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하 생활자의 수기 그토록 읽고 싶었으나 '차마 읽을 수 없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작품. 인상 깊었던 부분을 발췌해본다. 침묵. 깊은 침묵.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병원에서 죽는 편이 낫단 말인가?" "어디서 죽으나 매한가지죠 뭐! 그런데 왜 내가 금방 죽기라도 할 것 같이 말하죠?" 그녀는 짜증 섞인 말투로 항의했다. "지금 금방이 아니면 얼마쯤 더 있다가라도 죽긴 죽겠지." "금방이 아니라도 싫어요……." "그러나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되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지금은 젊고 예쁘고 싱싱하니까 비싸게 팔릴 수 있지만, 이런 생활을 일 년만 더 계속하면 너도 몰라보게 시들어버릴 거야." "불과 일 년 동안에 그렇게 된단 말예요?" "어쨋든 일 년쯤 지나면 너는 값어치가 떨어질거야." 나는 짖궂은 쾌감을 느끼면서 계속했다. "그땐 이 집보다 격이 떨어지는 딴 집으로 옮겨야 하지. 그리고 또 일 년이 지나면 그 밑의 집으로 옮겨가야 하고……. 이렇게 자꾸 자리를 옮기다가 칠 년 쯤 지나면 그 센나야 광장 근처의 반지하에까지 떨어져 내려가게 될 거야. 그 정도라면 또 몰라도 무슨 못된 병에라도 걸리든가 폐병이라도 앓게 되는 날이면 그야말로 큰일이지.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면 병이 나을 리는 만무하니까 결국은 죽는 수밖엔 없는 거지." "그렇담 죽어버리면 그만이죠 뭐!" 그녀는 독기 어린 어조로 이렇게 대꾸하더니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3. 채근담 역시 인상 깊었던 부분 발췌. <전집 173> '쥐를 위해 항상 밥을 남겨 두고, 부나비를 가엾이 여겨 등불을 켜지 않는다.' 하였으니, 옛 사람의 이런 마음은 우리 인간의 나고 자라게 하는 한 가지 작용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곧 이른바 흙이나 나무와 같은 형체일 따름이다. <전집 182> 옛 말에 이르기를 '산에 오를 때에는 비탈진 험한 길을 참고 견디고, 눈을 밟을 때에는 위험한 다리를 참고 견뎌라.' 라고 했으니, 이 '견딜 내(耐)' 한 글자는 극히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만일 이 험악한 인정과 험난한 세상 길에서 '내(耐)' 한 글자를 얻어 의지하여 지나가지 않는다면 어찌 가시덤불과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데스데모나, 당신이 말을 했더라면! 데스데모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의 여주인공이다. 그녀가 죽어가면서 무슨 말을 남겼는지에 대한 문학적 상상으로 시작한다. 총 13명의 여성들의 독백 또는 변론을 써내려간 책이다.
5. 우리들 속에 있는 여신들 신화와 여성 심리학의 절묘한 결합.
<2011년>
1. 어스시의 마법사 (를 비롯한 어스시 시리즈 총 6권) SF소설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그 작가는 어슐러 K. 르 귄일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학성을 갖춘 작가의 장편 판타지 소설. 장쾌한 세계관과 섬세한 심리 묘사, 잘 짜여진 스토리를 갖춘 작품. 판타지 소설 뿐만 아니라 장편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어스시 시리즈를 선택하겠다.
2. 생일 / 축복 (장영희) 우리는 영미시를 학교에서 배워본 적이 거의 없다. 살면서 접해보지 않은 영미시를 접할 수 있는 책. 대중적이고 소박한 작품들 위주이지만 그 감동은 크다.
10. 닥터 지바고 를 읽고 쓴 레포트 발췌. 「닥터 지바고」는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혁명과 사랑을 그려낸다. 이 장엄한 서사에 숙연해져 잠시 독서를 멈추고 혁명과 인간에 대해 사색한 것이 여러 번이다. 유리는 혁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혁명의 정신, 즉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라는 혁명의 목적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위해 민중들이 빈곤과 폭력을 감내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전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현실에 유리는 회의를 느낀다. 유리는 체제와 신념보다는 인간 그 자체, 개인의 인간성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의료 활동과 시작(詩作)을 하면서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서 선(善)을 찾고자 한다. 유리는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 라라와 바리키노의 저택에 숨어 도피 생활을 하며 사랑하는 라라를 위해 시를 쓴다. 개인과 사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물론 둘 다 중요하지만 둘이 상충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는 중립에 가깝지만 개인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사회보다 개인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사회에 비중을 더 둬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라라는 러시아 그 자체를 의미할 수 있다고 했다. 라라는 처음에는 꼬마로프스키를 선택하고, 빠샤와 결혼하고, 유리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꼬마로프스키와 함께 떠난다. 처음과 끝은 꼬마로프스키를 선택하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꼬마로프스키는 러시아 사회의 기득권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꼬마로프스키는 혁명 전에도, 후에도 부와 지위를 유지한다. 혁명에 휘말려 격정적인 삶을 산 빠샤와 유리를 사랑했지만, 결국 라라는 꼬마로프스키에게 의지한다. 혁명에 대해 나는, 나의 시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할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었고, 사회에 관심도 없었고, 현실참여시보다는 순수서정시를 주로 써왔다. 그렇지만 작년과 올해 사회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국내 최초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시를 쓴 박노해 시인의 시집을 비롯한 현실참여적인 문학을 조금 읽으며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이 시대에 순수 서정시가 쓸 가치가 있을까. 시인이라면 마땅히 이 참담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하지 않을까. 다른 예술 분야에서 보면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나 영화 ‘도가니’, ‘26년’, ‘변호인’ 등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그려낸 작품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대중들, 독자들도 그러한 예술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나의 ‘외부’(즉, 세계)보다는 나의 ‘내면’에 더 깊이 사유하고 내 감정을 시로 쓰는 게 더 익숙하다. 이에 반해서 현실참여시를 쓰는 게 과연 해야할 일인가. 이런 고민들을 계속 해왔으나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린 내 고민에 대한 해답은, 일단 혁명을 외면하지는 말아야 겠다는 것이다. 순수서정시이든 현실참여시이든, 소외된 이들, 고통받고 힘든 이들을 대변하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참여시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는 없고, 순수 서정시라고 해서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을 써야 한다고 미리 규정하기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아야겠다.
11. 장미의 이름 을 읽고 쓴 레포트 발췌 조금. 호르헤는 수도원의 장서들과 함께 불타 죽었고, 르네상스 시대는 막이 올랐다. 인문학은 신학을 앞질렀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또다른 것이 인문학을 죽이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논리다. 요즘 각종 인문학 서적이 베스트 셀러에 올라 있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의 상업 논리(사재기를 통한 판매 부수 부풀리기, 상업 광고를 통한 홍보 등)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입시와 취직, 생업에 바빠서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을 점점 멀리하고, 일부만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매일 수많은 책들이 출판되고 정보의 홍수가 범람하고 있지만, 저질의 책과 정보에 묻혀 양질의 책과 정보는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로써, 나도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원래 이 글은 이쯤에서 끝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신문에서 본 하나의 기사가 나를 다시 키보드 앞에 앉게 했다. 소설가 이제하씨가 ‘현대문학’에 연재하기로 한 장편소설 <일어나라, 삼손>에 ‘박정희 유신’과 ‘1987년 6월항쟁’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현대문학’으로부터 연재를 거부당했다는 요지의 기사였다. 다른 무엇보다 더 권력에 저항할 수 있어야하는 문학이, 현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작품을 검열하고 있는 이 사태가 통탄스럽다. 뿐만이 아니다. ‘현대 문학’ 9월호에는 1998년에 출판되었던 현 대통령의 수필 네 편과 그에 대해 찬양하는 비평이 실렸다. 굳이 지금 와서 다시 꺼내볼 가치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수필은, 현 대통령의 수필이기 때문에 실렸다는 의심을 면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수필들을 찬양한 비평을 비판하는 비평이 기고되자 '현대문학‘은 이를 거부했다. 1327년 유럽이나 2013년 대한민국이나, 자신의 종교(또는 사상)만이 옳다는 교조주의가 성행하고 있다. 호르헤는 신학이 지고 인문학이 떠오르는, 르네상스 초입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호르헤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신념을 계속 국민들에게 강요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킬 것인가. 이는 우리들의 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12. 오래된 정원 을 읽고 쓴 레포트 발췌 조금. 소설과 영화「오래된 정원」을 감상하고, 나는 대한민국사를 공부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14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근현대사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특히 고등학교 때는 이과를 선택하면서 역사와는 영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윗세대들이 피 흘리며 쟁취한 민주주의를 등한시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멜로 드라마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중간에 삽입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재현한 장면들은 그 때의 역사를 상기시켰다. 그 장면 빼고는 민주화 운동 그 자체에 대해 조명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사회주의 운동권인 현우는 윤희를 소개 받아 시골에 있는 윤희의 집에 숨어 지낸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윤희는 첫 만남에서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담은 영상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윤희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현우는 윤희와 갈뫼의 시골집에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동료들이 체포되고 자신만 행복할 수는 없다는 죄책감을 느껴 서울로 가기로 결심한다. 윤희는 뱃속의 아기 때문에 현우에게 가지 말라고 하지만, 현우는 듣지 않는다. 독재 시대의 냉혹한 사회 현실은 개인의 작은 행복마저 앗아갔다. 현우는 서울에 올라가서 곧 체포된다. 윤희는 현우와의 사이에서 난 딸인 은결이를 키우며 미술 교사로 지낸다. 그리고 운동권인 영작과 미경을 알게 된다. 미경은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해 노동 운동을 한다. 윤희는 미경에게, 너 같은 먹물이 노동자로 살 수 있겠냐고 한다. 미경은 그건 언니 생각이라고 말한다. 미경은 노동권의 보장을 외치며 분신자살한다. 영작은 조직으로부터 운동에 앞장서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하지만 감옥에 가면서까지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던 영작은 고민에 빠진다. 윤희는 영작에게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너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18년 뒤 출소한 현우는 딸인 은결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은결과 만난다. 은결은 현재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물음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