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작품인지 맞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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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병원에서 타온 먼지처럼 쌓여있는 약들은 갯수만큼 내 마음에 박혀 못이 되었다. 어느 새 밥의 양보다 많아진 약들을 보며 나는 눈물 섞인 한숨을 쉬었다. 거실 tv옆에 세워진 사진에는 젊고 싱싱했던 시절의 엄마와 어린 내가 있었다. 엄마는 이 아파트에 처음 왔을 때, 새댁이 예쁘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싹싹하니, 신랑은 복도 많지. 엄마가 예뻐서 좋겠구나. 등등 인사치레가 아닌 말들을 들으면 자신을 향한 칭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칭찬을 들은 마냥 좋아했다.
'그랬던 엄마가.....'
엄마는 아빠가 도망간 6년 이래로 하루하루 기억을 지우고 사는 것 같이 행동했다. 아빠라고도 부르기 싫은 그 사람은, 나와 엄마의 가슴에 칼을 꽂고 갔다. 나에게는 과도, 엄마에게는 식칼을. 나는 서서히 그 칼이 빠지는 중이지만 엄마에게는 아직 꽂혀있는 모양이다. 밥을 먹을 때도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넘어가질 않는다고 호소하고, 잠을 잘 때도 가끔 '벌떡!' 하고 일어나 달빛을 받으며 눈물을 질질 쏟았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옆에 놀라서 일어난 나를 꼭 껴안으며, "경화야......경화야......" 이러면서 끊임없이 눈물 냄새나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엄마가 그럴 때 내는 목소리는 짐승이 그로울링(growling)하는 것 처럼, 오싹하고 서글펐다. 난 아직도 어떻게 반응해야 될 지 모른다. 그저 이 그로울링이 빨리 진정되길 바랄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난 한번도 아빠가 엄마와 나를 버리고 간 후, 운 적이 없었다. 내 눈물을 엄마가 다 흡수해서 우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스펀지 처럼.
"왔니?"
내 상념의 주인공인 엄마가 안방 문을 슬쩍 열고 나왔다. 왔니? 라는 목소리는 엄마처럼 병들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약 먹었어?"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백팩을 식탁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엄마 쪽은 보지 않은 채. 다음 부터 약봉투를 헤집어 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래. 밥 먹었어? 밖에 날씨 추워?."
"그렇게 궁금하면 좀 나가보고 그래. 바깥 공기 안 쐬본지 벌써 몇 달 째야."
나는 찬장 문을 열어 라면 봉지를 꺼냈다. 물론 엄마 얼굴은 보지 않은 채로. 아직은 보고싶지 않았다. 금속 마찰음 소리를 내면서 처박혀 있는 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미안..하다."
엄마는 그 사람이 도망가기전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적이 별로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닌 일에 꾸중하거나 혼낸 후에도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맛있는 걸 해준다던지, 외출한 후 들어올 때 선물을 들고오면 그걸로 우리는 암묵적인 화해를 했다. 난 그런 처사에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 따라 생각이 많이 나는, 그 사람이 식칼을 꽂고 난 뒤, 엄마는 나에게 부쩍 미안해 했다. 방금 처럼.
"됐어. 가서 쉬어."
난 그 이외의 말은 할 수 없었다. 난 엄마의 사과가 싫었다. 뻔뻔해도 좋고 뭘 사와지 않아도 좋으니 평생 사과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내 말을 이후로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난 고개가 꺽였다. 물이 끓고 있었다.
***
그렇게 내면의 전쟁이 끝난 뒤, 나는 질척거리는 기분들을 라면스프처럼 뜨거운 목욕물에 풀어넣었다. 그것들은 하얀 김으로 승화되었다. 구제라도 받았나 보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부러워졌다. 고개를 돌려 갈색 문을 바라보았다. 저 얇은 나무 뒤에는 엄마가 앉아있다. 다시 눈을 돌려 욕조를 바라봤다. 물때가 진득하게 박혀있었다. 낡고 오래된 빌라에서는 물때 특유의 냄새가 났다. 엄마는 그 냄새를 싫어해서 페브리즈를 달고 살았다. 그렇지만 그 냄새는 낙인처럼 따라다녔다. 비가오면 더 심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코가 막힌 것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내 생각에 엄마는 얼굴의 물때를 맡는 모양이다. 나는 물때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 때, 안방에서 휴대폰의 진동음이 들렸다. 징징징---그 소리는 나를 다시 욕조에 담겨진 '나'로 되돌려주었다. 엄마와 나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해서 진동으로 해놓은 적이 많았다.
"경화야. 전화왔다."
욕실 시계를 힐긋 보니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늦게 전화 온 적은 요 근래들어 처음이다. 누군지 호기심이 생겼다.
"누군데?"
목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보자...이..진수. 핸드폰 글씨 크기 좀 바꿔. 눈이 아파서 잘 보이지두 않네."
진수? 진수가 이 시간에 왜? 나는 적잖아 당황했다. 그와 친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기에 사적으로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작년 8월 달, 예상치 못한 비 때문에 빌린 우산을 가져다 주려고 [어디야?] 라고 전화 온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싱겁게 그는 우산을 돌려주며 고맙다, 라고 말한 것이 끝이었다. 그 깔끔함은 나를 조금 섭섭하게 했다.
"좀 있다가 전화해준다고 해줘."
엄마가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목욕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가슴께 까지 받아놓은 물들이 아깝지 않았다. 배수구는 큰 소리를 내며 물을 들이키는 동안, 비누칠을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씻는 시간이 길었다. 몸에 물을 담그는 자체가 좋아서 남들이 비누칠 다하고 헹굴 차례에 여전히 물을 쬐고 있어, 엄마는 나에게 욕실에서 살림을 차리냐고 늘 한 소리를 했다. 오늘은 그 소리를 안 들을 것 같다.
벌컥- 나는 다소 급한 동작으로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보다 엄마 옆에 있는 내 휴대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통화목록을 봤다. 이진수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있었다. 곧바로 통화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무언가가 망설여졌다. 이상하게 머쓱하고 부끄러웠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했을까? 별 거 아니겠지? 뭐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하는 건가? 그치만 도움 줄 사람은 나말고도 많을텐데... 질문이 꼬리를 물고 물어 뱀이 되었다. 더이상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통화 버튼이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따르르--- 긴 기계음이 들렸다. 차라리 안 받았으면.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목소리가 듣기 싫은 것도 아니고, 그를 싫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응. 여보세요.]
받았다! 진수의 목소리다! 나는 순간 놀랬다. 그의 목소리는 예전에 들었던 것과 같았다. 뭐라고 대답하지. 얼른 대답을 해야하는데, 아까 그 뱀이 머리를 다시 휘젓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막 대답하려고 입을 뗄 때, 그가 먼저 말을 했다.
[경화야, 너 엠티 갈 꺼지?]
아, 저 말이 목적이었나. 나는 역시나 그의 깔끔함에 조금 다쳤다. 하지만 기대할 것이 없긴 했다. 그와 나 사이는 정확히 동기 였으니.
진수는 학생회의 총무이다. 선배들이 부회장으로 강력 추천했지만, 거절하고 또 거절해서 지켜낸 마지노선이 지금의 저 자리이다. 선배들, 굳이 말하자면 여자 선배들은 진수를 참 좋아했다. 그가 하는 행동에는 따뜻함이 묻어나 있었다. 나이 꽤나 먹었다는 여 선배들은 볕에 누운 고양이 마냥 진수의 팔에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