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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오키나와, 선택하지 못한 삶의 비극
게시물ID : history_197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V12
추천 : 18
조회수 : 6142회
댓글수 : 42개
등록시간 : 2015/02/21 03:12:00




본 내용은 XSFM의 팟 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의.

106b. ハイサイおじさん

외신분석 단어만 다른 우리 이야기
; 일본 밖의 일본- 오키나와 간략사

를 요약 정리한 내용이며 해당 팟캐스트는 http://xsfm.co.kr/wp/?p=188

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출연. UMC/UW, 이용, 오키나와환타(=홍콩환타=인도환타)



너 시간 있어? 오키, 나와. pc방가게


0. 오키나와의 음식

 현재는 일본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오키나와. 일본을 지배하는 불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이 곳은 돼지고기가 발달하였다. 이는 오랜시간 일본이 아니었던 오키나와를 대변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구글지도 오키나와 저녿.PNG

오키나와 열도의 간략한 지도(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만들어 보았습니다.)


1. 오키나와의 위치

 일본 본토의 최남단인 가고시마 530km, 타이완 본토까지는 111km. 지리적으로 보면 대만과 훨씬 가까운 섬인 오키나와. 때문에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기곤 한다. 이 애매한 위치 덕분에 많은 나라의 오지랖의 범위안에 있다.


 1-1. 우리나라와 오키나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홍길동의 율도국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오키나와의 예전 이름이 류쿠이기 때문일까. 또한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패한 시기와 쿠스코(성城)이 들어선 시기가 묘하게 맞아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삼별초가 이곳에서 (어떤 식으로든)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는 이 주장이 발전하여 오키나와가 우리의 동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승만 대통령(흠좀무).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와 함께 오키나와가 우리나라의 영토라고 주장하였고, 그게 안되자 오키나와 독립 촉구 성명을 3번이나 발표하기도 하였다고.


 1-2. 중국과 오키나와

 조어도(=센카쿠 열도, 다오위다오)에 대한 영위권을 주장하는 중국은 조어도가 속해있는 오키나와 전체가 중국의 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암초 하나에 140만 명의 일본인이 사는 섬을 자기꺼라고 말하는 대륙의 스케일이란. 그 주장의 바탕은 중국의 푸젠성과 오키나와의 인종이 같다는 것.


 1-3. 일본과 오키나와

 하지만 상식적으로 오키나와는 현재 일본에 속해있는 곳이다. 3만 5천 년 전의 인골이 오키나와 남부 이시가키 섬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에서 발견된 최초의 인골로 일본의 사학계와 고고학계가 큰 의미를 두고 있다.(일본에서는 3만 년 이상의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다. 후지모라 신이치라는 걸출한 사기꾼을 배출된 배경이기도 하다.1)




 2. 오키나와의 역사

 2-1. 일본 편입 전의 역사

 오키나와가 부족 국가의 구색이라고 갖춘 것은 12세기 무렵으로, 삼산(오키나와의 삼국시대)이라고 해서 오키나와 본토가 3개로 쪼개져 있었다. 1429년 삼산이 통합되어 류쿠 왕국이 건립된다. 이 삼산은 각각 북산, 중산, 남산.이면 슬램덩크의 북산고가 오키나와의 북산고라고 하더라는 개드립이 존재했다고 카더라.

 이 류쿠국은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율도국으로 오해되기도 하며, 1609년 사스마 번에 의해서 점령되기 전까지 200여 년간 중국, 조선, 일본, 인도네시아까지 커버하는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린다.

 이 때 일본은 전국시대로 지들끼리 싸우기 바빳고, 일본 남부는 왜구로 변해서(왜말리아) 조선, 명나라를 털기에 바빴다. 때문에 명나라는 일본과의 조공무역을 막거나 풀렸을 때도 10년 1사였다. (오키나와는 1년 2사, 우리나라의 경우, 1년 3~4번) 그래서 일본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조선이나 오키나와를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의 교역이 막힌 단점은 역으로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게 하는 장점이 되기도 하였다.

 여튼 일본의 전국시대가 마무리되고 마무리 전쟁으로 임진왜란을 기획하던 도요토미 히데오시는 출병 전 류쿠에 사람을 보내어 쌀과 군대를 지원하라고 압박했다. 그러자 류쿠는 명나라에 고자질. 조선에도 고자질. 일본은 임진왜란의 패배로 고자짓이 되어버렸다.


고냥질.jpg

일본이 쌀과 군대를 보내달라고 하는게 무슨 뜻일까요?(순진한 표정)


 일본은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와 이시다 미츠나리 파의 세키가하라 전투로 정리전쟁을 하고 이 전투는 이에야스파의 승리로 하루만에 끝이 난다. 이 싸움에서 마츠나리 파에 가담했던 사쓰마 번은 비록 패배하여 영지는 몰수 당했지만, 굉장히 잘 싸워서 병력은 보존받는다. 이 상황을 요약하자면 먹을 것은 없는데 거친 아저씨들만 드글드글한 상황. 그런데 고개를 드니 어라? 저번에 우릴 고자질 한 그놈이 보인다.

 거친 아저씨들은 530km를 배를 타고 가서 왕국하나를 털어버린다. 


2-2. 일본 편입 - 비극의 시작.

 사쓰마 번이 오키나와를 털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조공무역의 권리를 강탈하는 것이다.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나서도 왕과 왕실을 내버려둔다. 중국에게 오키나와가 털린 사실을 들키면 오키나와가 1년에 두 번 조공무역을 했던 권리를 박탈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위에서 언급했지만 일본은 기껏해야 10년 1사였고, 오키나와는 1년 2사였다.) 때문에 조선과 중국이 모르도록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로써 오키나와 비극의 고리가 완성된다. 일본 정부는 사쓰마 번을 삥뜯고,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 왕을 삥뜨고, 오키나와 왕은 백성과 특히 본섬이 아닌 주변 섬을 삥뜯는. 수탈의 제곱의 제곱의 제곱의 제곱. 

 사쓰마 번은 용이한 점령을 위하여 오키나와 왕실 일부 경비대만을 제외하고 모든 무기를 빼앗는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철광산이 없기 때문에 수입이 아니고선 철 무기를 만들지도 못한다.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는 맨몸 무술인 고유 가라데가 시작한다.2 또한, 최소의 철을 이용한 무기인 쌍절곤이 발달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탕수수의 독점을 위해서이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사탕수수가 났던 유일한 지역이 바로 오키나와이다. 사쓰마 번은 이걸 털어서 독점하여 엄청난 이득을 취한다. 음식 사학자들이 이야기하길 사쓰마 번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전까지 일본의 음식에 단맛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오키나와는 지형이 화산섬이기 때문에 물을 저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논농사를 할 수가 없다. 이를 이용하여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에서 사탕수수만을 재배하게 하여 헐값을 가져가고, 쌀은 오키나와에 비싸게 파는 식으로 이익을 취했다. 전형적인 플랜테이션.


 이렇게 사쓰마 번에 탈탈 털리다보니 오키나와 왕국은 내부차별을 시작한다. 오키나와 본섬에는 안 걷는 인두세를 만들어 주변 열도 사람에게 징수하고, 노동력의 등급을 4개로 나누어 징수한다. 문제는 아이와 노인같은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인두세를 걷었다는 것이다.

 사실 오키나와는 상업거으로는 몰라도 농업적으로는 좋지 않은 지역이다. 미나코 섬 같은 경우에는 지대가 낮기 때문에 쓰나미로 인하여 섬 전체가 쓸려나가 전멸한 기록이 있을 정도.3 이런 상황에서 인두세까지 걷으니 상황은 악화일로일 수 밖에. 이들은 살기 위해서 죽기 시작한다. 즉, 인위적인 인구조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미야코 섬의 예: 1.마을 촌주가 사람을 모은 후, 시간을 놓친 사람을 죽인다. 2. 마을의 임산부를 모두 모은 후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인다. 애가 태어나면 세금을 더 내야하기 때문에.


 이렇게 300년을 털리고, 이 과정에서 사쓰마 번은 엄청난 부를 이룩한다. 이 부를 바탕으로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의 기치를 세우게 되는 것.4 어찌보면 메이지 유신은 오키나와의 사탕수수가 만들었다고 해도 될 정도.


 이런 가혹한 통치하에서 발전되는 오키나와의 음식문화도 씁쓸한 맛을 더하게 된다.

 먼저 사탕수수를 끓여서 굳힌 덩어리인 흑당. 오키나와 북부의 아마미 열도는 사쓰마 번의 직영지로써 사탕수수 전매제를 실시했는데 오키나와 사람이 사탕수수에 손을 대면 손목을 잘랐다. 이들에게 설탕이라는 것은 끔찍한 기억일 수밖에 없지만 현재는 오키나와의 가장 유명한 특산품이 되었다.

 두 번째. 해초요리. 배를 타고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를 다 압수한다. 섬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물고기를 잡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섬사람인데! 때문에 배를 타지 않고도 채집할 수 있는 해초, 뻘의 문어, 맹그로브 숲의 게를 이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세 번째. 고구마 요리. 구황작물이다.

 (나중 일이지만 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스팸을 넣어 만든 요리가 발전했다고 한다. 의정부의 부대찌개처럼)


 일본 해군의 뿌리인 사쓰마 번의 조선 통치가 그렇게 가혹했던 이유는 오키나와에서 트레이닝이 되었기 떄문이 아닐까.



2-2. 류큐왕국의 멸망. 일본으로의 완전 편입.

 메이지 유신의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으로 치환함, 지방정부를 중앙정부가 통치하도록 부와 현으로 행정구역을 나눔)으로 인하여 오키나와는 완전히 일본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 1872년, 오키나와는 명목적인 독립 상태마저도 박탈당하고 오키나와의 마지막 왕은 일본에 끌려가서 자작의 작위를 받는다. 이를 류쿠처분이라고 부르는데 이 당시 기록을 보면 30명의 수행원, 순사 160명, 보명 400명이 가서 나라의 문을 닫는다. (이후 조선 병합은 38년 만에 이루어진다.)

 

 이 당시 오키나와 본섬에서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만 아에야마 열도와 미야코 열도 등 주변 섬에서는 이에 대해서 묘하게 환영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최소한 인두세는 없어질테니까. 하지만 인두세는 20년 정도 존속되었다고 한다.



2-3. 태평양 전쟁 당시의 오키나와

 승승장구를 하던 일본은 미국의 참전 이후에 점차 밀리게 된다. 44년, 연합국측에서는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 작전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일본은 이에 따라 본토 방어 작전을 수립하게 된다. 이 때 일본에서 세웠던 방법은 본토에 점령하기 전에 섬을 요새화하고, 우리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고 적을 최대한 소모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연합군은 승기를 잡은 상태였고, 방어 작전 전의 일본은 착검 돌격, 일명 반자이 어택이라는 전략적으로는 아무 쓸모없는 방식을 채택중이었기 때문에 오키나와에서 태풍길을 따라 바로 본토에 상륙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전쟁의 핵심에 오키나와가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오키나와로 모든 병력이 집중하게 되어 오키나와 주변섬에서는 전쟁이 일찍 끝나게 된다. 문제는 오키나와 본섬. 44년 8월에 일본군은 오키나와 섬 전체에 수천 개 요새를 파고, 해군 사령부 같은 경우도 텔레토비 집같이? 호빗 집같은 모양으로 언덕에 구멍을 뚫고 참호를 만들었다.5

 연합군은 오키나와 남부에 가네다라는 곳으로 상륙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진하기 시작했다. 2300개의 요새를 모두 깨야만 전진이 가능한 것이다. 미국는 전진을 매일 50m씩 밖에 할 수 없었다. 3개월 동안에 치뤄진 이 전투에서 271만 6000발의 포탄(총알 아님)이 떨어졌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전투를 '철의 폭풍'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해안선이 바뀐 지역이 10km에 달한다고.

 전쟁이 최종 결과로 일본쪽이 18만 명이 죽고(군인은 11만 명이었다.), 미군은 1만 2000명이 죽는다. 이 전투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전투이기도 하고, 각 국의 최고 사령관이 죽는다. 미국쪽은 중장이 시찰나갔다가 포격으로 죽고, 일본 최고 사령관은 자결한다. 미국의 가장 높은 계급이 죽은 전투이기도 하다.

 이용 상임수석은 퍼시픽이라는 미드를 추천했다.

 

퍼시픽.jpg



 문제는 군인간의 공방이 아닌 민간인들의 희생이었다.

 전투 전(前)에 일본군은 전투 전부터 불령선인을 솎아낸다는 명목하에 일본말을 못하는 사람을 미국의 스파이로 몰아서 죽였다. 이때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일본어 못하는 조선인들이었다.

 이오지마 섬의 예: 성실하고 착한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이웃사람이 일본군인이 온다고 하여 담을 넘어 도망가려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이 예가 의미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어떤 재판 과정이나 심문도 없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바로 죽였다는 것이다.

 또한, 유언비어도 퍼뜨렸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탱크에 깔아 죽이고 여자는 집단 강간 후에 찢어서 죽인다는 유언비어였다. 일본군이 포로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언비어의 발전형이 바로 옥쇄(玉碎)정책이다. 옥처럼 부숴저라는 뜻으로 적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느니 아름답게 자결하라는 말하자면 할복문화의 집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예1: 종군기자 출신의 어머니가 주사기에 독을 넣어 아이들에게 주입하여 죽이고, 자신도 죽음

 예2: 아버지가 낫을 들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죽임.

 예3: 미군을 피해 숨어있는 상황에서 애가 울기 시작하자, 일본군이 이 애로 인하여 다 죽게 생겼다고 함. 아이의 아버지는 애기 울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았고, 아이는 더 심하게 울고, 아버지는 더 세게 입을 틀어막다가 결국 아이는 질식사하게 되고, 아버지는 미쳐버림.

 중요한 것은 일본 종특이라는 조사가 이 오키나와 섬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 집단 자결 역시 강요가 아니라 의기로운 자결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사람이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일본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1,000명이다. 더 기가 막힌 점은 새역모(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6)에서는 이를 애국적인 행동으로 포장한고 있다는 것이다.

 


2-4. 2차 세계대전 이후 오키나와


 세계 제2차 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오키나와의 관점은 일본군과 같은 편의 가해자의 관점이 아닌 피해자의 관점이다. 때문에 오키나와 전투의 기록을 가진 평화기념관에는 일본군의 만행이 소상하게 모아져 있다. 그중에서 오키나와 환타님이 인상깊게 봤다는 영상의 내용은 이렇다.

 오키나와는 해안에 절벽이 있기 때문에 자살을 대부분 절벽에서 투신으로 한다고 한다. 그 영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해안 절벽가에 자살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를 하고 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사람 씩 절벽에서 투신하는데 절벽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토끼처럼 성큼성큼 가서 뛰어내린다고 한다. 밥을 먹고, 빨래를 하듯 자살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삶이어도 삶의 마지막 순간인데도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삶이 얼마나 지옥같은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오키나와환타님은 생명체로서의 마지막 부분까지 무시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표현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결국 일본의 의도대로 전선을 3개월이나 끌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일본군은 연합군이 질려서 더이상 전투를 하지 않도록 하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질린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본토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오키나와 전투처럼 하루에 50m씩 전진하게 되면 30~50만의 미군의 희생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미군이 원폭 투하를 결정한 한 요소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에서 오키나와는 미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상황은 오키나와에게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이 관련되어있지도 않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주민의 1/3이 죽었는데, 그 전투의 결과로 자신들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동아시아의 어떤 나라의 역사와 비슷하다.) 지들끼리 자신을 넘기고 넘겨받는 상황.

 오키나와는 그래도 일본보다는 미국이 나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오키나와는 미군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되어 예전과 똑같이 요새화되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오키나와는 동아시아의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하지만 이게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무슨 상관이야.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고 간신히 다시 개간한 밭을 다시 미군 기지로 넘겨야만 했다.

 한국 전쟁 후 베트남 전쟁이 터지면서 오키나와는 더욱 미군의 군사기지화가 가속되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에 포격하던 b-52을 악마의 비행기라고 불렀고, 그 비행기가 날아오는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악귀도惡鬼島7)라고 부르며 저주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을 수 밖에. 베트남 전 당시 오키나와의 반전 구호는 "우리는 악마가 되고 싶지 않다." 였다고 한다.

730 표지판.jpg

출처- http://kcanari.egloos.com/4011043

730 표지판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는 독립되지 못하고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이 된다. 7월 30일, 하루아침에 자동차 통행이 좌측통행이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오키나와의 730표지판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미국 통치에서 일본 통치로 완전히 변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당시 협상 테이블에 미국과 일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당사자인 오키나와 인들은 없었다.

 일본의 통치를 다시 받게 된 오키나와는 다시 기대를 한다. 미군 기지 문제를 해결해주겠지? 하지만 이 역시 오키나와 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력으로 빼앗은 땅을 평화적으로 이양하는, 전 세계의 모범적인 사례를 남겼다. 이 수사에 오키나와 인들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고, 미군기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3. 오키나와인의 현재

 오키나와 인들에게 물어봤다. 당신은 오키나와인인가 일본인인가. 오키나와인을 오키나와어로 하면 우치단추라고 한다. 당신은 우치단추인가 일본인인가. 일본이 오키나와에 2차 세계대전 당시 행한 폭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인이다. 28.8%. -> 자국 군인들에 의하여 학살당한 슬픔

 일본인이면서 우치단추다. 41.8%

 우치단추다 21.5% -> 침략자에 의하여 학살당한 분노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은 군인들에 의하여 학살당한 기억은 오키나와인들 의식 전체에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오키나와 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어떤 군대도 자신을 지켜주진 않는다. 군대의 소속이 어디든 군대는 일본군이든, 미군이든 류쿠군이든 이들을 지켜주기보다는 수탈해왔다는 슬픈 역사를 대변하는 말이다.

 이 트라우마는 쉽게 잊혀질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2010년에 1945년 오키나와 전투를 경험한 사람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40%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고 대답했다.8 헨자니 로꼬라는 할머니는 아직도 미군 전투기의 습격을 받는 꿈을 꾼다고 한다.

 헨자니 로꼬의 예 : 방공호에서 숨어있는 상태였다. 미군은 방공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는데 다행히 반대쪽에 문이 있어서 4살배기 동생을 업고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동생의 손이 풀려서 스르륵 떨어져 잡을려고 했는데 결국 동생이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도망을 왔다. 그 뒤 엄마를 만났는데 동생의 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이 새빨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점은 이들에게 외상후 스트레스를 치료할 시간이 없었고,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 지도를 보면,

미군기지 in 오키나와.png

오키나와 안의 미군기지(빨간색)9

 

 오키나와의 매우 많은 지역이 미군기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주둔한 미국 해병대의 거의 전부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다. 1950~60년 대 본토에서 일어난 미군기지 반대 운동으로 인하여 본토 내에 미군기지가 1/4까지 줄었는데 그 만큼 오키나와로 옮겨간 것이다.

 섬 자체도 크지 않기 때문에 오키나와 어디든 비행기가 뜨면 그 소리가 전역에 다 들릴 정도이고, 미군의 비행기가 시도 때도 없이 이륙하여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태에서 어떻게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잊을 수가 있을까. 끔찍했던 그 장면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재생되고 있는데. 자기 합리화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4. 선택하지 못한 삶의 비극

 오키나와 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의 역사에 그들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은 때로는 임산부를 절벽에서 밀기도 하고,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게도 하고, 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비극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여전히 미군 기지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역사를 보면 오키나와 인들이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해서 궁금함이 생길 정도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고통에 저항하면서, 적응하면서 꿋꿋히 살아가고 있다.


하이사이 오지상ハイサイおじさん

오키나와 어로 하이사이는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직역하자면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 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노래를 들을 3분 정도의 여유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노래는 키나 쇼오키치라는 오키나와 싱어송 라이터가 쓴 곡으로 들으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신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오키나와 인들의 비극이 숨어 있다.

 이 가수가 9살일 때, 옆집에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아줌마가 살고 있었다. 정신착란에 빠진 아줌마는 자신의 딸을 죽여 목을 잘라서 냄비에 요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본 아저씨도 미쳐버리고 말았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 미쳐버린 아저씨와 옆집에 살던 어린 키나 쇼오키치의 대화이다.


 이 노래는 고시엔(일본 고교야구)에서 오키나와 출신의 고등학교가 경기할 때 응원곡으로 쓰인다고 한다.

 비극 속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의 거의 모두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106b.ハイサイおじさん 를 단순 요약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그 외에 참고한 곳은 엔하위키 미러의 '오키나와'항목입니다. 


 





  1.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0/021015000200011150334041.html [본문으로]
  2. 오키나와 환타님의 토막상식: 남방계는 옷을 가볍게 입기 때문에 타격계 무술이 발달하고, 북방계는 옷을 두텁게 입기 때문에 맞아도 안 아프고 집어 던질 수 있기 때문에 관절계 무술이 발달한다. [본문으로]
  3. 오키나와는 독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나코 섬은 뱀이 없기로 유명하다... 좋은 건가... [본문으로]
  4. 메이지 유신은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주도한 일로, 조슈 번은 현대 일본의 육군 뿌리를, 사쓰마 번은 현대 일본의 해군 뿌리를 담당한다. 또한 조슈 파벌 대표는 현재 아베 신조이며 사쓰마 파벌의 대표 인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있다. [본문으로]
  5. 전쟁 끝나고 이곳에서만 시신이 2400개가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6. 황당할 정도로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본 우익 집단 [본문으로]
  7. 악귀도라는 이름 자체는 삼국지 수서전에서도 나온다고 한다. 오키나와를 음독하면 악귀도 [본문으로]
  8. 오키나와 대학 조사 [본문으로]
  9.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8/US_military_bases_in_Okinawa.svg/639px-US_military_bases_in_Okinawa.svg.png [본문으로]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들이 얼마나 될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시 읽기도 싫을만큼 길어서...
그럼에도 불구하도 읽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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