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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침반처럼 언제나 너를 향하는 것이다
게시물ID : lovestory_962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90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5/03/26 20:49:1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feature=shared

 

 

 

 

1.jpg

 

 

이현호,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




나침반처럼 언제나 너를 향하는 것이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너와 내가 있고

자침이 뱅뱅 도는 그곳에는

만질 수 없이 흐릿한 유령만이 있는 것이다


두 갈래 물줄기가 있는 것이다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온 수염고래의 그것 같은

분수처럼 흩어지며 가끔 무지개를 그리기도 했던

마음과 기억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심해에서 망각의 바다에서

해변으로 떠밀려오는 사체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잃고 표류하는 튜브를

먼바다의 어부는 건져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그것은 죽은 별을 바라보는 일과는 다른 슬픔이다

어제는 게릴라성 집중호우 아래서

오늘 죽은 신을 만나 젖은 담배를 나눠 피운 것이다


맑게 갠 하늘 아래서는 아이들이 개미를 태우며 노는 것이다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붙이는 볼록렌즈처럼

너를 거쳐간 시간들이 나의 거의 모든 순간에 모여

세상을 불태우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은 남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보호된다

누구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그 그림은

다른 그림보다 오래 살아남아 명화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작은 무인도였을 때

너는 닿을 수 없이 머나먼 바다

그 바다에 살던 한 마리 물고기가 길을 잃고

우연히 나의 해안에 닿았었던 것이다

 

 

 

 

 

 

2.jpg

 

 

박미란, 동백




동백은 집중하며 떨어진다

무엇이든 내리막이 중요하니까

물의 온도, 바람의 온도, 저 달의 온도

언젠가 두고 갈 것들이다

꽃보다 내가 먼저 시들테지

뿌리가 얼기 전에, 하루가 절박하기 전에 숨을 불어넣자

어디로 가고 있나

한 쌍의 남녀가 긴 망설임 끝에 헤어졌다

피부색은 각자 다른데 이별하는 방식은 모두 같아

온도를 재는 일과 그것을 지키는 일이

부디 꽃 밖에서도 이루어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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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배, 물결 속에서


물결 지우개를 쥐고 있다 시를 쓰며

지우면 그 자리에 물랑이 생긴다

어느날은 손목에서 단어가 떨어지지 않는다

지우개로 지우자 손목에 물랑이 생긴다

어느날은 두다리에 문장이 붙어 있다

지우고 너를 만난다

사라진 긴 문장만큼 걷는다

물랑물랑물랑물랑

네가 사라질 것 같은 날들이 걸어가고

사랑이 그만큼 걸어오는 물결이 있다

어느날은 시 한편을 지운다

물랑물랑 온 몸이

물결 속에서

 

 

 

 

 

 

4.jpg

 

 

정진혁, 너도바람꽃




산기슭에서 만났다

오후가 느리게 떨어지는 동안

저녁이 모이고 모였다

너도바람꽃 불러 보다가

고 이쁜 이름을 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뿌리째 너를 떠냈다

산길을 내려오다 생각하니

네가 있던 자리에

뭔가 두고 왔다


너도바람꽃은

아직 바람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어둠 속에 저 혼자 꽂혀 있을 손길을 생각했다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히 꽂아 두고 온 것들


빗소리가 비스듬히 내리는 밤이었다

 

 

 

 

 

 

5.jpg

 

 

이생진, 실수




실수란 손[手]을 잃[失]는다는 말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손을 잃었다

수전증

손이 흔들려 손 노릇을 못한다

커피 잔을 들면 그 손이 흔들려 커피가 넘어지고

밥을 뜨면 손이 흔들려 밥이 넘어진다

아이들이야 덜 자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다 자라서 그러니 철은 들어 있다

이것을 내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다

하지만 너무 살아서 그러니

그것도 고맙게 여기자

이렇게 말하고 커피 잔을 일으켜 세운다

커피 잔이 어른처럼 점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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