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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가평
국도변의 한쪽으로 급히 차를 세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몰아가던 중이었다
핏덩이가 드문드문 섞인 물
흉곽에서부터 쇄골을 치며 올라오는
도무지 삼켜지지 않는
울음은 때로 각혈 같아서
일몰 시각이 아니어도
국도변 쥐똥나무 울타리가 온통
붉게 물들기도 한다
울기에 좋은 곳 가평
울 만한 울음터가
널려 있지 않은 국도변이란 없다

이해존, 관계
한 번도 뜯어낸 적 없는 것을 드러내자
바람이 빈틈을 메운다
코르크 마개처럼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
담벽에서 무너져 내린 흙더미는
제자리에 있던 것보다 수북하다
오랫동안 붙들려 있던 것들이
어둠의 부피를 키운다
같은 것이 같은 자리를 찾아가도
아귀가 맞지 않아 다시 닫히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한 번 떠나간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 때
어둠을 문지르면 더욱 짙어지는 날들
둘로 나뉘는 순간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두 번 다시 들일 수 없을 것 같은 간극
잠시 떨어져 지내보자는 말이
허공에 붙들린 마른 나뭇잎처럼 위태롭다

김남권, 비밀 언어
부천역 앞 작은 카페에 벙어리 부부가 들어섰다
편지 쓰듯 종이에 마시고 싶은 메뉴를 적고
자리에 앉아 손말을 한다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손짓 하나에 표정 하나 바쁘게 오고 가며
대화를 한다
분명히 크게 떠들고 있는데 조용하다
어디 가나 말이 넘쳐 나는 시절인데
티비를 틀면 정치인들이 금방 들통날 거짓말
잔치를 벌이는데
말을 저렇게 쉴 새 없이 해도 사방이 고요하다
살아가는 동안 나는 쓸데없는 말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던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둘만 아는 손말을 한다면
얼마나 깊고 고요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그런 말을 나누며 은밀한 연애를 한다며
얼마나 좋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손 모양을 보고
입 모양을 보고 그 눈빛까지 그려내는
벙어리 부부가 머물다 간 자리에
에델바이스 한 송이 피어났다

문설, 마법이 통했어
종소리가 세 번 울리면
물에 빠진 신발이 돌아온다고 했지
뭉근하게 오래 끓인 주스가
와인으로 바뀐다는 와전이 아름다운 건
그 속에 푸른 눈동자의 질투가 숨어있기 때문이지
지중해를 한 그릇에 담는다면 무슨 맛일까
당신의 라따뚜이는 당신의 맛
세잔의 비가 쏟아지기 전날 산을 지운 물안개는
좋은 기억만 떠올리게 하는 마법의 변주야
숨이 멎을 것처럼 나는 아흔아홉 계단을 오르지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붉은 꿈속에선
당신을 위한 프로방스의 주문을 외워야지
왜 와인은 세 번째 종소리 끝에 살아 있어요
발소리가 끝나는 물 밖으로
검은댕기해오라기가 파문처럼 당신을 물고 왔지
절대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김종식, 고향
고향을 묻고 돌아와 울었다
울다가 참고 며칠 울다가 참았다
몇 달이 지나자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밀려와 울었다
한번 그치면 다시 울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겁이 났다
눈물샘을 만들 궁리를 하였다
더 희미해지기 전에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울고 싶어서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큰 눈물이 필요할 것 같아서
눈물이 될 만한 재료를 찾아보았다
품앗이로 거칠어진 손 주름 몰래 빼주어 빈 꼬챙이가 되어버린 곶감 걸이
말할 때마다 묻어나오던 은빛 반짝 웃음
언제나 아끼지 않던 약수 빛깔 친절
누구에게나 가난한 모습 하나 먼저 보여줘 용기를 주던 습관
눈물 재료가 쌓이자 다른 온도의 눈물이 나왔다
고향의 약수를 앉은뱅이 술 인양 마셔만 대던 내 모습이나
마시고 마셔도 남아돌아 발로 차며 헤엄치던 나날들이 낯 뜨겁게 흘러내렸다
나 몰래 고향은 돌아갈 날을 세고 있었다
낯선 시선들 사이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를 잊지 않으려고
떠나오던 날부터 돌아갈 날까지 세고 있었다
고향을 고향에다 묻고 나서야 고향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