가족들과 
지인들 모두가 빤히 보는 앞에서 감금을 당했다며
‘김’군이 나오도록 얘기했고 ‘김’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양복을 챙긴 채 내딸의 영정사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신발을 손에 든 채 ‘김’군의 형과 함께 도망갔습니다. 
나중에야 전후 사정을 들은 경찰관계자 분들은 서둘러 
‘김’군에게 연락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고 지금까지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하나 남은 아들을 생각하면 
독하게 살아야하지만 딸을 가슴에 묻고 제가 살아가도 되는건가요.. 
어미의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한 채 두 눈 똑바로 뜨고 
코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시체가 되어있던 딸을 보낸 
이 어미의 심정을 어찌 이 몇 글자 글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장의 종이에 적힌 몇 마디 글로 어찌 딸의 슬픔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방에서 일주일이나 방치되어 뼈와 살이 썩어 들어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 
편히 눈감지 못한 딸애의 한을 어찌 이 한 장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찾아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미안하단 말 한마디 안하고 두 눈 똑바로 뜬 채 자신의 형이 오자 
부랴부랴 도망간 그 놈을 보며 저는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김’군에게 이 몇 마디 글로 복수하겠다거나 
사회생활을 못하게 하겠다는 복수심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단지,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각서의 내용
(학교와 회사를 그만둔다고 각서를 썼습니다)을, 
그 약속의 내용을 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지켜주길 바랄 뿐입니다.

이런사람이 대학교에서 공부하면 나쁜쪽으로 악용을 할것이요, 
직장에서도 본 모습을 철저히 가린 채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줄것이 뻔합니다..이게 제 딸의 마지막 바램입니다..

결혼에 대한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던 사람이기에 
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생전에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켜주겠다며 
자필로 쓴 그 약속을 지켜주길 바랄 뿐입니다. 

또한 딸을 아는 사람들 중 대체 그토록 해맑고 
다른 사람들에게 따스하던 내 딸이 90봉지에 들었던 수없이 많은 약을 
억지로 입에 구겨 넣은 채 눈조차 감지 못하고 
사랑하던 이 어미 곁을 떠 날 수 밖에 없었던 지에 대해, 
‘김’군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뒤로는 철저히 한 영혼을 짓밟은 모습에 대해 알아주길 바랄 뿐입니다. 
용서도 복수도 이해도 아닌, 그저 우리 시대에 
또 한 사람의 작은 영혼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씁니다.

화사하게 핀 봄의 꽃들조차 다 보지 못한 채 좁고 작은 단칸방에서 
옛 사진을 바라보며 눈조차 감지 못하고 제 곁을 떠난 
사랑하는 제딸 故서부희의 명복을 빕니다..

이곳은 제 딸의 싸이월드이니 꼭 한번 들러 주세요.
www.cyworld.com/tomato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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