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앞주머니를 열어 단어장을 집어넣는다. 권태로움이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이 하얗다. 답답하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덮여있다. 나무는 왜 그리 앙상한지! 나의 봄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그 지난 시간에서 또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에선 봄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저 조금 더 따듯한 겨울이 있을 뿐. 그 현상이 천천히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창밖을 보며 생각을 하던 도중에 다른 버스가 내 시야를 막아버렸다. 70-3번 버스 옆 차선에 선 70번 버스. 같은 곳을 향하지만, 다른 사람들, 다른 버스, 다른 숫자... 내 눈앞에 70번 버스의 승객들이 보인다. 사람은 다르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다. 똑같은 초점 없는 눈빛으로 고개 숙인다. 나의 바로 반대편. 70번 버스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애.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항상 신경이 쓰였다. 70-3번 버스와 70번 버스는 바로 옆 차선에 서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그 남자아이는 항상 그 자리에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버스 차창을 통해서만 걔를 바라보았다. 살짝 파마끼가 남은 머리는 눈썹을 넘지 못 했다. 눈썹은 꽤 짙은 편이였다. 눈썹에서 광대까지 오는 큰 뿔테를 끼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떡볶이 코트 안에 마이를, 그 안에 니트 조끼를, 그 안에 와이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항상 좌석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두었다. 나는 그 아이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항상 앉아있는 모습만 봤다. 난 항상 걔보다 먼저 내렸다.
'이번 정류장은 ㅇㅇ고등학교 입니다-'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 가라고, 어서 나가라고 자꾸만 내 등을 떠민다. 난 항상 기계 목소리에게 졌다. 버스 좀비들 틈에서 내리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꾸역꾸역 돌파구를 찾아 '삐빅!'.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탁 트이는 내음새가 내 폐포를 자극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아침에 일찍 도착하는 것의 좋은 점은 신선한 공기를 내가 제일 먼저 맡는다는 점. 몇 발자국 걷다가 뒤돌아본다. 저 멀리 70-3번 버스가 정류장을 벗어나고 있다. 70번 버스도 함께, 안녕- 내일 보자, 버스 그리고 이름 모를 남자애. 버스에서 정류장으로 그리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려는 찰나, 그 찰나에 발견했다. 학교 앞 정류장에 서있는 그 남자아이를.
한 걸음, 한걸음 내 쪽으로 걸어온다. 나 때문에 내린 걸까? 아니면 그저 우리 학교에 볼일이 있을지도?
나 였으면 좋겠다. 나는 온 마음으로 우주를 흔들었다. 휘날린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내가 사르르 날아가 버릴 것 같다. 햇빛을 잘 받은 우리 집 화분은 분홍색 꽃을 피웠다. 서울시청 앞 잔디밭에는 잔디가 자라고 있으니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계속해서 부는 바람에 구름은 조금씩 이동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봄은 오고 있었다.
봄이, 드디어 나에게도, 오긴 하는 걸까?
다시는 기억하기도 싫은 시간이 끝나고 나에게도 산뜻한 바람이 찾아오는 듯했다.
낯선 타지, 처음 보는 사람, 그리고 새로운 인연. 이 모든 것은 나의 새 출발을 알렸다.
이 제는 다음 날 무엇을 입을 건지 전날 밤 고민을 해 놔야 한다. 아침마다 화장하는 것도 곤욕이겠지. 마치 새 학기가 시작된 기분으로 친구 사귀는 것도 어찌나 오랜만인지. 혼자 산다는 게 아직은 많이 서툴다. 이 모든 부족함이 '어른'이 돼는 발자국 이라면.
아직은 봄이라 부르기 이른 2월, 2월 말, 나는 조심스레 나의 봄을 기대 해 본다.
어젯밤 새 내린 눈도 한 밤만 자면 다 녹아내려 있겠지
어쩌면 그 밤 동안 봄꽃도 다 폈을지 몰라, 벌써부터 내 마음엔 벚꽃이 흩날리고, 그곳의 하늘은 온통 연한 노란색이다.
목 안쪽을 살랑살랑 간질이는, 약간의 어색함을 즐기고 싶어지는
봄.
하며 입술이 오므려지는 순간.
제가 봄을 좋아하나 보네요... 그냥 주절주절 신변잡기적으로 글쓰는거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