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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이세돌 VS 구리
게시물ID : sports_970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샤이나리
추천 : 15
조회수 : 1154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6/02/28 17: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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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이 글은 프로가 쓴 것도, 그렇다고 아마 고수가 쓴 것도 아닌 바둑을 취미로 하는 사람의 글이라서 조금 부정확한 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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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계에선 여러가지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기타니 미노루 VS 오청원, 조훈현 VS 서봉수, 조훈현 VS 녜웨이핑, 조치훈 VS 고바야시 고이치. 이창호 VS 마샤오춘, 이창호 VS 유창혁. 

그러나 바둑 매니아 중에 "바둑계에서 가장 뚜렷한 라이벌은 누구인가요?" 라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이세돌과 구리를 꼽을 겁니다. 과연 이세돌과 구리의 대결이 어떻길래 만날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킬까요? 

둘의 프로필


몽백합.jpg

<이세돌. 제 2회 몽백합배 결승, VS 커제 4국에서 찍힌 사진이다.>

사실상 설명이 필요 없는 기사입니다. 정말 유명하고, 제가 그동만 많이 소개해온 기사입니다. 

63144762_3_59_20140430110704.jpg
<구리. 여담으로 바둑판에 돌이 평평해 보일텐데. 중국 돌은 한쪽면이 평평합니다.>

중국 기사입니다. 바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많이 알 기사이지만 거의 모르는 사람은 거의 모를 거라 생각되네요. 비록 세계 대회 우승 횟수는 이세돌보다 현저히 적지만 둘의 상대전적은 50:50으로 이세돌이 앞섰다가, 구리가 앞섰다가 앞치락 뒤치락 합니다. 

둘의 기묘의 한 인연?

어떤 사람들은 둘은 태어났을 때부터 라이벌이 될 운명이었다고 합니다. 

구리는 1983년 2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이세돌은 같은 년 한 달 뒤, 3월 2일 생입니다. 정말 태어날 때부터 상극이었던 셈이죠. 

심지어 입단한 해도 1995년으로 똑같은 해에 입단했습니다. 

더욱 기구한 것은 두 사람 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그 후에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다는 겁니다. 이세돌은 KBS 아침 마당에서 "아버지 생전에 타이틀 하나 못 딴게 너무나도 한이 됐다." 라고 말한 적 있고, 구리는 "어릴 땐 참 양아치짓 많이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너무 한이 됐다. 그래서 첫 타이틀을 땄을 때, 아버지 산소에 가, 그 앞에서 그 기보를 태웠다." 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왜 그렇게 둘의 대결은 주목을 받는가?

물론 둘이 아무리 기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정작 둘의 대국이 졸작이면 관심을 안 가져겠죠.

1.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기사

이세돌이야 이창호 이후의 최고한 기사라고 평가 받으니, 당시 한국의 대표라고 해도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몇 없을 겁니다. 

구리고 이세돌을 제 9회 삼성화재배에서 만나기 전까지 번기 (여러번 두는 대국. 3판 2선승제는 3번기. 5판 3선승제는 5번기) 승부에선 한번도 지지 않을 정도로 절대 강자 포스를 풍겼습니다. 당연히 한국 랭킹 1위와 중국 랭킹 1위의 대국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겠죠. 실질적으로 한국 랭킹 1위로 불리는 이세돌 (당시 한국 랭킹 3위)과 중국 랭킹 1위 커제의 몽백합배 결승이 엄청난 주목을 받았던 것처럼요.

2. 둘의 전투적인 기풍. 그리고 둘이 가지는 약점. 

사실 중국 대표하고, 한국 대표라는 이유로 이목을 끌 수 있다면, 한때 이창호 만큼이나 절대 강자 포스를 풍겼던 콩지에와 이세돌의 대국도 엄청나게 이목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콩지에는 이창호와 같은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엄청 두텁고 침착하게 두는 스타일이죠. 

이세돌과 콩지에의 대국 일정이 잡히면 창과 방패의 대국이라면서 양국의 이목이 집중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것 뿐이었죠. 역시 이세돌의 라이벌은 구리이다라는 정도의 임팩트를 주진 못 했습니다. 

둘의 대국이 이목을 끄는 이유는 바로 두 사람의 매우 전투적인 기풍. 그것도 두 사람의 절대적으로 강한 부분인 중반 전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세돌의 전투적인 기풍은 앞도적으로 강한 수읽기 능력과 상대이 약점만 보이면 수시로 찔러대는 도발과 잽, 그리고 불리하면 수순을 비틀거나 잔수 (프로도 까딱하다가 잘못 받을 수 있는 수)들을 날려서 실수를 유도하는 흔들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특히 중반전은 워낙 환상적인 공격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중국 프로들에게 "중반 13단" 이라고 불립니다.

구리의 전투적인 기풍은 세계 최강의 포석 감각과 판 전체를 넓게 보는 능력이 어울려져 강력한 공격력을 기반으로 하죠.

신기하게도 닮은 꼴 기풍인 둘이지만 정반대의 약점을 가졌습니다.

이세돌은 이창호만큼은 아니지만 끝내기에서 엄청난 강함을 보입니다. 그러나 포석 부분에서 만큼은 다른 부분보다 약하다라는 평을 받죠. 그래서 포석에서 밀리는 편이 많은 편이며 그걸 특유의 중반전으로 역전으로 이끕니다.

구리는 상술했듯이 세계 최강의 포석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계속 강수 일변도로 일관하다가 끝내기에서 역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끝내기에서 취약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세계최강의 아마추어' 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죠.

포석에 약하지만 끝내기에 강한 이세돌. 포석엔 강하지만 끝내기엔 약한 구리. 포석에서 뒤쳐진걸 중반전에서 만회 해야하는 이세돌과 끝내기까지 가지 않기 위해 중반전에서 격차를 벌려야 하는 구리의 생각이 겹쳐서, 중반에서 피튀기는 전투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전투를 좋아하는 아마추어는 물론 두 사람의 깊은 수읽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프로까지, 이 둘의 대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죠.

서로의 대한 생각은? 

이세돌은 2012년 삼성화재배 우승자 특집에서 "언젠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싶지만, 내가 이긴 날에는 내가 이야기 꺼내긴 그렇고, 내가 진 날에는 구리가 이야기 꺼내긴 그렇고..." 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구리는 직접 http://news.donga.com/3/all/20140430/63142242/1 동아일보랑 인터뷰에서 “하늘이 내게 보내준 바둑 인생의 보물” 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12년 12월 말 상하이(上海)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이세돌에게 지고도 기자회견장에 나와 축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둑에서 지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세계대회 우승을 결정짓는 시합은 더 그렇다. 다만 바둑 세계에는 승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합을 통해 승부 이외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이세돌은 바둑판에서는 경쟁 상대지만, 바둑판 밖에서는 친구다. 당시 이세돌이 더 좋은 기회를 잡았다. 그래서 시합 뒤 나는 충심으로 (이세돌의 승리를) 기쁘게 생각했다.”


둘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둘의 대결들...

둘의 첫 대국은 2004 중국갑조리그 9라운드 였습니다. 

당시 이세돌은 이기면 돈을 많이 받고, 지면 돈을 한 푼도 안 받는 패기 넘치는 계약으로 화재를 모았었죠. 그러나 주장으로 뛰었음에도 연패를 하는 등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진 못 했습니다. 

그러나 구리는 당시 갑조리그에서 연승을 하고 있어서 엄청난 기세를 타고 있었죠.

연패는 하고 싶지 않은 이세돌과 이대로 기세를 타고 싶은 구리의 질 수 없는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첫 대국은 구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게 이세돌은 복수의 칼을 갈게 되죠, 그리고 그 칼을 시험할 날은 빨리 왔습니다. 바로 같은 해에 벌어진 제 9회 삼섬화재배 준결승전이었습니다. 

구리는 당시엔 번기 승부에선 져본 적이 없었고, 이세돌도 중국인을 상대로 결승 승부에선 진 적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당시 4강 전에 올라갔던 사람 중 3명이 중국인이었고, 한국인은 오직 이세돌이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구리가 일찍 끝내주길 바랬습니다. 거기에다 다른 중국인 두 명은 구리보다 아래라고 평가 받았기 때문에 실질적 결승전은 이세돌 VS 구리였죠.

결과는 이세돌의 2:1 승리였습니다. 결국 구리의 번기 승부 전승 기록은 무너졌고, 이세돌은 구리와의 첫 큰 승부에서 승리를 차지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이세돌은 그 기세를 타, 결승에 올라온 왕시를 2:0으로 가볍게 누르고 우승을 차지 합니다.

그렇게 둘은 크고 작은 대국을 (이 중 LG배는 이세돌이 결승전에서 중국인에게 첫 패한 사건이 됐다) 벌이다가, 이세돌에게 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그 유명한 이세돌 휴직 사건입니다. 

사실 이세돌이 워낙 파격적인 행보를 벌인 기사이기에 한국 기원과의 충돌이 몇 번 있었습니다. (바둑판 싸인 문제, 시상식 불참 사건) 그러다가 제대로 터진게 바로 기보 저작권와 이세돌 한국 리그 불참 선언입니다. 결국 기사회는 조훈현의 주도로 이세돌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세돌은 아주 빡쳐서 휴직계를 냈죠. 

이세돌은 휴직계를 내고 구리와의 마지막 대국으로 봉황성고성 특별 대국을 벌이게 됩니다. 봉황고성 대국은 특이하게도 바둑판으로 두는 것이 아닌, 마당 하나를 바둑으로 삼고,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 흑돌,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백돌 역활을 하는 대국이죠. 그리고 이 대국의 승자는 이세돌이었죠.

신기하게도 이세돌이 휴직을 하자, 구리도 하향세를 그렸다는 겁니다. 구리는 이때에 대해 "이세돌이 없어지니까, 내 목표가 사라진 거 같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세돌이 반년 후에 복귀를 하자, 구리의 성적도 같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둘은 BC 카드배 결승에서 바로 만나게 되죠. 이 BC 카드배 5번기는 이세돌의 3:2 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 즈음에 슬슬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10번기... 그 많은 대국 수 만큼 서로의 모든걸 쏟아내야 하는 승부이죠. 그러나 10번기는 정작 스폰서가 없어서 이뤄지지 못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2 삼성화재배가 열리게 되죠.

삼성화재배의 32강전은 더블 일리미네이션입니다. 3~4 명의 조에서 상위 2명이 올라가는 형식이죠. 2012 삼성화재배는 3명이 한 조였습니다. 그리고 이세돌이 속한 조는 구리. 일본의 장쉬가 있었죠. 셋 다 세계구급 기사였기에 다른 사람들은 죽음의 조라고 불렀습니다. 

이세돌과 구리의 대국. 그런데 엄청난 이변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바로 세계 최초의 3패빅 (빅은 두가지 의미가 있음. 하나는 사활에서 서로를 서로 잡으로 갈 수 없어, 둘 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형태. 하나는 바둑이 아주 무승부가 되는 것. 지금 의미는 후자)이 일어나 무승부가 난 겁니다. 결국 둘은 비공식 속기전을 다시 벌여서 구리가 승자가 됐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변이라 불리텐데, 더욱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세돌 VS 구리의 결승전이 성사된 것이죠. 

이 결승 3번기는 1국 이세돌의 반 집. 2국 구리의 불계승, 3국 이세돌의 또 반 집승으로 이세돌이 2:1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걸 본 구리 팬이었던 니장건이 "비록 경기는 이세돌이 이겼지만 내용 면에선 구리가 앞섰다." 라는 말을 하면서 둘이 제대로 붙어보라며 10번기의 후원을 자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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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대결. 이세돌 VS 구리 10번기>

많은 팬들을 설레게 한 10번기가 개최됐습니다. 상금만 8억 9000천 정도. 패자에겐 그저 여행 경비인 3000만원 뿐. 

1국 이세돌 승

2국 이세돌 승

3국 구리 승

4국 구리 승

5국 이세돌 승

6국 이세돌 승

7국 이세돌 승

8국 이세돌 승

즉 6:2로 이세돌이 승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세기의 대결은 이세돌의 승리로 끝납니다.

특히 8국에선 이미 무승부 아니면 패배가 결정된 구리가 심경에 큰 무리가 있었는지, 포석에서부터 이세돌에게 밀리는 걸 보실 수 있었습니다. 이세돌도 끝내기에서 구리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인터뷰에서 "이 대결이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허무한 감도 있더라"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끝내면서 

이세돌의 팬이자, 구리의 팬으로서 둘의 대국은 항상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뒤에도 둘과 같은 치열한 바둑을 보여줄 수 있는 라이벌이 생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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