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10&sid2=201&oid=028&aid=0002264662 [2030 잠금해제] 불평등은 어떻게 꿈을 빼앗는가? / 조원광
[한겨레] 2004년 세계은행 정책 보고서로 흥미로운 실험 내용이 공개되었다. 칼라 호프와 프리양카 판디는 인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로 풀기 실험을 수행했다. 실험의 목적은 낮은 카스트에 속한 학생들이 카스트를 공개적으로 밝혔을 때와 밝히지 않았을 때, 미로 풀기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 차이를 보이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결과는 선명했다. 카스트를 밝히지 않았을 때, 낮은 카스트 학생들의 성과는 높은 카스트 학생들의 성과에 뒤처지지 않았고 약간이지만 오히려 더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카스트를 밝히는 조건이 주어지자, 낮은 카스트 학생들의 성과가 급감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두 연구자는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후속 실험을 진행한 끝에, 이런 차이가 카스트를 밝히게 되면 ‘공정하게 취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학생들을 사로잡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낮은 카스트의 학생들은 카스트 때문에 공정한 보상이나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접해왔다. 카스트를 공개적으로 밝히자 이런 경험이 환기되었고, 이는 의욕 저하로 이어져 미로 풀기 성과가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실험 집단에 낮은 카스트의 학생만을 모아놓은 조건, 그러니까 집단 정체성이 환기되어 낮은 카스트가 가져오는 차별이 보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조건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중립적인 조건에서는 훌륭한 능력을 보이다가, 계층 정체성을 밝히는 것 하나만으로 성과가 급감해 버린 이런 결과는 우리 사회와 무관할까? 슬프게도, 무관할 것이라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필사적인 구별짓기, 그러니까 자기보다 사정이 좋지 않은 가정과 애써 거리를 두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가능하면 내 아이가 가난한 집 대신 멀끔한 가정의 자제들과 어울렸으면 좋겠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전셋값을 감당하면서 좋은 학군으로 이사를 가고, 혹시라도 주거지가 붙어 있으면 그걸 여러 방식으로 분리해내고. 이런 일은 사실 자기를 갉아먹는다. 그럴수록 나보다 높은 계층의 가정 또한 내 가족을 대상으로 그런 구별짓기를 시도할 것이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 학생들의 실험에서 보듯, 그 악영향은 우리 아이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구별짓기 속에 자기 계층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그 안에서 자기 인생의 한계를 가상적으로 체험할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어떤 꿈을 꾸게 되겠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을 대상으로, 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2011년)와 학생들의 학력 수준 지표인 피사(PISA) 점수(2012년)의 상관관계를 구해보면, 음의 상관관계가 도출된다. 불평등한 국가일수록 학생들이 공부를 못한다는 말이다. 사회가 불평등하면 사람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열의를 가지고 활동하여 큰 성과를 올릴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가깝다. 오히려 사람들은 상황을 비관하여 활력을 잃을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환상에 사로잡힌 것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한국 정부의 불평등 완화 정책은 미약한 편이다. 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는 세전과 세후로 따로 산출이 되는데, 한국은 칠레를 제외하면 오이시디 국가에서 세전 지니계수와 세후 지니계수의 차이가 가장 낮다(2011년). 조세 정책이 불평등 개선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참 부끄럽고 난감하다. 우리는 그렇다 쳐도, 이런 세상을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