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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초록의 폭력
아무데서나 펼쳐지는 초록을 지날 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지
초록은 왜 허락없이 돋아나는가
귀가 없으므로
초록은 명령한다
초록은 힘이 세다
초록에 동의한 적 없습니다
초록을 거절합니다
초록이 싫습니다
합의 하의 초록이 아닙니다
“문란하구나”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초록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나를 떠메고 가는 바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오후
웃음을 열었다가 닫는다
툭, 불거지는 질문처럼
아, 내가 지나치게 피를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이영광, 반성문
시 열심히 쓰는 이들은 많고
나는 요즘 쓰지도 못하니
뭐라도 해야 한다면
반성문을 잘 쓰고 싶다
어렸을 땐 한 번도 반성하는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나이 들어선 아예
쓰지 않았다
두 눈을 똑똑히 감고
내가 뭘 잘했는지
잘 못 했는지 아니
무엇을 했는지 금세
잊어 버렸다
사는 게 어려서 쓰던 반성문을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서
꺼내 읽는 일 같을 때
고쳐 쓰고 고쳐 쓰는 일 같을 때
하얗게 정신 차리고
잘한 일 잘못한 일을 잘
말해 보고 싶다
내가 지금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건지나
한번 잘 써 보고 싶다
김영남, 수선화
절 아래 호수는 3월에 가 볼 일
요정 같은 소녀도 그 물가에서 떠 올려 볼 일
물의 아슬함, 아슬함의 표정이랄까
계곡 메아리의 청순함이랄까
잠시, 어느 왕자가 살다갔나를 생각해 본다
물을 응시하고 있는 왕자는
눈도 목소리도 날개도 왕자이겠지
왕자는 누가 더럽힐 수 없는 영혼이라
스스로의 생각 속에 들어가야 하겠지
어룽지고 있는 곳
왕자이기를 중단하지 않은 모습이여
산길 들길 떠도는 신세로
이렇게 하얗게 밤 지새운 얼굴이라면
그대는 날
어떤 향기로 기억하려나
어느 물가로 여겨주려나
심재휘, 우도
객선의 잦은 접안이 짧았고 이별은 가벼웠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섬사람의 귀가와
바다를 등지고 구부정한 집들이 모여
칼이 빠져나간 자리인 듯 골목이 깊었다
그러니까 심장을 깊게 찌를 칼을 뽑으며
누군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날이 있었다
배를 타고 섬을 떠나며 바다에 칼을 버린 날이 있었다
가을볕에 말라가는 백일홍부터
나무가 나무에게 건네는 흔들림까지도 모두 골목인 섬
아무나 마을 가운데로 쉽게 들어갈 수가 없고
찔린 마음이 쉽게 흘러나올 수도 없는 섬
한나절 머물렀던 우도를 떠나며
아물지 않는 골목들에게 미안했다 사람들은
제 심장 한 편에 우도가 자라고 있는 줄 몰랐다
박시하, 저지대
비 오기 전에는
낮은 바람이 불어왔다
생을 가로지르며
슬픔을 무찌르는 로맨스를
믿은 적도 있다
어떤 감정도
목숨보다 절실하지는 않은데
사랑
던져야 할 것들이 많아서
높고 아름다운 것
빛에 눈이 멀기 전에
습기에
이끌려 내려왔다
낮은 지대에서
사랑
하는 것이 더 좋았다
끈끈하고 더러웠기에
던져버릴 수 있는 것도 더는 없었기에
알몸으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고통의 옷을
입으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