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사사건건 여론조사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라는 것은 직접민주주의가 이상적이기는 하나 효율성이 떨어지므로, 그 효율성을 위해서 고안된 제도입니다. 다시 말해 대의민주주의는 효율성을 위해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일정 부분 포기한 제도입니다. 따라서 이상적인 민주주의 운영을 위해서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민투표 등 직접적인 의사를 묻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론조사로 의사결정을 하자는 걸 가지고 헌법파괴니 대의(의회)민주주의 파괴니 하는 놈들은 민주주의가 원래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2. 전 여론조사 제안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냈습니다. 하나는 전술적으로 이번 국지전 승리(토이 자진사퇴)를 위한 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략적으로 문재인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3. 전술적으로 이건 "뻥카"예요. 뉴스에서 헤드라인을 자극적으로 뽑아서 그렇지, 이번 메시지는 "여론도 안 좋은데 자진사퇴해라"입니다. 여당도 이미 여론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데도 강행하려는 이유는, 절박하기도 하지만, 여론이 반전될 기회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회의도 열기로 했고, 야당이 불참하고, 반쪽총리에 태클걸 때마다 "발목잡기"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역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공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게 여론조사 제안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심지어 여론조사까지 제안했는데, 니들이 싫다고 했잖아. 표결 불참을 당연한 거야"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죠. 이렇게 역공 여지를 줄여놓고, 자진사퇴로 유도하려는 게 최종 목적입니다.
4. 여론조사가, 아무리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절차이기는 하죠. 그런데 이건 오피니언리더에게나 통할 얘기고, 대중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중은 정치인이 여론조사에 따라 의사결정하는 거, 좋아합니다. 이상하긴 해도 이게 현실입니다. 이 바닥에서 많은 분석이 "중도" 프레임으로 흐르는데, 저는 문재인이 "대중" 프레임으로 밀고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다소 이상한 행위여도,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참배건도 마찬가지예요. 소위 논객이라는 인간들이 원칙이니 어쩌니 떠들어도, 대중이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죠.
5. 저는 이 변화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증세 없는 복지가 아무리 개소리라고 떠들어봤자, 대중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인데, 언제까지 우리는 바른 말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저렇게 새빨간 거짓말은 하면 안 되지만,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이길 가능성을 높여가야죠. all or nothing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떻게 이기는지는 두 번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겨야 돼요. 우리편이 저쪽편보다 조금이라도 더 정당한 세력이라면, 그 정당성을 다소 해치더라도 이겨야죠. 지금 와서 DJ가 종필이랑 손잡은 후에 배신 때린 거 비난하는 사람 있나요? 노무현이 재벌가 아들이랑 손잡았던 거 비난하는 사람이 있나요?
6. 전략적으로 얘기하다 보니 얘기가 좀 커졌는데, 사실 참배건도 그렇고 여론조사 제안도 그렇고 그렇게 정당성을 해친 행위도 별로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