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저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외칠 수 있는가?
드레스는 파란색이지만
사진에서의 드레스는 파란색이 아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사진은 카메라 보정 기능에 의해 색상이 왜곡되었다.
카메라의 보정 기능 중 색온도와 화이트밸런스라는 것이 있다.
색 온도는 일부 영역의 컬러톤을 조절함으로서 유색조명에 따른 색상왜곡을 줄이는 역할을 하고,
화이트밸런스는 전반적인 명암의 균형을 맞춰 지나치게 어두거나 밝은 사진을 적당한 밝기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요즘 대부분의 카메라가 별도의 조작없이도 이러한 보정을 자동으로 처리한다.
이 사진이 찍히게 된 매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노란색 조명 근처에 있는 푸른색 옷을 찍는다. 옷은 직접적인 조명을 받지는 않으며, 어스름하게 주변의 조명의 영향을 받는다. 사진이 전체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카메라 렌즈 노출시간이 길어져 원래 보이는 색상보다 좀 더 강조가 되었다. 푸른색 옷은 노란색 조명색의 영향력으로 녹색에 가깝게 보이게 된다. 카메라는 사진의 색분포를 분석해 이 사진이 노란색 조명 아래 찍혔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반적인 노란색톤을 제거한다. 이로 인해 녹색을 띄던 파란색은 제대로 된 파란색이 된다. 그런데 사실 검은색 부분에도 미세하게 노란색이 덧씌워져 있었다. 하지만 검은색이다보니 그 수치값이 미미했고, 보통의 경우, 그정도로 미세한 색상까지 민감하게 처리해버리면 다른 영역에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므로 그렇게까지는 처리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눈에도 그 검은색이 품은 노란색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카메라가 사진의 명암을 분석하고 나니 사진이 전반적으로 너무 어둡다는 결론이 나온다. 명암비의 균형을 맞춰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출력하기 위해 화이트밸런스 기능이 작동한다. 어두운 부분이 밝아지게 되면서 사진은 전반적으로 일정한 톤이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진이 밝아지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색보다 더 부각되버리게 된 것이다.
푸른색 영역의 경우 그냥 푸른색으로 강조되므로 크게 문제가 없지만, 검은색 영역에 남아있던 노란색은 크게 부각되어버려, 노란빛이 도는 갈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드레스는 검은색과 파란색으로 찍히지 않았다.
파란색과 갈색, 즉 어두운 금색으로 찍혔다.
물론 사람이 색상의 절대값에 의존하거나 하여 기계적으로 색상을 파악하지는 않는다. 상대적인 색차이, 배열, 공간, 시간, 경험, 심리적 요인에 따라 지배적인 색을 분석하고 인지한다. 떄문에 조명이나 카메라의 색상왜곡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색을 손쉽게 읽어내곤 한다. 하지만 이 심하게 왜곡된 사진에서 검정 파랑을 읽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이 사진은 역광 사진이다. 배경이 피사체보다 밝으며 그 명암의 편차도 심한편이다. 심리적으로 이 피사체가 조명색의 영향을 받고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 옷의 명암이 어두운 것은 그림자 속에 있기 때문이라 인지하게 되고, 색이 푸르스름한 것 역시 그 때문이라 생각하게 된다.(그림자 속의 색이 푸른색인 것은 인간의 통념적이자 심리적인 색인식(동일한 명도여도 푸른계열을 더 어둡게 여김)에 의한 클리세적 색온도 설정 중 하나이다.)
본래 흰색인데, 그림자 속에 있기 때문에 푸른색이라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나왔던 카메라의 자동보정 기능 탓일 수도 있겠지만, 검은색 영역에 비해 푸른색 영역에 분포한 노란색 톤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색상이 전혀 없는 무채색인 검정색은 약간의 노란색 톤만 더해져도 금새 노란색 티가 나지만, 푸른색에 노란색톤이 더해지면 그냥 하늘색, 즉 같은 푸른색 톤으로 인지되기 쉽다. 즉 검고푸른 피사체에 노란색 조명을 비추었을 때 검정 영역은 노란색 조명을 영향을 받는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푸른색은 그냥 푸른색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파랑/검정으로 보일만한 심리적 요소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며, 그마저도 존재하는 단서들도 점조직으로 존재하여 서로 연계되지 않아 사전정보 없이 일반적인 추론으로 파랑/검정이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파랑/검정, 흰색/금색 둘 중 하나라면 흰색/금색을 선택하는 빈도수가 높을 수 밖에 없다. 차라리 파랑, 금색으로 보이면 모를까, 파랑 검정으로 보여지기에는 이 사진의 색상 데이터가 주는 단서 폭이 너무 협소하다.
흰색과 금색으로 보여지는 쪽이 더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은 파란색과 검정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예상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이 사진이 흰색/금색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한해 일시적으로 파랑/검정으로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눈을 뜬다거나, 눈을 여러번 깜빡이는 방법 등이 있다.
그렇게 하게 되면 눈에 들어오는 빛의 양이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면 사람의 눈은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빛 정보에 예민하게 되어 명암 구분에 특화된다. 이 경우 명암비의 대조가 커지게 되어 어두운 부분은 더욱 어둡게 보이고, 밝은 부분은 더 밝게 보이게 된다.(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갈 때를 상상해보라)
명암의 대조값이 커지게 되면 밝은 부분에는 큰 상관이 없지만 어두운 부분은 더욱 어둡게 보이게 되면서 그 부분의 색상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게 된다. 옷의 색 중 상대적으로 어두운 부분인 검정영역의 색이 짙어지면서 불분명해지고 노란색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자연스럽게 중간톤의 파란색이 지배적인 색상으로 보여지게 되면서 이 옷은 검정/파랑으로 인지되기가 쉬워진다.
또 한가지의 경우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디스플레이장치 성능의 차이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모니터는 대부분 LCD패널을 사용하는데 제조상의 결점으로 푸르스름한 색상을 띄기 쉽다.
이러한 문제들이 충분히 개선되지 못했던 과거에 출시되었던 모델이나, 중저가형모델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이 경우 사진의 노란색 계통보다 푸른색 계통이 더 부각되어 검정/파랑으로 인지되기 쉬워진다.
사실 LCD모니터의 색표현에는 명확한 기준도 없고 색표현 자체가 처참한 수준인 경우가 워낙 많아, 단지 모니터 때문에 30%의 사람들이 검정/파랑으로 보인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을것 처럼 보인다.
사진 속의 옷은 파란색이 아니다.
일부 기사들의 언급과는 달리
포토샵 제조사인 어도비는 사실 이 옷의 색을 검정/파랑이라 단정지은바 없다.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유색조명에 의한 착시 매커니즘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고, 그 이야기대로라면, 이 옷의 원래 색이 흰색/금색일수도 있고, 검정/파랑 일수도 있다. 그것이 반드시 이 드레스가 검정/파랑이라는데 대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썰이 '누군가가...' '의료 관계자가...'라는 불분명한 출처로 시각세포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잘못된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빛에 예민하여 컬러를 잘 못보게되면 어두운 영역의 노란색을 못보게되어 오히려 더 파랑/검정으로 보여야한다.
또한 푸른색을 흰색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색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것이라면, 그보다 미약한 금색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감색 능력이 문제라면 흰색/검정으로 보여야 한다. 금색을 발견하는데 대해서 오류가 있다.
만약 색상을 구분하는 능력이 뛰어나 모든 심리적인 요인들을 다 무시하고 오직 색상만 볼수 있는 절대색감이라면 오히려 파랑/갈색으로 보여야한다. 갈색을 검은색으로 보는 것이 결코 색에 민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드레스의 색이 검정/파랑으로 보이는 경우는 노란색을 잘 못보는 시각 체계를 가지고 있거나, 어두운 영역에서 색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와는 반대) 모니터의 성능이 좋지 못한 경우 등이다.
그 외에는 어떤 논리를 대입해도 파랑/검정을 추론하기 어렵다.
또한 상당한 다수의 사람들이 이 드레스의 색을 흰색/금색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단순히 이 사진의 옷이 파랑/검정이라 판단 내릴 수 없는 근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옷이 파란색이라는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이유는 이 옷이 파란색이라는 제조사의 발표와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옷이 파랑/검정이라는게 너무나도 명백한 '펙트'여서 거역할 수가 없다.
때문에 언론과 대중은 이 드레스의 색을 어떻게든 파랑/검정으로 만들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농담이지만 흰금충이라는 비하발언까지 생겨나며 검정/파랑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여론까지 생기고 있으며, 흰색/금색을 보는 이들에겐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자책하는 자괴감도 존재하는것 같다.
기자들은 한술 더 뜬다. 확언한적 없는 어도비의 입장을 파랑/검정이라 확정한 것처럼 못 박고, 분명한 출처가 없는 단지 '관계자의 소견'이라는 그럴싸한 용어들을 끌어와 이 옷이 파랑/검정이라 말한다.
이 옷이 파란색이 아니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드레스는 파란색이기 때문이다.
드레스는 파란색이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드레스를 찍은 사진 속에서 드레스는 파란색이 아니다.
사진기의 자동보정 기능의 오류와 역광, 유색조명의 영향 등으로 인해 대게의 사람들에게 흰색과 금색으로 보여지게끔 찍혀졌다.
일부 디스플레이장치의 결함, 시각환경에 따른 명암비 대조변화 등으로 종종 파랑/검정 혹은 파랑/갈색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흰색 금색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이것은 드레스가 파란색인것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또 다른 진실이다.
사실 이 드레스가 파란색이라는 사실은, 사진 속의 이 드레스가 흰색으로 보인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신은
저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우리가 상당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산다.
우리에게 알려진 진실 중 정말로 진실이라서 진실인 진실이 얼마나 될까?
우리에게 너무나도 일상적인 물리법칙과 현상들이 빛의 속도로 달리는 거시세계에서, 전기가 알갱이로 존재하는 미시세계에서 얼마나 비일상적으로 바뀌는지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숨쉴 때 대기중의 분자들이 어떤 화학적 작용으로 체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 숨을 쉬지는 않는다.
하루에 삼시세끼를 먹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근현대에 들어 급격하게 변화된 인간의 생태를 볼 때 하루 세끼가 독이며 대부분의 비만과 그에 따른 합병증, 성인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하루 한끼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며
사람이 육지에서 원숭이로부터 진화했을거라는 당연한 믿음을 깨고 사람은 물 속에서 진화했고, 원숭이보다 돌고래와 더 가까운 친척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지나치게 깔끔한 생활은 오히려 체내 세균 개체들의 밸런스를 무너트리며 아토피 등의 면역질환을 불러온다는 사실도 최근 화자되고 있다.
오빠라는 호칭이 공공연하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채 몇십년이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오빠는 형제 자매, 애인 사이에서만 쓰이거나 화류계여성들이 남자들을 부르는 애칭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여성들은 나이많은 남자들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우리는 그저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일 뿐인, 단지 통념에 지배된 삶을 살고 있지않은가?
드레스 제조업체에서 이 드레스가 파란색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드레스는 파란색이어야한다.
파란색으로 보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얼핏 보면 파란색인것처럼 보이기도 한것 같다.
보다보니 파란색으로 보이는것 같다.
이 드레스가 파란색이라는데 파란색으로 보이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파란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세포의 작용으로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하더라.
사실 확인은 안해봤지만 색으로 정통한 전문업체에서도 저 색이 파란색이라고 하더라.
이 옷이 파란색으로 보이지 않으면,
시각 능력이 덜 떨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상대적인 약자가 되는 것이며, 어디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 받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저 옷이 흰색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인가?
옷 색은 흰색일수도, 파란색일수도 있다.
흰 옷에 푸른 조명이어도, 푸른 옷에 주황 조명이어도 사진의 색은 똑같이 성립된다.
푸른 옷에 주황조명이라는 결론을 두고 논리를 찾아 들어가면 푸른색이고, 흰 옷에 푸른조명이라는 결론을 두고 논리를 전개하면 흰 옷이 된다. 유색조명에 의한 착시는 원래 그런 개념이다.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밀림의 왕자 레오라는 동물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자는 특이하게도 노란색이 아니라 하얀색을 하고 있다. 작가가 레오 캐릭터를 탄생시킬 당시 너무 가난하여 노란 전구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노란 빛 아래에서 노란색인줄 알고 칠했던걸 자연광 아래에서 보니 흰색이었던 것. 본래라면 노란색 사자로 수정되었어야했지만 마감이 급한 나머지 그대로 원고를 넘기고 말았는데,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흰사자 레오다. 흰색이어서 오히려 더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무관한 이야기니 넘어가고 아무튼 아무리 단련된 프로들도 유색조명에 의한 색왜곡을 구분해낼 수 없다는 이야기다. 피카소의 할아버지가 와도 이건 안된다. 구분해내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아무런 단서가 없이도(혹은 위에서 언급한 상황이나 결함 없이도) 그냥 검정/파랑으로 본 사람들에게 혹시 사진만 봐도 그 사람 운명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지는 않는지 물어보고 싶다.
거기다 사람에 따라, 디스플레이 기기에 따라 결과값이 다 다르고
동일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공을 통해 전달되는 빛의 양에 의해 달리 보이기도 하고, 주변 환경의 조도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 이 사진에 무슨수로 정답을 매긴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 옷이 흰색인지 파란색인지는 사실 그렇게 가치 있는 결론도 아니다. 요즘 떠들썩한 딥러닝 기술의 데이터베이스에나 좀 보탬이 될까..
광고나 신나게 해주고 있을뿐. 아무 의미 없다.
하지만 이 드레스의 색깔 논란을 대하는 자세만큼은 유의미해보인다.
너무나도 명백해보이는 자료들, 공신력이 큰 전문가와 브랜드의 논리, 나도 그래 너도 그러니 하는 대중들의 여론까지.
어차피 정답은 없다.
그럴듯해 보이는 저것들은 사실 일개 통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심지어 저들 중 일부는 통념에 지배되는 인간의 습성을 이용해 손익과 권력을 작용시키려는 수작이다.
이 경우 가십성 기사거리로 한몫 하려는 기레기의 낚시질에 지나지 않지만.
경우가 좀 다를 때도 있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이런 사건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대부분 기억하고 있지도 않을것 같지만, 채선당 임산부 폭행 사건이 그랬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다른 식당에서 종업원이 아이에게 뜨거운 국물을 끼얹은 사건도 있었다.
모두가 음식점 직원들을 욕했다.
임산부와 아이는 약자이며, 보호받아야할 존재이며, 그들은 선하고, 비난받아선 안될 존재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은 어떠했나?
박봄의 마약 사건 때는 어떠했나, 소름끼치던 클라라의 문자들은, 홍가혜는 단순한 관종이었나?
60년동안 위법으로 믿겨져 오던 간통죄는 왜 어째서 무죄가 되어버렸는가?
내 트위터 팔로워들 중 누가 알바이고 프락치일지
직장에서, 학교에서 웃으며 만나는 동료 선배 후배들 중 누가 일베벌레일지
오랫만에 연락온 중학교 동창 아름이의 밝은 카톡이 썸일지 다단계일지
우리가 믿고 사는 진실이 정말로 진실이라서 진실인 진실인지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지를 우리는 장담할 수 있는가?
정답은 없다.
우리는 어차피,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미약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차피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거라면
좀 더 믿을 수 있는 것을 믿어야하지 않을까?
이 옷이 파란색이든 빨간색이든, 의료계 관계자가 뭐라하든 체육계 관계자가 뭐라하든, 여자친구가 뭐라하든, 엄마가 뭐라하든,
여자친구는 없으니까 뭐라 말할 수 있을리 없겠지만 아무튼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그냥 두눈을 크게 뜨고 눈 앞을 보아라.
이 옷은 무슨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