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나와 만년필
게시물ID : boast_135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얍테
추천 : 1
조회수 : 89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2/28 16:03:30

 언제부터인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부터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느시기라고 딱 꼬집어서 이야기 하라면,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저 어느 때부터, 어느 순간부터 내 손에는 자연스럽게 볼펜대신 만년필이라는 것이 쥐어져 있었고, 학창시절을 내내 만년필로 보냈다.

  

  만년필을 쓴다고 하면 보통 반응은 두가지다. 신기해 하는 사람들과, 돈낭비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 사실 돈낭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틀린것은 아니다. 현대에는 300원자리 볼펜만 사더라도 한두달 넘게 넉넉하게 잘 필기를 할 수도 있고, 사지 않더라도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볼펜만 계속 쓰더라도 사실 평생 쓰고도 모자랄 것이다. 그만큼 필기구라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 이상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별다른 가치 없는 물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300원짜리 펜으로 쓰나, 100만원짜리 펜으로 쓰나 쓰는건 다 똑같은데, 뭣하러 그렇게 돈낭비를 하느냐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저 씨익 웃고 말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만년필을 수집하는 나도 그것이 '돈낭비' 라는 것에 대해서 부정해보라고 하다면, 딱히 반박 할 수가 없다. 튼튼하고 잘 망가지지도 않고 오래가는 300원짜리 볼펜, 그리고 비싸고 떨어뜨리면 망가지는, 잉크를 지속해서 충전해서 써야하는 만년필을 '상식적'인 면에서 비교하자면, 백에 구십구는 싼 볼펜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사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것은 필기감으로 대표되는 감성적인 면일 것이다. 직접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잉크를 충전하고, 글을 하나하나 써가면서 느껴지는 펜들의 각기다른 필기감, 그 모든것들이 복합적으로 적용되어 '감성'이 묻어난다. 느긋하게 만년필에 잉크를 충전하고, 내가 좋아하는 글을, 내가 좋아하는 필기감으로, 차근차근 써 나가는 것만큼 행복한 시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비오는 날에는 묵직한 대형기를 쓰고 싶고, 가볍게 쓰고 싶은 날에는 포켓만년필로 필기를 하고, 우울한 날에는 사삭거리는 펜으로, 또 기쁜 날에는 부드러운 펜으로, 그렇게 기분에 따라, 감정에 따라 느껴지는 필기감이 다르고, 또 그 모든 감각들이 내게는 소중한 감성으로 다가온다.


  잉크를 충전할때는 행복해진다. "이 잉크는 어떤 색을 보여줄까? 흐름은 어느정도일까?" 등등 이런 생각들은 두근거리는 기대함을 선사해준다. 또 새로운 만년필을 잡았을 때, "이 펜은 어떤 필기감을 보여줄까? 얼마나 부드러울까? 아니면 사각거리려나?" 라는 물음들이 또 마음속의 감성에 불을 지핀다. 기대감, 두근거림,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얻는 행복함. 그런것들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만년필이라는 것은, 정말 친한 친구라는 느낌이다.


  마냥 오랜 친구처럼 계속 내 옆에서 함께한다. 내 손에만 와서 10년, 아마 그 윗대로 가면 50년은 훌쩍 넘겼을 파카51도, 그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가며 역사를 기록해왔을 것이다. 아마 위대한 철학가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작가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면 공부하는 학생이었을지도 모르고, 가정주부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이 과연 내 손에 있는 이 펜을 써 왔는지는 모르겠지만은, 그들의 인생을 소중하게 적어내려가며 간직해왔던 그 펜의 가치라는 것은 정말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것이다. 이 펜으로 써 내려왔을 수많은 글들, 그 글들이 모두 이 펜 한자루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면, 그 벅찬 감동을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IMG_0559.jpg
IMG_0562.jpg
IMG_0563.JPG
IMG_0564.JPG


 지금 나와 함께하고 있는 펜들이다. 거의 대다수가 1950년대, 60년대에 만들어진 빈티지 만년필들이다. 족히 60년은, 한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같이 적어왔을 것이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세월이다. 몇자루를 들이고 또 내보내기를 반복하면서, 남아있는 녀석들은 이녀석들이다. 이녀석들중에 한 녀석을 포기하라고 한다면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다. 몇자루를 팔때마다 이 펜으로 적어온 것들에 대한 기억들이 지나가는데, 아무렴 이렇게 역사를 간직해온 녀석들과, 또 나와 계속 함께해온, 나의 글을 적어온 이녀석들은 어떠랴.


  오늘도 나는 만년필로, 내 인생을 적어나가고는 하겠지만.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