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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당신은 절대 가지 않을 것처럼 온다
게시물ID : lovestory_961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126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5/03/20 17:28:4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feature=shared

 

 

 

 

1.jpg

 

 

하기정, 모로 누운 사람




너는 산처럼 모로 누워 내가 잠깐 동안 빌려간

당신의 어깨가 결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심장과 가까운 왼쪽을 바닥에 대고

그 겨울 찬 강물이 폐에 차오르는 걸 생각했다

당신은 오른쪽 어깨를 바닥에 대고

한번은 너무 아래까지 내려온 별의 모서리가 찌른다고도 했다


쏟아진 별과 비스듬히 흘려보낸 말들로부터

균형을 잡느라 비집고 들어온 마음자리가 떨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의 깊이를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감정은 손가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털어내기를 좋아해서

당신의 오른발로 나의 왼발을 지탱하는 습관이 버릇처럼 생겼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꼭 옛날 사람 같지만

꽃은 절대 지지 않을 것처럼 피고

당신은 절대 가지 않을 것처럼 온다


아주 오래전 방울 소리를 내며 문밖을 서성이며

당신의 절반을 다 내어줄 것처럼

끝내 돌아눕지 않을 사람처럼

 

 

 

 

 

 

2.jpg

 

 

정채원, 스틸




지금 막 입술을 빠져나온

동그라미 담배 연기처럼

뜨거운 목구멍 문양으로

쓰라린 목젖 문양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한 코 한 코 엮어

태피스트리를 짠 사람이 있다


호시탐탐 달아나는 바람의 코를 꿰어

벽에 걸어놓고야 말겠다고


핏빛 노을 번져드는 사막에

웅크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던 사람

그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셀 수 없는 정지화면이

모여 한 생애가 되고


한 번 멈춰두고 영원히 잊어버린

영화의 한 컷처럼 나는

지직거린다


한 코만 놓치면

주르륵 풀어져버리는

마음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3.jpg

 

 

현택훈, 유자일기




찻잔에 가라앉은 밤

음악을 부으면 푸른 시간 사이로

빨래집게가 보인다


찻잔은 음악을 믿고

음악은 빨래집게를 믿고

빨래집게는 나를 믿는다

나는 그 빨래집게에 걸린 것들을 사랑했다


유자나무가 손을 뻗어 구름을 만진다

유자나무는 구름을 믿고

그치지 않는 밤의 파장은

용담서점이 있는 동네였다


서점은 20세기처럼 문을 닫았고

쓴다는 건 흩뿌린 음악이었고

파정한 글자를 채운 노트는 두꺼웠다


얼마 남지 않은 잉크는

12월 종려나무처럼 쓸쓸해서

노트 마지막 장엔 시 한 편 옮겨 적었다

필사의 밤이 있어서 오늘 밤에도

달콤한 눈송이를 입에 문 새들이 있다


격정은 짧고, 음악은 멈추지 않고

밤은 찻잔에 가라앉아 있고,

나는 유자차를 마신다


나는 유자차를 믿고, 유자차는 찻잔을 믿고

찻잔은 밤을 믿는다

 

 

 

 

 

 

4.jpg

 

 

김네잎, 근린




꽃의 정수리를 찾아 조리개를 기울인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발등에 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걸 모른다

창밖으로 흘러가 구름이 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나는 겨우 입술을 열어 천천히 그늘이 된다

그늘진다는 건 혼자라는 사실까지 지우는 것

긴긴 목을 내밀고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거부할 줄 안다는 것

목덜미에 번지는 화인을 장미처럼 가시로 만들 줄 안다는 것

우리는 언제 처음 화분을 갖게 되었을까

우리의 흙, 우리의 뿌리, 우리의 줄기, 우리의 낮잠

당신은 남고 내가 사라졌다는 걸 이웃들은 아직도 모른다

불규칙적으로 불은 꺼지고 켜진다

규칙적으로 문은 닫히고 열린다

한 사람이 시들고 한 사람이 부활한다

이웃들은 어떻게 한 번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견디는 걸까

 

 

 

 

 

 

5.jpg


 

문정희, 나는 내 앞에 앉았다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 왔다

어제 떠난 것처럼

너는 내 앞에 앉았다


스무 번의 봄날을 지나

아니, 나는 내 앞에 앉았다

너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니

늘 함께 숨쉬었으니

나에게서 걸어 나와

다시 내 앞에 앉은 것이다


잃어버린 게 뭔 줄 알아?

너는 웃었다

무엇일까

그냥 살아있으면 돼

살과 피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쫓기며 나는 늘 나에게 속삭였다


네가 변하기 전에

내가 변하면 어쩌지


지금 네가 내 앞에 앉아 있다

나 너를 보낸 적도 없고

너 나를 잊은 적도 없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무엇일까

이 안개

비애라고 할까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나는 내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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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1 09:31:14추천 0
아무 것도 변한것이 없는데 무엇일까.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나는 내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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