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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제국(Evil Empire) : 숙명 #Chapter 3
게시물ID : readers_97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chthexen
추천 : 0
조회수 : 33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29 00:19:57
글에 들어가기전에 앞서, 별 볼것 없는 글인데 관심 가져주시고 제게 조언 주신 어느 분꼐 감사드립니다. (직접적인 닉 언급은 피하겠습니다)

제가 그 글을 좀 더 일찍 봤어야 하는건데 지금 확인했네요.. 조언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썼기때문에

전에 지적하셨던 단점들이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글을 읽는데 불편하게 느껴지신다면 미리 양해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제서야 조언을 반영한다고 하면 많이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이라도 조언을 대폭 받아들여 제가 조금이나마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모로,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Chapter 3


루이번 왕국이 핏빛 가득한 화산재와 용암에 의해서 공허한 잿더미로 한창 변모할 무렵, 선택받아야 할 또 다른 필멸자 무리들이 그 존재’들로부터 수여받게 될, 필연적 심판을 위해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깊이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어쩌면, 자의적인 것이 아닌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임이 자명했다. 그것은 모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향락에 심취하여, 크루이드 왕국 시민들은 내부적으로 정신적 혼란을 끊임 없이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찌됐든, 어떤 이가 보기에, 그들은 비록 또 다른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될 지 모를 가엾은 필멸자 무리들에 불과했으나, 언뜻 살펴보기에도 루이번 왕국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고상함을 한껏 발산해내고 있었기에, 조금은 그들의 행보를 관조하며 지켜볼 필요는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롭다고 할 만한 점은, 크루이드 왕국의 도시 곳곳에는, 페로민(Pheromine)이라고 불리우는 금기의 약초가 합법적으로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약초를 정제하면, 형용할 수 없는 환락과 함꼐, 대상은 급속도로 타락화가 이루어졌기에, 과거로부터 대부분의 필멸자들은 이를 두고 악마의 축복, 혹은 신의 저주라 여기며, 철저히 금기시해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이드의 필멸자들은 이를 과분할 정도로 악용하여, 그 성스러운 댓가로 모두가 조금씩의 타락자 기질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크루이드 왕국은, 관습적으로 마법을 숭상하고 다루는 것을 중요시해왔으며, 그들의 후천적인 타락자 기질에 기반하여 유독 세기의 사악한 마법사들을 배출해낸 사례가 많았었다. 그러한 사실을 유실히 증명하듯, 왕국 휘하 대부분의 시설이나 기술들은 순수히 마법으로만 이룩해낸 위대한 산물과도 같았으며, 왕국의 고위 관료층은 모두가 뛰어난 역량을 갖춘 최상위 마법사들이기도 했다.
 
한편, 크루이드 왕국의 궁전. 많은 수의 왕국 시민들과 귀족들이 함꼐 국왕의 성소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같이 모두가 국왕의 연설을 듣기 위함이었으나, 무엇이 되었든 결국, 연설의 본질적인 내막은 그리 좋지 않은 쪽일 것임엔 분명했다. 아니, 그들은 사실상 속으론 이미 완벽히 확신하고 있었다.
 
 
“...

국왕이 근엄한 태도로 연설장 아래를 숙연히 굽어보았다. 무언가 중대한 선고라도 받는 듯, 모두들 엄숙한 표정이 역력했다.


“준비됐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국왕이시여.

“나 역시, 준비됐네.

크루이드 왕국의 데키몬드 국왕은 그의 인자한 자태와는 다르게, 보기 드문 공포의 군주로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사악함으로 논할 것 같으면, 많은 창조교 신자들이 그의 이름만 듣고도 구역질을 하고 경멸의 눈초리를 쏘아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였다. 그 예로, 그가 여지껏 자행해왔던 수 많은 악행들을 살펴보건대, 그가 한 명의 악인(惡人)으로서, 또 하나의 열렬한 악마교 신자로서, 얼마나 충실히 그 교리를 이행해왔음을 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대대로 칭송받아 마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었다.


“나의 순교자들이여..! 나의 거룩한 선조가 이 대지에 왕국을 선포한 이래로.. 우리는, 지난 영겁의 세월동안 순수한 쾌락과 본연의 욕망을 쫒기 위해 삶의 전부를 바치며 진실로 갈구해왔소. 우리는 여기서, ‘그 분’들의 교리를 따르며 영광스런 나날을 영위할 수 있었소. 그러나..

국왕은, 연설장에 모인 그의 가신들과 순교자들이 그를, 조금은 다소 막연한 심정으로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데키몬드 폐하.
 
그의 책사, 테번(Tevurn)이 데키몬드 국왕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언가, 중대한 사안을 귀띔해주기라도 할 듯, 무척이나 그윽한 눈길이였다.
 

“무슨 일이오?
 
“루이번 왕국으로부터, 놀랄 만한 첩보가 수신되었습니다.
 
“내게만 긴밀히 이야기해보라.
 
“루이번 왕국의 테메토스 국왕이 실종되고, 그의 가신들은 모두 살해당했답니다. 수뇌부는 순식간에 마비되고, 도시들은 통제 불능의 혼란에 빠졌다고 하는군요.
 
“흥미롭군. 그래, 어떤 자들의 소행이지?
 
“루이번 왕국 전역이 화산재로 뒤덮여, 구체적인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사태가 보다 조금 진정되면, 속히 그 실체가 밝혀질 지도 모르지요.
 
“나는, 오래 전 부터 그 간사한 족속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네. 겉으론 숭고한 신념을 조장하면서, 정작 그들이 벌인 짓거리란 가소롭기 그지없었지.. 심지어 그들이, 누군가의 발언에 의해 이교도라는 불명예를 얻는다고 해도, 전혀 괴이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네. 그들의 행동에는.. 전혀 반론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말일세.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그 분’들이 친히 그 댓가를 치루고 간 것임이 분명하네.

“폐하, 지금 그 분’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순간, 데키몬드 국왕의 뇌리가 번뜩이며, 이어서 그는 문득, 그들이 필연적으로 맞게 될 어떤 중대한 과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재차 연설을 계속했다.


“그대들 앞에서, 한 가지.. 한 가지 밝히고자 할 것이 있다네.

“...

“루이번 왕국이 방금 전, 자멸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알고 있었는가?

조금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비록, 모두들 루이번 왕국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심이 내면 깊이 박혀있었다 한들, 그들이 비난하는 그 족속들은 자신들의 군세와 견주어봤을 때, 결코 멸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예컨대, 넘볼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일순간에 그 구심점을 잃고 덧없이 무너져버린 셈이었으니.. 그리하여, 그들은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 국왕의 발언에 대해서도.. 조금은 의아할 수 밖에 없을 노릇이었다.


“루이번 왕국이 왜 파멸로 치닫게 되었는지..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전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중대한 사실을 알고 있다네.

국왕이 신중한 어조로, 그의 앞에 서 있는 이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덧붙이자, 연설장에 모인 수 많은 이들이, 국왕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리가 숭배하는 그 분’들을 따라서 받들게 된 것은 순전히, 부패할대로 부패한 창조교 놈들을 향해 반발할 목적만은 아니었다는 것이야. 그들은 순수한 악(惡)에 대해 끊임없이 동경하고 갈망하고자 했던 우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놈들이었지. 그들은 매우 교만하게도, 영생과 같은 절대적인 힘을 얻고자 했다네. 그래서, 그들은.. 종국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 분’들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었지.

“무슨 의미입니까?

데키몬드의 책사인 케인이 그를 향해 의아한 물음을 던졌다.


“고대 성서의 구절을 인용하자면, 이렇게 적혀 있었다네. 악(惡)에 대해 관여하는 지옥의 절대자들을 섣불리 숭배하려고 들지 말라. 그리고, 그 존재들은 보잘것없는 필멸자 따위가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필히 자각하라. 그 존재들이 내뿜은 휘황찬란함에, 나약한 필멸자들의 정신력따윈 가볍게 압도당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존재들과 마주한 모든 필멸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의 불순한 축복을 세례받을 수 있음을 반드시 유념할지어다.’. 어찌 보면, 매우 심오한 구절이지. 물론, 이 것은 그저..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네.

“흥미롭군요. 계속 말씀하시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숭배하는 그 분’들은 전적으로 우리의 정신력과 적응력에 관한 척도를 시험하시려는 것일거라 생각하네. 나약하고 쓸모없는 필멸자들에겐, 그들 스스로의 과분한 욕심에 대해서 저주를 내리시고, 반면 그들의 황홀한 정기를 받아내고도 버틸 수 있는 강인한 필멸자들에게는.. 모든 이들이 갈망하는 그 무엇보다도 유의미한 축복을 부여하시는 것이지. 그런데, 루이번 왕국의 무지한 필멸자들은.. 이 사실을 끝끝내 알아채지 못했어. 그 썩어빠진 이단자 놈들은, 신념이라는 막연한 것에 의지하고 있었을 뿐, 그들 스스로의 정신을 계몽시키려는 노력 따윈, 차마 시도하려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게야. 그런 도중에도, 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절대자들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 난 그 무지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지금 쯤 그 분들의 저주에 휘말려 결국엔 모두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거라 생각하네. 혹은, 그보다 더한 비참한 운명을 견뎌내고 있다던가 말일세.

모두가, 조금은 그의 말에 납득하는 듯한 표정을 자아냈다.


“확실한 건, 그 분’들은.. 창조교 놈들이 권태롭게 내세우고 다니는 신념보다도, 결정적으로 무언가 더 위대하고 숭고한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일세.

“친히 그 분’들이 우리를 구원해주시기를..

“나약한 순교자여, 그 행동을 두고 우리는 그것이 진실로 오만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분’에 대한 신념’은,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이네. 반드시 뒤따라야 할 의무이자, 거부할 수 없는 사명이란 말일세. 그 분들꼐서 이제 곧, 세계를 잠식하고 먹어치울 것이야. 우리는, 그저 그 분’들이 벌이고자 하는 계획의 일부가 되어 필멸자의 숙명을 초월한 절대적인 힘을 영위하는 것이라네. 다만, 어리석고 우둔하기 이를 데 없는 어떤 자들은, 그 분’들의 위대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 그러나 예컨대, 그 분’들은 루이번 왕국을 멸함으로서 믿을 수 없는 한 차례의 이변을, 우리들에게 친히 보여주셨다네. 게다가, 스스로에게 주어진 숙명을 거부하고 끝끝내 반(反)하려고 들었던 자들의 소리 없는 종언이란,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것인지까지도 말일세.

“맹세하건대, 그 분’들의 시련을 버텨낼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야심이 분에 넘치는구나. 그대의 포부에.. 조금은 찬사를 보내는 바이네.

국왕의 연설이 희미하게나마, 순교자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와닿는 듯 했다. 그것은, 단언컨대 그들이 추종하는 그 존재’들이.. 이들의 소소한 추론을 듣고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연설장 한 가운데로부터,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신도 한 명이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키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회의장에선 순식간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나 싶더니, 다행히도 이내 진정되었다. 국왕이, 당황스러운 기색조차 없이 근위병들을 가리키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신도를 도살하라는 손짓을 취하자, 순식간에 그 가엾은 신도는 근위병들이 쏜 플라즈마 라이플에 의해, 단지 한 줌의 잿더미로 변모하였다. 사실, 언뜻 보기에 잔혹해보일 수도 있을 법한 이 현상은, 막상 회고해보면 그다지 드문 일만도 아니었다. 정신력이, 악마들의 축복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필멸자들은, 그 축복을 다 받기도 전에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괴기한 양상으로 변이되는 것이 그들의 태생적 운명이기 때문에, 그리 기이하게 여길만한 소지도 없었다. 운이 좋게도 마침, 그들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마치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듯, 묵묵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게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리 놀랄 일은 아니군. 항상 있는 일이지.

“하지만, 최근에 이런 현상이 유독 잦아졌다는 것에 관해선, 별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무언가, 보다 신중히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약한 자는 어쩔 수 없이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세. 우리가 받드는 그 분’들이 부여한 태고의 숙명이기도 하고 말이네. 그러니, 감히 이를 거부하거나 저항할 생각은 말게.

매번 그래왔던 것 처럼, 이번에도 그들은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들로서는, 이 괴이한 현상에 대해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고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고 기술하는 것이 어쩌면, 조금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그게 무엇을 의미하고, 또 암시하는 것일지는.. 여전히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그저, 시간의 안일한 흐름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있어선, 최고의 해결책이 될 것임엔,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단지, 그들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투여하게 될 약간의 페로민 주사와 함꼐 말이다.


한 편, 루이번 왕국의 수도는 악(惡)의 화신과 그를 따르는 사악한 무리들이 배회하는 죽음의 땅으로 변모한지도 까마득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악마들의 집정관 에이든은, 과거 테메토스 국왕이 앉아 담론을 나누곤 했던 그의 은백색 왕좌에 앉아 차분히 안락을 취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하수인들은 한창 도시를 약탈하고 방화하는데 여념이 없었기에, 그의 곁은 결국 류자크를 비롯한 극소수의 상위 악마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보좌하게 됨으로서,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지긋지긋한 따분함을 그들은 가까스로 견뎌내고 있던 찰나였다.


“우리도 왕국의 진귀한 보물들을 노략질하며 사치를 즐기고 싶습니다만.. 대체, 왜 이런 답답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신 곁을 조력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군요.

유난히 에이든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류자크가, 다소 조심스레 그의 따분함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에이든을 향해 너무나도 담담한 태도로 불만을 표출하는 그를 향해서.. 조금은 냉소적인 시선이 오갔다. 그 중 하나는, 그의 안위를 곁에서 내심 우려하고 있던 상위 악마들의 시선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그의 가소로운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에이든의 시선이었다.   


“간단하네. 난 네 놈을 지배하는 권력자이고, 네 놈은 내게 헌신해야만 할 의무를 지닌 하수인 따위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당신의 처사는 부당합니다. 한 번만 더 분별없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가는, 도리어 당신의 무능함이 드러날 지도 모릅니다.

류자크의 반발은, 에이든이 선견했던 것 보다 몇 배는 더 거셌다. 그러나 에이든은 주저하지 않고 꿋꿋히 담론을 계속했다.


“네 놈의 지령을 따르는 하관들이, 아마도 왕국의 온갖 진귀한 물건을 무척이나 많이 약탈해올 것이다. 그렇지 않나?

“절 농락할 생각이라면, 이 쯤에서 그만두시지요. 당신에게 빛진 죗값은 여지껏 당신이 제게 행한 가혹한 처사들로서 모두 청산되었습니다. 당신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겠지요? 지난 날 제게만 유독 가혹하게 굴며 행했던 그 악독한 짓거리들 말입니다.

“물론, 네 놈이 심려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선명히 기억하고 있지. 내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짜릿한 경험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류자크, 네 놈은.. 내가 알기로는 왕국의 전리품들이 전부터 탐났었다며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온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사실인가?

“...

에이든은 그가 진정,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정확히 눈치채고 있기라도 한 듯, 그의 목소리엔 여느 때 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약탈해온 전리품들 중, 절반 이상이 네 놈의 것이다. 그저 잠자코 기다렸다가, 결국 때가 되어 그들이 약탈해온 것들을 닥치는 대로 빼앗으면 될 일이 아닌가? 그게 네 놈이 가장 유능히 수행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유일한 특기였기도 했고 말이야.

“좋습니다.

류자크가 사악하고도 졸렬한 웃음을 자아내며, 곧 전보다 한층 더 여유있는 태도를 취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약간의 인내와 절제 뿐이었다.


다른 한 편, 루이번 왕국의 도시 곳곳에서는 눈 뜨곤 도저히 볼 수 없는 잔혹한 악행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마치 수렵 시즌을 노리고 찾아와, 무고한 사냥감을 쫒을 노련한 사냥꾼들이 한데 모여 벌이는, 하나의 소란스런 축제처럼 느껴질 법도 했다. 아니, 어쩌면 적어도.. 살육과 노략이 본능과도 같은 그들로서는, 이보다 더 환희로운 순간으로 말하자면 그 어떤 것들과도 감히 비견할 수 없을 정도라 칭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업보는, 그저 본능에 정신을 맡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함으로서, 내면으로부터 폭발하는 거대한 증오심과 폭력성을 상쇄하고, 끊임 없이 불타오르는 그들의 갈증과 탐욕을 잠시나마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시간은 맥없이 흘러가고, 이젠 어느 누구도 그들의 위대한 행렬을 가로막을 순 없게 되었다.


“도시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하라! 나약한 필멸자들은 뼛속까지 타락시켜 우리의 성스러운 발바닥을 핥는 노예로 명예롭게 개종시켜라..!

“우리.. 아니, 사이몬 로드를 위하여! 으하하하!

상급 악마, 크로노스(Cronos)가 데스메이커를 비롯한 소수의 권력자들과 함꼐 사이몬 로드 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데스메이커는, 도시가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겉으론 흐뭇해하면서도, 하찮은 필멸자들을 끝끝내 살려두는 크로노스의 지시에 관해서 속으론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저 쓸모없는 인간 놈들을 갈갈히 찢어 도륙내지 않고는, 도저히 내 분이 차지 않을 것 같아. 어서, 비명밖에 지를 줄 모르는 저 무지한 놈들을 없애버리게.

“이번 임무에서, 필멸자들을 살려두기로 한 것은 집정관이 내린 특별 지령이다. 유감스럽게도, 벌써 잊었나 보군. 네 놈은 복종과 죽음 중 후자를 택할 심산인가? 그의 명령을 거부하면 기어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지금껏 네 놈도 질리도록 봐왔지 않았는가?

크로노스가 제법 진지한 어조로 그를 향해 나지막히 물었다. 어쩐지, 무언가 평소의 그 답지 않은 의아스런 태도였다.


“제기랄, 그 풋내기 집정관 놈은 대체 왜 그런 가당치도 않은 명령을 내린건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군.

“시끄럽다. 저 보잘것없는 필멸자들을 신경쓰기보다, 먼저 네 놈의 안위부터 조심해야 할 거야. 난 지금 제 정신이 아니거든. 찰나의 순간, 네 놈의 육신을 토막내고 으스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란 얘기다. 알아듣겠나? 괜한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네놈의 그 잘난 입을 아껴 두는 것이 좋을게야. 게다가.. 네 놈의 처지가 어떻든, 내가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그럴듯한 이유도 없고 말이지.

크로노스는, 여지껏 헛된 불평만 잔뜩 늘어놓곤 했던 데스메이커가 어째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데스메이커는 이 임무에 전혀 도움이 될 만한 것 따윈 없었다. 예컨대, 그가 임무 수행 도중, 수시로 독단적인 행동을 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도리어 큰 어려움에 봉착했던 때가 훨씬 많았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명망 높은 관료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지조가 상당히 결여된 인물이었다.


“독재관, 크로노스여.

“누가 나를 호출하였는가?

몇 명의 사신(Reaper)무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크로노스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는, 보나 마나 집정관으로부터 또 다른 중대한 지령이 도착한 신호임이 분명했다.


“우리의 집정관이, 이제 당신의 임무를 그만두고 속히 루이번 왕국의 수도로 복귀하라고 명하였소.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필멸자들이, 그들의 숙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안식처를 찾기 위해 도시로부터 달아나고 있음을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그들을 포로로 잡아 즉시 노예로 개종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우리에게 적의를 품고 반기를 들려 할걸세.

사신 중, 하나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곤 고개를 나지막히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에겐 이미 그런 보잘것없는 문제점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또 다른 대안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점은 특별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집정관꼐서, 당신의 심복들과 하수인들은 이 곳에 남기고 오라고 말씀하셨소.

“그래도 어딘가 꺼림칙하군. 또, 아쉽기도 하고 말일세. 사실, 나는 이 곳에서 요 며칠 간, 편히 안식을 취하며, 혼돈으로 가득찬 이 미친 살육의 현장을.. 그저 여유롭게 지켜보길 원하던 바였지. 마음 같아선, 나의 분에 넘치는 광기에 몸을 맡겨, 이 추잡스러운 필멸자들을 도륙내고 싶긴 하나, 또 한편으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조금은 힘을 아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네.

크로노스가 그의 말에 조금은 힘을 주며 당당한 태도로 회답을 건넸다.


“그 판단은 가히 현명한 선택이었소, 크로노스.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항상 충동적인 광기에 가득 차 있어서, 행여나 임무 도중 불화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며 우리들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오. 그렇지만, 그대의 확답을 듣고 나니, 이제는 마음이 놓이는구려. 덕분에, 우리의 집정관을 볼 면목이 다행히 조금은 생긴 것 같소.

사신들의 우려대로, 크로노스는 항상 통제 불능의 광기에 깊숙히 잠식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크로노스가 지닌 본연의 모습대로라면, 그는 가장 먼저 앞장서서 필멸자들을 살육하고 미친듯이 날뛰어야 했음이 진실로 옳았다. 그는 비록, 가까스로 달아나려는 정신을 부여잡고는, 애써 그에게 부여된 지령을 별 탈 없이 따르기는 했지만, 과연 그것이 단순히 집정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혹은 하찮은 존재들에 대한 뿌리깊은 환멸감 때문이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데스메이커, 우린 지금 당장 수도로 귀환해야겠다.

“날 여러모로 귀찮게 하는군..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일입니까?

“금방 도착한 집정관의 새로운 지령이다. 육신이 수 천 갈래로 갈갈이 찢겨 처참한 몰골로 죽고 싶지 않다면, 장담하건대 어서 이 곳을 떠날 채비를 마치는 것이, 네 놈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 될 게야. 그래도 상관없다면야, 끝까지 여기에 남아서 이 환희로운 축제를 계속 지켜봐도 좋아. 이해했나? 그럼, 나머지 선택은 전적으로 네 놈에게 맡기겠다.

크로노스가 데스메이커를 대수롭지 않은 듯이 흘겨보며 말했다.


“거론할 필요도 없는 문제로군요. 당신을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 사실을 네 놈의 동료들에게도 똑똑히 전하도록 해라. 여기엔, 우리의 심복들만 남기고 떠나도록 하겠다. 아, 그리고.. 내가 정신이 없으려니, 미처 중요한 걸 빼먹을 뻔 했군! 우리가 약탈한 물품은 준비된 수송용 차량에 싣고 이동한다. 알겠나?

명령이 떨어지자, 데스메이커를 비롯한 상위 악마들은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수도로 귀환할 각오를 마치는 데엔, 언제나처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채비를 마친 후, 그들은 수도를 향해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온갖 진귀하고 호화로운 보배들이 가득 담긴 수송용 차량과 함꼐 말이다. 그들의 모습은 그 모두가 한결같이, 전쟁에 압승하여 성대한 개선식을 치르는, 명예로운 전사들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자,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집정관을 즐겁게 해줄 희소식을 가지고, 그가 머물고 있는 루이번 왕국의 궁전에 무사히 당도했다.


“독재관, 크로노스.

집정관, 에이든이 은근한 어조로 크로노스를 지명했다.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돌아온 모두가, 조금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보고하도록.

에이든은 아까보다 한결 더 엄격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어느새 몇 배는 더 무겁고 음침해져 있었다.


“임무 도중 민간인과 약간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끝내, 우리의 선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곤, 가소롭게도 군수 창고를 향해 바삐 달아나더군요. 구식 무기로나마 무장을 마친 몇몇의 무리가 우리의 군단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받은 댓가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 차가운 육신과 우리의 굶주림을 조금이나마 만족시켜줄 몇 가닥의 영혼 조각이 전부였지요. 끝끝내 우리의 군단에 저항한 무지한 필멸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모두가 우리의 손길에 완벽히 개종당했습니다.

“훌륭하군.

에이든이 크로노스를 향해 흡족한 웃음을 자아냈다.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류자크는, 그런 그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듯, 불쾌한 의사를 표출했다.

 
“이봐.. 크로노스, 필멸자 놈들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은 어디 있는겐가? 지금 당장 이 곳으로 가져오도록 하는게 좋을게야.

“집정관으로부터 그런 지령은 전에 받은 바가 없었지. 이제 와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군. 게다가, 네 놈은 나와 동등한 위치인 독재관이 아니던가? 분명히 밝히건대, 나와 네 놈 사이엔 암묵적으로라도 확실히 규명해야 할 선이란게 있다네. 그건, 네 놈이 함부로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것이야.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일세.

크로노스가 류자크를 어쩐지 미심쩍은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류자크의 표정엔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의 집정관이시여. 전에 저와 했던 거래는 어떻게 된 겁니까? 전에 논의했던 조건들이 저 아둔한 놈에게 제대로 수령되지 않기라도 했던 겝니까? 그래.. 맞아, 저 놈은 지금 탐욕에 눈이 멀어 거짓 공작을 펼치고 있음이 분명하군요. 나의 위대한 집정관, 에이든이시여. 바라옵건대, 저 가증스런 놈을 벌해주시길 진심으로 간청하는 바입니다.

“나 역시도, 크로노스의 견해에 전적으로 확신을 느끼고 있다. 류자크, 네 놈에게 전리품을 수령한다는 얘기는 전에 논의한 적이 없었지.

류자크가 느끼기에, 에이든의 그런 발언은 뜻밖이었다. 그가 가졌던 허황된 기대는 일순간 산산히 무너졌다.


“..원통할 노릇이군. 그럼, 전에 제 앞에서 논의했던 것들은 대체..

“그건, 네 놈이 크로노스로부터 전리품을 빼앗을 수 있을 거란 분명한 전제 하에 성립 가능했던 사항이었지. 네 놈이 크로노스와 우열을 겨뤄 그로부터 전리품들을 탈취해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더라도 딱히 문제될 건 없다네. 아.. 그래, 행여나 네 놈이 후일에 또 물의로 삼을까봐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게 있는데, 첨언하자면 난 그대들의 싸움에 어떤 일이 발생해도 그에 대해서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도록 하지. 그 밖에 또 다른 질문이 있나?

류자크가 에이든의 발칙한 회답을 전해듣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그는 이빨을 바득바득 갈며 증오 섞인 목소리로 크로노스를 향해 시끄럽게 고함을 쳐댔다.


“크로노스, 지금 즉시 내 앞에 네 놈의 전리품들을 헌납해라.. 그렇지 않겠다면.. 네 놈을 기어이 결단내고야 말겠다..!

류자크가 그가 가진 거대한 사신의 낫을 불끈 집어들며, 크로노스를 진심으로 끝장내기라도 할 듯한 심산으로 쏘아보았다.


“네 놈은.. 내면에 깊이 잠식된 나의 태곳적 광기 본능을 일깨우도록 만드는군.. 흐흐.. 결전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난 네 놈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고.. 네 놈이 흘린 피와 정기를 마시며.. 네 놈이 쏟아낸 내장이라고 하는 더러운 것들을 먹음직스럽게 씹어삼켜주마..

크로노스는 그가 직접 개조한 동력 사슬톱을 꺼내들며 금방이라도 류자크의 육신을 조각낼 듯한 사나운 기세로 위협을 가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전장에서 일평생을 같이해온 그의 고결한 사슬톱과 함꼐, 류자크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 따위는 갈갈이 찢어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찰나의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광기에 차올라 그 조차도 스스로 억제하지 못 할 정도까지 변모했다. 예컨대,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것이였다. 의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침내 통제 불능의 광기에 사무치게 된 그는 곧, 교만하기 짝이 없는 류자크를 향해 그의 모든 기력을 쏟아부으며 달려들었다. 잔뜩 날이 선 사슬톱 갈리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거대한 굉음을 발산해내자, 그의 육중한 몸놀림이 뒤이어 온 대지를 소란스럽게 휘저으며 날뛰도록 이끌었다.


“류자크, 이 겁쟁이 같은 놈..!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체 어디로 달아난 게냐? 네 놈의 졸렬한 태도가 가히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하하하하..! 네 놈같이 약해빠진 겁쟁이 따위가 감히 독재관씩이나 되는 자리를 떡하니 꿰차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진정한 치욕이 아닌가?

크로노스가 류자크를 향한 도약을 마쳤을 즈음,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크로노스는 내면의 광기에 완전히 잠식되어, 으레 류자크에 관한 모욕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의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추며, 끝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탐욕스럽기만 한 겁쟁이 같으니라고..! 네 놈이 내게 오늘 보인 치욕을 후대까지 전파되도록 해주마.

그 때였다. 강력한 에너지의 일격이 크로노스의 심장부를 관통했다. 이는 필시, 류자크의 반격이 시작된 것임이 분명했다. 크로노스는 차마 회고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일격을 받아내고는, 그가 서 있던 벽의 반대편 까지 나가떨어졌다.


“흐흐.. 네 놈 주제에 기껏 내보인 반격이 겨우 이 정도인가..? 이로서, 독재관이라는 자리는 네 놈에겐 두 말할 것도 없이 과분한 자리였음이 완벽히 증명되었다..! 이 무능력한 겁쟁이 놈 같으니...

“네놈이 무심결에 뱉어낸 그 가소로운 언행을.. 이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일격을 맞고서 정신이 혼미해진 크로노스의 앞에 돌연히 류자크가 나타나서는, 그의 거대한 낫을 치켜들며 크로노스를 향해 또 한번의 강렬한 에너지를 쏟아냈다. 크로노스는 그가 선사한 일격을 역시나 그대로 받아낸 후, 심지어 아까보다도 더 먼 지점까지 튕겨나갔다.


“흐흐.. 으헉..!

크로노스가 복부에 강력한 일격을 맞고 잠시 동안 쓰러지며 여지없이 검붉은 피를 토해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류자크에게 약점을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단언컨대, 그것은 패배의 인정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순순히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은, 내면의 나약함을 드러내보이는 의미와도 같으며, 또한 그것은 용맹한 투사로서의 소양에 결정적으로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는 부상당한 육신을 이끌며 다시 전열을 다듬었다. 이는 어쩌면, 그가.. 혈투 직전에 했던 결단을 기필코 지켜내기 위해, 그는 다시 한번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일런지도 몰랐다.


“패자(敗者)는 내가 아니라.. 바로 네 놈이라는 사실이 이 쯤에서 확고해진 것 같군. 그렇지 않나?

“크하하하.. 그게 가당하기나 한 소리인가? 내 육신이 이렇게나 온전한데.. 네 놈의 그 무엄한 발언에 감히 떳떳히 동의할 자 따윈 없을 것이다.

크로노스는 너덜너덜해진 그의 육신을 이끌고, 류자크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류자크의 비대한 낫이 크로노스의 사슬톱을 막아내나 싶더니, 이내 그의 낫은 반토막이 났다. 크로노스가 들고 있던 육중한 사슬톱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자아내며 류자크의 유약한 살점을 파고들었다. 류자크는 순간 당황하여 재빨리 몸을 숨기고자 했으나, 크로노스가 뿜어내는 격노섞인 흐름에 그대로 압도당하여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순식간에 크로노스가 내리꽂은 사슬톱은 류자크가 잠깐 동안 느슨해진 틈을 타, 재빨리 그의 육신 깊숙한 곳 까지 파고들어, 마침내는 그를 반토막내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 순간만큼은 진정, 죽음을 다루기 위해 창조되고 훈련된 냉혹한 살인기계였다. 태생적으로 사신이었던 류자크 조차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이나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악!

류자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검투라고 일컫기엔 확실히, 모종의 어려움이 따랐다. 아니, 이는 차라리,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가혹한 비극의 현장이라고 논해야 함이 진정으로 옳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를 그저 하나의 즐길거리로 여기며 관람해온 상위 악마들은 모처럼 흥미로운 경기라도 펼쳐진 양, 모두가 호쾌하게 웃고 떠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반면, 루나텐을 비롯한 신생 악마들은, 도리어 이 처참한 광경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헤어나올 수 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심지어 그 중 몇몇은 그들의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였다. 


“그래.. 그렇게 계속 끊어질듯한 고통 속에 영원히 몸부림쳐라.. 그게 진정 내가 원하던 바였으니까 말이야.. 크흐흐흐..

크로노스가 사악한 웃음을 자아내며, 무력화된 류자크를 궁전의 차가운 바닥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팽겨쳤다. 그가 쏟아낸 내장과 피는 그의 처참한 몰골을 대변해줄 만큼이나 가히 애처롭다고 논할 만 했다. 그런 도중에도, 류자크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크로노스를 향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말로의 일격을 퍼부어댔다. 승리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문득 방심하고 있던 크로노스에게, 그가 도출해낸 최후의 일격은 전세의 판도를 뒤엎을 만큼이나 치명적이고도 기적적인 것이었다. 가령,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악마들 모두가.. 차마 환희 섞인 환호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 비겁한 놈 같으니..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류자크의 일격을 맞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크로노스가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증오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자, 그는 사지가 일체 반 토막이 나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류자크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였다. 그는 이내 류자크의 멱살을 격하게 부여잡고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갑작스레 전보다 한 껏 여유롭고도 간악한 웃음을, 기적적으로 숨이 붙어 있는 류자크의 창백한 얼굴에 대고, 한껏 지어보였다.


“나약한데다가 비열하기까지한 네 놈이.. 과연 이래도 내게 끝까지 반항할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류자크..

말이 끝나기 무섭게, 류자크는 크로노스의 얼굴에 대고 엄청난 양의 유혈을 토해냈다. 크로노스의 얼굴이 찰나의 순간 그가 토해낸 피로 얼룩지다못해, 뒤범벅이가 될 정도였다. 일시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크로노스의 표정에 역력하자, 류자크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적의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비웃음을 사뭇 흘겨보냈다. 그의 비웃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크로노스의 표정이 마침내 모멸감으로 가득 차오르자, 이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류자크는 그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이나, 가히 미친듯이 웃어재꼈다. 확언하건대 그것은, 크로노스의 뿌리깊은 절개를 가이없이 훼손하고도 남을 정도의, 조롱을 넘어선 모욕이었다.


“이 어여쁜 것 같으니라고.. 아무래도, 먼저 네 놈의 그 지조 없는 얼굴부터 씹어먹어야 내 직성이 풀릴 듯 싶구나. 하지만, 그 전에 네 놈을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혹사시켜가며 숨통을 차례로 끊어가는 것이.. 조금은 더 좋은 선택이 되겠지.. 크흐흐흐...

적개심과 격노에 가득 찬 크로노스가, 반토막이 나 한참이나 내장을 쏟아내고 있는 류자크의 육신을 붙들어 잡고서 사정없이 사방으로 돌려대더니, 일순간 그를 반대쪽 벽으로 가혹하게 내팽겨쳤다. 한 바탕 혈전을 치르고 난 류자크의 행색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어 말로 다 표현하기 불가능할 정도였다. 회고하건대, 크로노스 만큼이나 너덜너덜해진 육신에, 심지어 몸의 절반 이상이 바닥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으며, 피로 낭자한 그의 초라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측은한 표정을 자아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흐흐흐.. 네 놈도 본능적으로 알아챘겠지? 그래, 네 놈이 생각하는 그게 맞아. 이제 죽을 시간이다, 류자크..!

크로노스가 금방이라도 류자크를 집어삼킬듯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달려들자, 그 순간 엄숙한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이제 이쯤에서 그만둬라, 크로노스. 그 정도면 훌륭하게 잘 싸웠다.

엄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집정관, 에이든이었다. 조금은 갑작스런 그의 판단에, 모두들 조금씩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뒤이어, 눈 앞의 끔찍한 참상이 진정 즐겁기라도 한 양, 한참을 호쾌하게 웃어대더니 곧, 섬뜩하면서도 흡족스러운 표정을 내보였다. 

 
“그렇다면, 꽤나 아쉽게 되었군요. 저 비열한 놈을 제 손으로 직접 처단할 수 있을 결정적인 기회였는데 말입니다.

에이든이 그의 엑셀러레이터를 다소 높게 들어올리자, 그의 엑셀러레이터에서 어두운 광채가 뿜어져나오며 순간 그들이 혈전을 벌이며 입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감쪽같이 아물었다.


“저 비굴하고 무능력한 놈까지 살려둘 필요는 없었습니다. 꼴이 어떻게 됐든, 상관치 않고 제 스스로 치유하도록 모른척 내버려두셔야 했죠. 예로부터, 명예로운 투사는 스스로의 몸을 곧잘 다스리고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될 미덕 중의 기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는 내심 속으론 참을 수 없는 격노에 끓고 있었지만, 그에게 남은 마지막 지조나마 보존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안쓰러운 모습이 모두의 눈에 선해 보였다.


“크로노스, 어서 그대의 전리품을 이 곳으로 가져오도록 해라.

에이든이 뜻밖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것은 필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도 남을 만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크로노스는 그런 그의 결정에 관해서, 차마 털끝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알아들은 것 같군요. 지금 하신 명령은 못 들은걸로 하겠습니다.

“지금 즉시, 그대의 전리품을 한 치의 숨김도 없이 내게 바치라고 명했다..!

크로노스는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그의 분에 넘치는 판단을 재고하자니,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냉담한 울분이 파고들어 갑작스레 격렬히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권력자가 내린 명령이라면, 비록 불쾌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순응해야만 함이, 그들 본연의 섭리이자 이치였다.


“..류자크, 네 놈 말이야.. 오늘은 그저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해라. 다음 번에도 기어이 네 놈 따위가 내게 기어오른다면.. 그 땐, 결단코 네 놈의 사지를 차례로 비틀어버린 후, 뼈와 살을 분리시킬 줄 알아라.

“아니, 다음 번엔 내가 네 놈을 그리 만들어줄 것이니, 네 놈이야말로 훗날을 각오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에이든의 명령에 따라, 크로노스는 그가 약탈한 전리품들을 그의 앞에 가득히 쌓아올렸다. 이는 필시, 위대한 두 검투사의 처지를 감안하더라도, 결국 모든 면에서는 상처와 패배로 얼룩진 전투임이 분명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승자를 알 수 없는 때 늦은 개선식이 그들의 면전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그제서야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의 암묵적인 종언을 선언하였다.


“류자크, 이번엔 특별히 네게 선택권을 주도록 하겠다. 이 중에서 네가 탐하고자 하는 것들을 가져가라.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번에 당신이 내린 명령에 화가 납니다.

크로노스가 불만을 표출하는 광경은 단언컨대, 결코 흔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전우나 하관들로부터, 비록 그가 속한 곳이 기만과 배신이 판치는 공간임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그는 비교적 좋은 평을 받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류자크는 우리를 충분히 즐겁게 해주었어. 그렇지 않나? 난 이 같은 처사에 관해서, 그가 노력한 만큼의 댓가라고 생각하네.

“집정관이여. 어쩐지, 지금 제 눈 앞에 마주한 자가.. 문득, 본연의 당신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크로노스가 조심스레 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품었지만, 에이든은 그것에 관해서 전혀 개연치 않은 듯이 일관했다. 둘 사이에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도중에도, 류자크는 태연히 보물 더미 속에 묻혀있던 몇 기의 데스 웨폰을 그의 길쭉한 사각형 상자에 집어담았다. 그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보물 더미 속에서 굶주린 탐욕을 채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만.. 그런 그들을, 크로노스는 그저 차디 찬 경멸의 눈길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공허한 곳을 영원히 제쳐 놓고, 불타는 성역으로 이동한다.

에이든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탐욕만을 채우기만 급급하던 상위 악마들이, 순식간에 진군 준비를 마치고 그들의 대열을 갖추었다. 한편, 한 눈에 보기에도, 보물 더미는 처음 쌓아놓았던 것 보다 그 질과 양이 확 줄어 있었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잔재들은, 다름 아닌 하위 악마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처음으로 발을 딛자마자 축조했었던 그 불타는 궁전 말이군요. 그 곳에서 또 무엇을 하며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곁에 있던 크로노스가 미심쩍은 듯 질문했다. 


“그건 네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대가 부여받은 본연의 책무에만 충실하도록.

거대한 악(惡)의 군단들이 거대한 이변을 일으키며 그들의 불타는 성역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들이.. 아니, 그가.. 과연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에 관해선, 그 누구도 도무지 예측할 길이 없었다. 다만,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간에, 생각해보면 결국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성전(聖戰)의 최대 수혜자는, 더 이상 잃을 것 조차 없는 나약한 인류가 될 것임을.. 지극히 본능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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