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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속초
자고 나면 초승달이 떠 있었네
며칠이고 웅크렸다가 깨어나도
초승달은 공중에 박혀 먼 바다를 꿰매고 있었네
눈 감아도 하염없고 눈을 떠도 마음 둘 곳 없었네
해무로 뒤덮인 물렁물렁한 고립이었네
속초에서 하루를 보내고 또 몇 달을 기다렸네
하루에도 10년이 흘러갔네
밥을 짓고 물 말아 먹었네
밥상 너머 당신이 걸려 있었네
심장을 꿰매는 소리가 서걱서걱했네
나를 부르는 단호한 소리였네
문을 여니 속초가 당신의 천 리였네
정혜영, 공기
안간힘을 다해 서 있다
발음하지 못하는 기호들이 뒤죽박죽
아침은 소문을 피워올리는 공장이다
내면이 있다면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을까
거긴 아마, 다른 세계
너도 없고
자음과 모음의 배치를 바꿔본다
수도원 담장 안에서
장미빵 위에
십자가를 그려 넣는다
어둔 밤이
격음으로 자리잡고 있다
같은 장소 다른 시간으로 배치된
사람들이
같이 부르는 노래
세탁기
유리문 안에서
팔다리가 뒤섞이고 있다
기도를 모음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나를 읽으며 무저갱에 닿는다
내가 되기 위하여
낭떠러지가 얼어붙는다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넘어진다
구름이 흩어지는 표정은 어떤 음계로 읽어야 하나
발목 잘린 새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유리창에 비친 일몰
창 밖으로 소문이 지나간다
새벽 안개가 횃불을 들고 서 있다
이혜미, 겨울 가지처럼
안으로 고여 들어
기어이 흘렀다
그때 나는 온통 멍으로 뒤덮인 몸
두려움에 독주머니를 가득 부풀린
괴이하고 작은 짐승
가지꽃이 많이 피면 가문다더니
손가락으로 열매를 가리키면
수치심에 겨워 낙과한다니
몸속에 위독한 가지들을 매달고
주렁주렁 걷는 사람에게
고결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숨기려 해도 넘쳐 고이는
시퍼런 한때가 있어서
찢어진 가지마다 심장이 따라붙어
우리는 모서리를 길들이기로 했다
한 바구니 두 바구니 수북이 따서 모은
열매들의 참담을 생각하면
부푸는 속내와 어두운 낯빛 사이에
물혹 같은 곤란함이 도사리는데
겨울 가지는 삶아놓으면 더 푸르러지고
푸르다는 건 안으로 멍이 깊은 병증이라
피부 밑으로 서서히 들이치는 겨울
가지의 색
박미란, 흰 것에는 비명이 있다
목련이 핀다
살아야 한다고, 잘 살아야 한다고
누구 하나 돌보지 않아도 맹렬히 허공을 물어뜯던 저 꽃
듬성듬성 털이 빠진 채
터져 나오는 비명을 제 손으로 틀어막던 때도
끝이 났다
우우우
희망을 버리면 얼마나 찬란히 몸져누울 수 있는지 당신은 알지
날마다 꿈꾸던 그 날이 오늘이라는 것도 예전부터 알고 있지
그러나 말해주지 않았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전부를 바쳐야 한다는 걸
한 마리의 희고 얼룩덜룩한 짐승이
몸뚱이를 지우고 눈빛을 지우며 아득히 자신을 떠나가는 중이다
송재학, 그랑제떼
발레복은 희고 가볍지만
토슈즈를 벗어던지고픈
맨발의 얼룩과 같은 마음이던
은빛 종소리는
검은 잉크를 가득 품고
발레리나가 도약할 때
허공에서 순간 더 높이 치솟아
몸의 선을 고스란히 옮긴
층층 꽃봉오리와 닮은 소리를 열었다
몸의 자국을 세공한
금은의 잎들도 따라왔기에
빈 무대 구석에서
등뼈를 구부리지 못한 그림자마저 아름다움과 섞이면서
두려운 숨소리까지 합쳐서 한 송이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