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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토요일 한산도 대첩을 꼭 봅시다!!
게시물ID : humorstory_963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4353214252
추천 : 4
조회수 : 61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5/05/10 20:21:06
반드시 이번주 토요일 9시 30분에는 세계4대대첩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을 보도록 합시다.
여러 나라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계 4대 해전(世界四大海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 제독의 승리는 가장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07년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露西亞 極東艦隊)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의 도오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은 주위에서 그를 이순신 제독과 같은 위인이라고 칭송하자 이에 “나의 공로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따라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구한 세계적인 위인으로 존경 받고 있으며, 그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거북선(龜船)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War Memorial Museum), 영국 해사박물관(Maritime Museum),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歷史紀念館)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산대해전,명랑해전과 이순신

학익진을 편 한산대해전



1592년 음력 7월 6일, 여수를 떠나 노량으로 빠져 거제도를 향하는 물길에는 조선 수군의 깃발을 나부끼는 대소 55척의 전선이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지휘 아래 출전의 파도를 가르고 있었다. 그 편진에는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이끄는 전선들이 합세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군에 쫓겨 밀려난 경상 우수사 원균은 파손된 일곱척으로 노량에서 정박해 있다가 이번 출전에 뒤따랐다. 그야말로 조선의 남도 연합수군이다.

그 군세 속에는 고금의 해전사를 통해 독특한 전투력으로 이름난 거북선이 참가하고 있었다.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대형전선인 판옥선에 상개판을 덮어씌우고 쇠송곳을 꽂아 적병이 덤벼들거나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전선이었다. 선체가 단단하여 충돌파괴력이 강하며 근접 화력이 우세한 동시에 적병의 승선습격을 막을 수 있어 공격과 방어 두 가지 면에서 뛰어난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출전에 앞서 이미 이순신은 5월 초순과 6월 초순 두 차례에 걸쳐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해 왜군을 공격해서 큰 전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 전투란 1차 출동시의 「옥포 해전」,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이요, 2차 출동시의 「당포 해전」이다.

이순신이 통영 앞 거제 수역을 향해 전선을 재촉하고 있을 때, 왜군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왜장 와끼사까가 거느리는 수군은 대형 전선 36척을 주력으로 총 73척이 거제도 견내량으로 진출하여 다음 작전에 임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의 전투에서 계속적으로 패배하게 되자 새로이 군세를 보충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일거에 전세를 뒤엎을 욕심으로 칼날을 세우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7월 8일.

이미 왜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던 이순신은 이른 아침에 닻을 올려 당포를 떠나 견내량으로 향하였다. 그 곳을 들여다 본 이순신은 왜군에게 공격을 퍼붓지 않고 슬그머니 되돌아섰다. 그는 전선 대여섯척으로 실속없는 건성공격을 가하도록 행동케 하는 한편, 주력 전선들은 싸움을 피하려는 양 기동하면서 한산도가 있는 바깥 바다 쪽으로 슬슬 항진했다.

“물길을 살펴 볼 때,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으며 수로가 좁기 때문에 우리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더욱이 그 동안의 왜적들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전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기어올라가 무고한 우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 뻔하지 않은가….” 라고 상황을 판단하여 좁은 박지내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의 행동을 본 와끼사까는 벼락같은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고 있느냐! 총공격의 신호를 울려라. 빨리 닻을 감아올려 조선 수군을 뒤쫓으라.”

왜군 73척은 앞을 다투면서 조선 수군을 추격해 나섰다. 그들은 대항하는 척 하다가는 뒷걸 음질 치며 물러서는 조선 수군의 전선들을 쫓아 어느 새 한산도와 미륵도가 마주보는 넓은 해역까지 뛰쳐 나갔다. 이순신의 유인작전이 마음 먹은대로 성공한 것이다.

주변 상황과 상대적인 위치를 읽은 이순신은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일제히 공격 돌진할 것을 명령했다. 그 때 남도 연합수군의 전선들이 펼친 진형이 「학익진」, 즉 학이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이었다. 그것은 포위 섬멸을 노려서 형성하는 진형이다.

해상에서 함선이 진형을 이뤄 기동항진하는 일은 퍽 어렵다. 열을 지어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부대가 이동하고 전투를 나누는 행동은 평소에 거듭된 훈련을 쌓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특히 비스듬한 사선을 이루는 학익진 같은 진형을 갖추려면 고도의 기동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뛰어난 지휘관의 능력이 바로 이런 점에서 찾아진다.

뱃머리를 돌린 조선 수군의 전선들은 학익진의 진형을 짜면서 왜군을 향해 전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양현 전타이다. 서로 마주 쳐다보며 접근하는 속도는 무척 빠르다. 공격 개시를 알리는 포성이 울리자 전선마다 함성이 솟는다.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화염을 뿜기 시작한다. 이따금 천자총통의 발사 폭음이 크게 퍼진다.

조선 수군의 전열을 뛰쳐나가 적진 속으로 뛰어들며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는 공격대가 있었으니 용맹무쌍한 거북선이었다. 그들은 돌격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좌돌격장에는 이기남이, 그리고 우돌격장으로는 박이량이 각각 활약하고 있었다.

학익진으로 왜군을 서서히 포위하면서 이순신 예하의 전선들은 적진의 선봉장 전선에 대하여 포화를 집중했다. 동시에 선봉장에 가까이 있는 적선들에 대하여도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다. 얼마 안가서 불꽃을 피우며 아우성을 치는 왜선들이 전열을 허물어 뜨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향해 빗발같은 화살이 날았다.

포연이 해면을 따라 낮게 깔리고 울리는 포성은 물결을 타고 가까운 섬산언덕으로 멀어져 갔다. 햇살이 따갑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열기 가득찬 공기를 가르며 튕기듯 화살이 날았다. 한산도 앞바다는 130여척을 헤아리는 전선들이 뒤엉켜 치고받는 난투장으로 화했다.

그 당시, 육전에서 왜병이 우세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신병기라고 일컫는 조총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활로써는 그 신병기를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군의 경우는 달랐다. 천·지·현·황 총통의 성능은 보다 위력적이었다. 전선의 구조와 재질에 있어서도 조선 수군의 것이 견고했다. 그렇지만 왜군에 비해 조선군이 해상 전투에서 우세했던 근본적인 강점은 전투기량에 있었다. 바로 그것은 이순신과 같은 뛰어난 장수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옛날의 해상 전투는 사령선 대장선이나 선봉장선이 집중공격을 이겨내지 못해 불타고 깨어지면 그것으로 전세는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군졸은 일시에 기세를 잃게 되고 진형은 무너지며 패색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전투를 이끄는 장수의 싸움이 초전에 이기게 되면 사기는 충천하고 투지가 솟으며 더더욱 용맹해지는 법이다.

사력을 다하는 대결이었다. 중위장 권준, 중부장 어영담, 우부장 김완, 후부장 배흥립, 전부장 이순신(방답 첨사), 좌별도장 윤사공, 좌부장 신호, 좌척후장 정운, 우척후장 김인영, 유군장 황정록, 우별도장 송응민……. 그리고 거북선의 이기남과 박이량, 용맹을 다투는 여러 장수들이 분전하고 또 역투했다.

시간이 흘렀다. 폭염속에 제정신을 잃고 날뛴 싸움이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해는 서쪽으로 멀리 보이는 섬나무 위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친 시장기와 타는듯한 갈증을 한 모금 바가지 물로 달래며 이순신의 용사들은 도망치는 적선들을 쫓아 화포를 쏘고 활을 당겼다.

부서진 뱃조각이 파도에 밀리고 있다. 서쪽으로 기운 태양의 뿌리는 낙조의 빛이 여기 저기 피로 얼룩진 물결 위에 진하게 퍼진다. 대낮의 소란을 거두면서 한산 앞바다에 고요가 다시 돌아오는가 보다. 나팔 소리가 길게 들린다. 그것은 싸움이 끝났다는 것과 전승을 알리는 신호이다. 숨가쁜 고비와 절박한 순간들을 이기고 이제는 지치고 느린 동작으로 진형을 찾아 남도 연합 수군의 전선들이 움직이고 있다. 승리를 외치는 함성이 전선마다 가득찼다. 한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싸움은 이렇게 끝났다.

그 싸움에서 남도 연합 수군은 왜적의 대형 전선 25척과 중형 전선 17척, 그리고 소형전선 5척 등 모두 47척을 깨뜨리거나 불태워 버렸다. 사로잡은 것은 대소전선 12척이었다. 전열을 이탈해 용하게도 살아 도망친 전선은 대형 1척과 중형 7척, 그리고 소형 6척 등14척에 불과했다. 왜장 와끼사까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도망 쳤다고 한다.

그 이튿날, 이순신 좌수사는 전날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왜적을 찾아 안골포(의창군 웅천면)로 나아갔다. 그 곳에는 왜적의 수군장 구끼와 가토오가 이끄는 40여척의 세력이 부산으로부터 옮겨와 정박하고 있었다. 일방적인 공격이 감행되었다. 조선의 남도 연합 수군은 그곳 포구에 깊숙히 박힌 채로 항전하는 왜군을 철저하게 분쇄하였다. 두 차례의 큰 전투를 통해 조선 수군이 입은 희생은 전사 19명과 전상 114명이었다.

이순신 좌수사가 지휘하여 남도 연합 수군이 치른 한산 앞바다의 해전과 안골포 전투의 승리를 묶어서 「한산대첩」이라고 한다. 지금, 매년 8월 14일이면 한산 대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첩 제례를 올린다. 1592년 음력 7월 8일은 양력 8월 14일에 해당된다. 이 날, 통영 앞 바다 한산도에서는 해군 장병과 사관생도가 참례하여 400년 전의 국난과 전승을 상기하는 뜻 있는 행사를 갖는다.

한산 대해전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전국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한산대첩에 뒤이어 큰 전과를 거두는 부산포 해전이 있었지만, 그 때부터 반도의 남녘 바다에서 날뛰던 왜적의 수군은 자태를 감추고 말았다. 북진해 간 왜군을 위한 지원활동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라 수역으로 진출함으로써 수륙병공을 성사시키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명량해전-울돌목의 상유 십이척


명량은 전라남도 해남의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를 뚫고 나가는 아주 좁은 물목이다. 순수한 그 곳 말로는 「울돌목」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진도와 내륙을 잇는 진도대교가 보기 좋게 놓여져 편리한 교통을 열어주고 있다.

물목은 좁은 수로를 이루며 맞쳐다보는 대안까지의 거리가 고작 300m에도 이르지 못한다. 물을 건너 보는 거리는 실제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그 곳의 깊이는 겨우 20여m 정도. 울돌목을 흐르는 물은 아주 빠른 유속을 갖는다. 기록에 의하면 최대 유속은 11.5노트까지 이른다고 했다. 그 정도의 유속이라면 연안을 오가는 어지간한 어선의 속력과 맞먹는 속도이다.

울돌목을 지나는 수로는 우리 나라 남해와 서해를 잇는 단축 항로의 관문이 되고 있다. 흔히 진도 수도라고 불려진다. 그 수로를 통과해서 항해하지 않으면 거차군도 등이 있는 다도해 바깥으로 멀리 우회해서 항해해야 하기 때문에 조류가 세다고 하더라도 물 때에 맞추어 조류를 타는 뱃길을 잡는 것이다.

바로 이 곳에서 세계 해전사상 신화를 남긴 명량 해전이 벌어졌다. 그 때,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울돌목의 결전을 대승으로 이끈 영웅은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다.

정유년의 가을 짙어가는 1597년 음력 9월 중순,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한기가 몰려 온다.

“오늘 밤에는 왜적의 야습이 예상되니 여러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철저히 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생기면 군법에 따라 처리하리라.”

진도 벽파진-. 몇 명 안되는 지휘관들을 앞에 두고 이순신 삼도 수군 통제사의 표정이 엄하다. 삼도 수군이라고 하지만 총세는 전선 12척을 가졌을 뿐이다.

지난 초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삼도 수군이 보유한 전선은 수백척에 이르렀는데, 이순신이 관직을 박탈당하고 함차에 실리어 떠난 후에 삼도 수군 통제사의 자리를 차지했던 원균이 왜군에게 시달리면서 군세를 잃어가더니 드디어 7월에 벌어졌던 「칠천량해전」시에는 전멸을 당하는 비참한 결과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대소 전선은 파괴· 소실되었으며 용감하던 수군 장졸들도 모두 잃어버렸다. 지금 이곳 벽파진 포구에 매어있는 12척은 칠천량 격전의 와중에 용케도 도망쳐 나온 경상 우수사 배설이 거느리던 전선들이었다.

지난날, 한산대첩에 이어 부산포해전, 웅포해전 등으로 왜적을 연이어 무찌른 이순신은 조선 바다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여수 본영을 한산도로 옮긴 이후로는 더욱 막강한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직함도 남 삼도 수군 통제사로 승격되었다.

그때 이후로 지루하고 답답한 화의교섭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교착 정전의 상태에 이어 전란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침 준비를 위해 화의 교섭을 교활하게 이용한 왜적은 1597년 초에 1만 4천의 선봉군을 앞세워 총 14만 1천 5백이 다시 쳐들어왔던 것이다. 그즈음 왜군의 간계와 파당의 모함에 몰린 이순신은 직위를 빼앗기고 서울로 끌려가 투옥되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조정을 속여 임금을 업신여기고,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것이 그에 대한 죄목이었다.

그러나 재침입한 왜군의 진격으로 온 나라가 다시 한번 위난의 수렁으로 빠졌을 때, 이순신의 사형을 감해 주어 나 라를 위해 이바지하도록 배려해 줄 것을 바라는 건의를 받아들인 선조 임금은 그를 사면하고 도원수 밑에서 관직과 계급이 없는 백의종군을 하도록 허용했다. 투옥 28일을 보낸 4월 1일에 옥문을 나선 그는 육전에 참가하게 된다.

한편, 최고 지휘관이 바뀌고 난 이후의 수군 장졸들은 전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원균 통제사의 허황된 지휘와 빈약한 전술로 말미암아 전과 같은 투지를 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7월에 맞붙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나니 조선 수군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남도의 바다는 왜군의 앞마당이 되어 있었다. 다급해진 선조 임금이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다시 임명한 것은 그 때였다.

8월 3일.

이미 수군 군세가 전멸당한 때인지라 조정에서는 더 이상 왜적의 공격을 해상에서 대항해 낼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바다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육상전투에 협력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라가 의지할 것은 오직 수로뿐이라고 믿어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임진년 이래 5-6년이 지나는 사이에 왜적이 감히 전라도와 충청도를 바로 찌르지 못했음은 오직 우리 수군이 바닷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잘것 없는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 사력을 다하여 대항하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왜적들이 바라는 바로써 그들은 호남을 돌아 바로 한강으로 올라갈 것이니…….”

그는 상유 십이척(尙有 十二隻)이라고 기술했다. 그것은 ‘버려야 할 배가 겨우 열두척’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도 열두척이나 되는 배가 남아 있으니’라고 표현함으로써 강한 자신감과 마음의 여유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남쪽 바다를 석권한 왜군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를 지나 해남반도 수역으로 밀어 닥쳤다. 300척을 훨씬 웃도는 세력이다.

울돌목으로 이르는 진도의 한 포구 벽파진을 근거지로해서 왜군의 움직임을 살펴온 이순신은 15일 이른 아침에 예하 전선을 빼어 명량 물목으로 빠져나가 그곳으로부터 바로 건너편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는 우수영에 닻을 내렸다. 불과 열두척을 가지고 왜적 대군의 진격을 막아내야 하는 판국이다. 그는 울돌목 좁은 수로와 조류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마음을 정했다. 시간에 맞추어 하루에 두 번씩 조류가 흐르는 방향을 달리한다. 물목은 비좁다. 거친 소음을 뱉으며, 흐르는 물살은 세고 빠르다.

이억기 전라 우수사와 최호 충청 수사를 비롯한 역전의 용장들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병졸들을 칠천량에서 거의 잃어버렸으니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날씨가 차가워졌는데도 땀에 저린 여름 홑옷을 걸친 채로 이리저리 뛰고 있는 모습들이 애처롭게 비친다.

몇 안되는 장수들을 모은 자리, 한참이나 먼산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이순신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기로 각오하면 살아날 것이요. 살아남으려고 하면 죽게 된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굳은 결의를 보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명령을 철저히 따르고 군율을 엄히 지키도록 다짐받았다.


신화를 낳은 사투



정유년 음력 구월 열엿새의 새벽 공기가 차다. 북서쪽으로부터 싸늘한 바람이 일고 있다. 달력을 보면 조석은 가장 심한 간만의 차이를 갖는 때이다. 따라서 울돌목을 들고나는 물살이 어느때 보다도 세다. 자정을 한 시간 쯤 지나고 나니 목쉰 울음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벽파진 쪽으로부터 신안 쪽을 향해 그 좁은 수로 사이로 물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울음 소리는 아침 일곱시 직전이면 어김없이 멈추게 되어있다. 그리고 한 두 시간 후에는 반대방향으로 물길이 열린다. 차츰 빠르고 세게. 다급한 적정보고가 날아왔다. 요소에 배치되어 왜군의 동향을 살피던 망군으로부터 보내온 통신이다.

“수 없이 많은 적선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동녘이 환해지려면 아직도 시간이 이르다. 보름을 갓 지낸 새벽달이 서쪽 하늘에서 조용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순신은 예하 열두척의 출동을 명령했다. 닻을 올려 울돌목을 향하려니 거센 물살 때문에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생결단의 순간을 앞둔 병졸들은 눈을 부릅뜨고 힘껏 노를 저었다. 이른 새벽의 북서 조류를 타고 명량수도를 단숨에 빠져나가 서해안으로 밀고 올라갈 왜군의 총세는 133척이었다. 좁은 물길을 꽉 메우면서 행렬이 길게 뻗은 왜적 수군의 총대장은 구루지마.

사방이 엷게나마 희미해지는가 보다. 조류를 타고 울돌목을 저만치 보면서 달려온 왜군 선봉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조선의 남도 수군 마지막 12척이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루지마 예하의 선봉진 30여척은 서로 옆구리를 맞대면서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갔다. 죽음의 싸움터에 들어선 목숨들이다. 구름처럼 몰려오는 적군이 눈 앞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열두척을 가지고 대적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인가? 이순신이 뒤돌아 보니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거느리는 전선은 어느새 편진의 후방으로 저만치 벗어나 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물어물 주저하다가는 센 물살 때문에 영낙없이 진형속의 제자리를 놓치고 멀어지게 된다. 중군의 미조항 첨사 김응함이나 거제 현령 안위가 거느리는 전선도 앞으로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순신은 전선을 몰아 적진으로 돌진하면서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마구 쏘며 빗발처럼 화살을 당기게 했다. 포연이 바람따라 물 위로 번지고 저멀리에서 화포 소리에 놀란 물새떼가 방향을 잃은채 뿔뿔이 흩어져 날았다. 왜군의 선봉진 전선들은 워낙 격렬한 공격을 당하게 되자 앞으로 전진하지도 못한채 머뭇거릴 뿐이었다. 명량의 혈전이 벌어진 것이다. 가을의 이른 아침, 벌떼처럼 에워싼 적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히면서 맹렬한 포화가 교환되었다. 통제사가 직접 거느리는 전선을 뒤따라 다른 전선들도 결사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왜군에게 물길을 내어줄 수는 없는 일.

한편, 전열에서 벗어나있던 전선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순신은 군령을 따르라는 신호 깃발을 게양토록 하며 동시에 전선을 불러들이는 초요기를 세웠다. 그리고 겁에 질린 채 접근 전진하는 김응함과 안위에게 엄한 경고와 격한 독전을 강요하니 그들은 목숨을 내던지고 돌격해 가기 시작했다.

그 안위의 전선에 왜군의 집중공격이 가해졌다. 왜장 구루지마의 명령을 쫓아 비교적 약해보이는 안위의 전선에 대하여 왜선들이 접근하더니 이내 창검과 소총을 쥔 왜졸들이 안위의 전선에 마치 개미가 달라붙듯 쇄도했다. 안위 이하의 전사들은 긴 창과 몽둥이 그리고 수마석을 가지고 필사적인 격퇴전투를 폈다. 그들은 전선으로 달라붙어 덤벼드는 적병에 대하여 닥치는 대로 치고 찌르며 밀쳤다. 창에 찔려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나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돌을 맞고 뒤로 나동그라지는 자들이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만큼 시간이 흘렀다. 세차던 물살은 유속을 잃고 흐르는 듯 마는 듯 했다. 물 빛은 붉은 피 색깔로 번지고 그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왜병이 사지를 퍼덕거리고 있다.

안위의 전선이 집중공격을 받아 사경으로 몰린 상황을 바라본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그 곳으로 돌진하면서 안위의 전선에 접근해 있는 적선에 대하여 소나기 같은 화력을 퍼부었다. 또 다른 우군 전선 두 척도 반격에 신속하게 가세했다. 그 순간, 왜군의 선봉진 전선중 3척이 불길에 휩싸이며 파괴되어 갔다.

혈전은 비좁은 물목을 깨우면서 여기 저기에서 정신없이 펼쳐졌다. 동녘으로 떠오르는 태양이 짙은 표면을 뚫고 따스한 빛을 던져 주고 있다. 수심이 얕아 흙빛이 진한 물결이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 출렁이기 시작하는가 보다. 북서풍이 일고 있다.

전투의 분수령을 이루는 결정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안위의 전선을 둘러싼 격전 중 깨어진 왜군 대형 전선은 왜장 구루지마가 타고 있던 대장선이었다. 난타전을 치르다 배가 부서지자 구루지마는 무늬가 수놓인 비단 옷을 입은 채로 물 속으로 빠져 겨우 고개만 내밀고 있었는데, 그 꼴을 목격한 왜인 준사가 이순신에게 그가 왜장임을 보고했던 것이다. 그는 지난날 안골포 해전시에 적선으로부터 투항해 온 병졸로서 통제사 밑에서 참전하고 있었다.

곧 이어 구루지마는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어 올려졌다. 이순신은 왜장이 틀림없음을 재차 확인하고 난 다음에 아군과 적군이 다 같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매달아 자르도록 명령했다. 곧이어 격전을 나누는 와중에 왜장을 처단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하늘을 덮는 함성이 조선 수군의 전선에서 터져 나왔다. 한편 넋을 잃고 그 꼴을 쳐다 본 왜병들은 몸을 움추리며 경악했다. 지휘관의 생사는 전투 그 자체의 승패와 직결되는 법이다. 방향을 바꾼 물살의 소리도 이제는 한껏 세어지기 시작했다. 12척 대 133척. 추격 섬멸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

물목이 좁고 물살이 도왔다. 그 보다도 싸움의 판국을 결정지은 근본은 열두척에서 보여준 필사의 정신이었다. 무서운 공방전이 반복되었다. 견디지 못한 왜군 선봉진은 대장선이 불타고 깨어지자 전의를 잃고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후속부대 때문에 서로가 뒤엉켜 혼란을 가중할 뿐 이었다. 좁은 물길에 워낙 밀집된 진형인지라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아무렇게 쏘아도 어김없이 명중했다. 도망치는 적선을 뒤쫓아 화살이 날았다.

133척의 대군을 12척의 군세가 추격하는 전투이다. 조선 수군은 왜군을 뒤쫓으면서 잡히는 대로 불사르고 쳐부수었다. 공격을 받아 죽어가거나 부상을 입은 왜졸들이 비명을 토하면서 물결 속으로 떠밀려갔다. 명량해전의 전과는 중반전과 그 이후에 대부분을 셈했다고 한다. 그 소란과 처절을 더 부채질한 것은 울돌목의 목쉰 울음소리였다. 울돌목을 낀 산과 바다가 그토록 놀란 일은 억만년을 두고 결코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가을 햇발이 제법 덮게 느껴졌다. 이른 새벽부터 생과 사의 선을 넘어 몸부림을 친 것이 이제는 쓰러질 듯 지쳐버렸다. 사용할 화약도 이제는 거의 바닥나고 남아있는 화살도 얼마 되지 않았다. 심한 부상으로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전사들이 뱃전 여기저기에서 울분을 토하고 있다.

사력을 다해 대항한 전투였다고 하지만 정녕 그것은 천행으로 이겨낸 한판이었다. 그 결전을 챙겨보니 원수의 133척을 맞아 싸운 것이 31척을 불사르고 깨뜨렸다.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6천을 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 남도 수군의 전선은 열두척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왜군의 전진을 격퇴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렇게도 왜군이 고집했던 해상 서진을 차단하고 한 동안 잃었던 제해권을 다시 되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명량 해전은 그야말로 신화와도 같은 해전이요, 빛나는 대승첩으로 기록되고 있다.
<칼의 노래>중에서 스크롤의 압박이 있지만 정말 봐도봐도 감탄밖에 안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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