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유주의는 '책임'으로부터 정당화되는 자유를 올바른 자유로 정의하고 있다.
만약 책임질 수 없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이 페이지에서는 자유의 참 뜻과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자유의 올바른 방향을 탐구하려고 한다.
I.
'자유'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들을 탐구해보면
그 단어의 본뜻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맥락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1. 세계(타자, 사회, 국가 등)의 압력을 받아 침해되는 권리를 의미할 때.
ex)김맑스 씨는 맑시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가에 의해 삼청 교육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김맑스 씨는 자신의 사유의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했다.
2. 특정 행위 등을 원하는 바대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할 때.
ex)박자본 씨는 추석 보너스로 2500만원을 받았다. 그는 모아둔 돈에 보태어 갖고 싶었던 벤츠를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1.의 예시에서 사유의 자유는 결국 '원하는 사상을 생각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므로 2.의 '특정 행위'에 포함된다.
결국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줄이면,
원하는 바대로 행위하는 것.
이 된다.
이제 1과 2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자유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1의 경우는 자유가 외부로부터 침해 받는가 받지 않는가를 조사하고 있다. 삼청 교육대는 김맑스 씨의 '원하는 대로 사유하고 싶은 자유'를 침해한다. 그런데 2의 경우, 만약 박자본 씨가 번 돈이 모자라서 벤츠를 사지 못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박자본 씨의 ‘벤츠를 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박자본 씨 본인의 경제능력이다.
그러면 이번엔, 박자본 씨가 번 돈이 충분했는데, 박자본 씨가 멍청하게 그 돈을 현금으로 인출했다가 돈이 든 종이가방을 잃어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은행 앞에서 전화를 받으며 잠깐 종이가방을 내려놓은 사이에 누군가가 그것을 들고 튀었다. 이 때 박자본 씨의 '벤츠를 살 자유'를 침해한 것은 1, 2 중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가? 박자본 씨가 '돈 관리 능력이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남의 돈을 함부로 가져가는 외부 요인(도둑)'의 탓일까?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이에 대한 해답은 IV에서 다루어볼 것이다.
II.
인류 문명의 발전은 언제나 사회가 가진 자유의 총량을 극대화하고 보편화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I에서 정의했던 '원하는 바대로 행위하는 것'이라는 자유의 뜻을 조금 억지스럽게 적용해보자. 우리가 원하는 바를 현실 세계를 초월한 무언가라고 설정하자. 예컨대, 나는 달에 가고 싶다. 우주복 없이 달에서 우사인 볼트와 달리기 경주를 하고 싶다. 이 자유는 분명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자.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치열하게 경쟁하던 먼 원시시대에, 원시 부족의 불씨 담당인 당신은 오늘밤 불이 꺼지지 않도록 모닥불 앞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다. 만약 불이 꺼진다면 당신은 족장에게 크게 혼난다. 왜냐하면 그 불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서 인위적으로는 만들 수 없고, 번개가 치거나 겨울철 나뭇가지에 불이 붙는 우연을 찾아 헤매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졸린 당신은 이런 망상을 한다.
"내가 어디서든 불을 피울 수 있는 손바닥만 한 돌멩이가 있다면 좋을 텐데."
당시에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겠지만, 현대인들은 편의점에서 오백 원에 라이터를 살 수 있다. 원시인의 좌절된 자유는 현대에 실현되었다. 혹시 아는가, 먼 미래에 인류가 달을 정복하고 그곳을 지구화하여 충분한 대기를 조성한 후, 우사인 볼트의 후손과 내 후손이 달리기 경주를 할지.
물론 이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하지만 인류 문명의 발전이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바(그것이 아무리 억지스러운 것이라도)를 마침내 실현해내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즉, 인류 문명은 실현 불가능했던 자유들을 실현시키면서, 그 문명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자유의 총량을 극대화하고 있다.
놀랍게도 사회는 자유를 극대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대중에게 보편화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설탕은 조선 시대만 해도 매우 귀중한 사치품이었다. 양반들이나 설탕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현대에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라이터를 샀던 그 편의점에서 설탕을 쉽게 살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한 때 비타민C 열풍이 엄청나게 불었다. 서울대 의대에서는 비타민C를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의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설사하기 직전까지요." 이 얘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법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비타민C의 항산화작용이 인체의 노화를 방지하는데, 과다 복용하더라도 그 어떤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 때는 비타민C가 너무 비쌌다. 서민들은 설사하기 직전까지 비타민C를 먹는 게 불가능했다. 그러나 비타민C 열풍을 겨냥한 수많은 제약회사들은 대장균의 genome을 개조해서 비타민C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었고, 비타민C의 단가를 혁명적으로 낮추었다. 이제 나 같은 무능력자도 라이터와 설탕을 샀던 그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달만 하면 비타민C를 설사하기 직전까지 먹을 수 있다.
설탕을 먹고 싶은 자유, 비타민C를 먹어서 노화를 막고 싶은 자유는 사회의 기득권층에서부터 대중들을 향해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불과 수십 년, 수백 년 전이 아니라 천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먼 과거의 사회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재밌는 점은, 자유의 보편화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00년 전만 해도 여성의 투표권은 없었다. 여성들의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할 자유'가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자유를 실현시켜준 것은 여성 인권 운동이었지, 과학기술 같은 게 아니었다. ‘노동권-충분한 임금을 받고 싶은 자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자유-’, ‘교육권-가난해도 충분한 교육을 받고 싶은 자유-’ 등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탄생한 자유의 실현들이었다.
III.
이쯤에서 서론을 다시 상기해보자. 나는 현대 자유주의가 책임으로 정당화되는 자유라고 얘기했다. 이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무엇을 하든 자유, 라는 밀의 유명한 논리에 뿌리를 두고, 경제, 정치, 사회적 패러다임으로 진화한 자유론이다. 이 자유주의가 말하는 책임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제 몫의 결과를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밀의 논리에 맞추어보아도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아르바이트생의 임금을 체불하여 정당한 돈을 받고 싶은 그의 자유를 침해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으로 편의점 점주는 벌금형을 받는다는 식이다.
언뜻 보면 자유라는 개념을 우리 사회 속에 너무나 절묘하고 효율적으로 녹여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책임으로 정당화되는 자유’ 때문에 자유에 대한 오해가 생겼다. 한 번 살펴보자.
전날 술을 밤새 퍼먹고 기절한 대학생 이학점 씨가 있다. 이학점 씨의 오늘 첫 수업은 아홉시. 지금 시간은 일곱시 반이다. 이학점 씨는 학교까지 가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므로 적어도 지금은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알람이 울렸지만 고개를 든 이학점 씨는 머리가 너무 아프다. 이학점 씨의 대뇌피질이 컨디션을 점검하여 그에게 보고서를 보낸다. "열공쟁이인 당신은 수업을 듣고 싶겠지만 지금 학교 가봤자 강의 내용은 머릿속에 하나도 안 들어갈 겁니다. 그냥 주무시죠." 그러나 아홉시 수업의 교수는 출석에 까다롭다. 수업에 들어가도 강의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겠지만, 그는 학점을 위해 출석 도장을 반드시 찍어야 한다. 이학점 씨의 선택권은 다음과 같다.
1. 학점을 버리고 잔다.
2. 점심 시간 때 쯤 죽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수업에 들어간다.
3. 친구에게 대리출석을 부탁한다.
이렇게 선택권을 나열하면 이학점 씨가 무슨 선택을 해야하는지 당신에게 물을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난 좀 다른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지금 이학점 씨가 원하는 자유는 무엇이고 그것은 실현될 수 있는가?"
당신은 이학점 씨의 자유로 '자고 싶은 자유'와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로 '학점'을 골랐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 생각은 틀렸다.
이학점 씨의 자유는 '출석도 하고 수업도 듣고 잠도 자고 싶은 자유'이고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는 '몸이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바를 실현하지 못하는 이학점 씨는 현재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겠지만, 책임으로 정당화되는 현대적 자유주의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이학점 씨가 자유롭다고 설명한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
현대 자유주의는 이 명제를 베이스에 깔고 시작한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으면 그에 대한 기회 비용으로 무언가를 반드시 잃어야 한다. 여기서 잃는 무언가는 그가 져야하는 몫인 '책임'이다. 이학점 씨가 학점을 챙기고 싶다면 잠은 그가 지불해야 하는 책임이고, 잠을 자고 싶다면 학점은 그가 지불해야 하는 책임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데, 현대 자유주의자는 이학점 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지불할지 선택권이 이학점 씨에게 있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다.'
현대 사회는 이학점 씨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 적이 없다. 심지어는 술을 먹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I에서 우리가 살펴본 자유를 침해하는 두 가지 요인 1, 2 중에서 1은 존재하지 않는다. 빅브라더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현대 자유주의자의 시각에서 내가 했던 주장 "이학점 씨의 자유는 출석하고, 수업듣고, 자고 싶은 자유"는 방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경우, 사회는 이학점 씨의 자유를 한 번도 침해한 적이 없는데, 이학점 씨가 본인의 자기관리 능력의 결핍을 사회 탓으로 돌리고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자는 아마 이학점 씨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걸 다 하고 싶었으면 전날 술을 안 먹었어야지 멍청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네 책임이다."
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술은 이미 진탕 먹은 걸 어쩌겠는가. 그건 둘째 치고, 이학점 씨의 현재 상황에 주목하자는 거다.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다.
"이학점 씨가 원하는 자유는 무엇이고 그것은 실현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유란 원하는 바대로 행위하는 것. 임을 이미 배웠다.
이학점 씨가 원하는 바가 "출석하고 수업 듣고 잠을 자는"것이라면, 이학점 씨는 자유롭지 않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나 명백한 결론이다.
그래도 미심쩍은 눈을 하고 날 쳐다보는 자유주의자를 위해, 그들이 간과하는 것을 하나 지적하고 싶다.
바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백 퍼센트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책임이라는 것이 정당할 수 있을까. 이학점 씨의 간 기능이 지난 며칠 사이에 급속도로 퇴보했다고 가정해보자. 이학점 씨는 평소 술을 잘 먹는다. 놀랍게도 소주를 궤짝 단위로 마셔도 멀쩡한 남자다. 그런데 어제는 9시 수업을 위해서 딱 다섯 병만 먹었는데, 갑자기 그의 간이 파업을 해서 알코올을 전부 분해하지 못했다. 이학점 씨는 아침 컨디션이 그렇게 엉망일 줄 몰랐던 거다.
그래도 아침 선택의 딜레마가 이학점 씨의 책임인가? 그렇다면 좀 더 극단적으로 상황을 몰고 가보자. 이학점 씨가 지난 주에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았고, 간을 포함한 전체 장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해보자. 그래서 소주를 다섯 병 들이킨 이학점 씨의 아침이 저 모양이었다면, 여전히 이학점 씨의 책임인가?
박자본 씨의 경우에는 어떨까?
벤츠를 사지 못하는, 그의 자유의 좌절이 은행 앞에 돈 봉투를 함부로 내버려둔 그의 책임인가, 그 돈을 훔쳐간 도둑의 책임인가? 만약 도둑이 온 힘을 다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찢어지게 가난해서, 배고파 굶는 어린 딸을 위해 돈을 훔친 거였다면 이 책임의 화살은 그런 도둑을 발생시킨 사회까지 겨냥할 수 있을까?
이러한 어려운 질문들은 사실 위 섹션들을 정독했다면, 답을 내리지는 못하더라도 답을 찾아낼 방향은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을 마지막 섹션에서 다뤄보자.
IV.
돈을 잃은 박자본 씨의 사례는 사실 함정이다. 답을 IV에서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나도 답을 모른다.
뭐 대충 박자본 씨의 과실이 30%, 도둑의 과실이 50% 사회의 과실이 20% 정도라고 답해두자. 누구 과실이 더 큰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박자본 씨의 자유와 그것의 실현 방안이다.
박자본 씨가 원하는 자유는 '벤츠를 사는 것'이다. 돈을 잃어버린 지금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우리는 간단히 도둑을 잡는 경찰을 떠올릴 수 있다. 박자본 씨의 윗집에 사는 임체포 씨는 강력계 형사로 30년을 일해온 베테랑이다. 박자본 씨의 신고를 받고, 임체포 씨는 절도 전과자 목록을 조사한 다음, 은행 앞 CCTV의 녹화 자료에서 도둑의 실루엣이 누구의 것인지를 밝혀낸다. 임체포 씨는 곧장 범인의 집을 찾아가서 그를 붙잡았다. 박자본 씨의 추석 보너스는 주인에게 무사히 잘 돌아갔고, 박자본 씨는 꿈에 그리던 벤츠를 사게 되었다.
여기서 '경찰'은 박자본 씨의 자유를 실현시켜주었다는 점에서 현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 약간 다르다. 현금은 박자본 씨의 자유를 실현시켜주는 본인의 '능력'이고, 경찰은 박자본 씨의 자유를 침해하는 외부 요인을 제거하여 그의 자유를 실현시켜주는 또 다른 외부 요인이다. 말하자면, 여성 투표권을 실현시켜 주는 데 공헌한 여성인권운동가들 같은 느낌이다. 현금은 원시인의 불을 잘 지키는 개인적인 능력이고, 경찰은 굳이 고르자면 라이터를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가깝다. 그 기술력이 불을 잘 지키게(피우게) 해주고, 경찰도 박자본 씨가 돈을 잘 가질 수 있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둘 다 개인의 능력 외부에 존재하는 요인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실현시켜주고 있다.
이제 I, II, III과 IV의 위 두 문단까지를 한 번에 설명하는, 끝내주는 예시 하나와 함께 정리를 해보자.
여기 오유고등학교 1학년 1반 최뜀틀 군이 있다. 지금은 체육 시간, 뜀틀 수행평가를 한다. 뜀틀 앞에 선 최뜀틀 군의 발이 굳는다. 선천적으로 운동 젬병인 최뜀틀 군에게 4단 뜀틀은 너무 고난이도다. 삐끗하면 손목이나 발목을 크게 다칠 것이기 때문이다. 옆에 선 체육 선생님이 그에게 말한다.
"뜀틀아, 너는 이걸 넘어도 되고, 넘지 않아도 돼. 넘다가 굴렀을 경우 재수 없으면 어딜 다칠지도 모르지. 점수도 안 좋을 거야. 근데 그건 뛰겠다는 선택을 한 네 책임이란다. 그게 무서우면 안 넘어도 돼. 나는 강요하지 않아. 대신 수행평가 점수가 0점이 되는 것은 네 책임이겠지? 하지만 좋은 경우의 수도 있어. 만약 네가 뜀틀 연습을 열심히 했고, 내 수업을 잘 들어서, 이 뜀틀을 잘 넘는다면 넌 좋은 점수를 받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난 너한테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아. 자, 자유롭게 선택하렴."
이쯤 되면 당신도 명확히 알겠지만, 최뜀틀 군은 자유롭지 않다. 현대 자유주의자는 선택권이 뜀틀 군에게 있기 때문에 선생님 말씀처럼 그가 자유롭다고 말할 테지만 말이다. 여기서 뜀틀 군이 원하는 자유는 무엇이고 그걸 좌절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뜀틀 군의 자유는 "다치지 않고 뜀틀을 무사히 잘 넘어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일 것이다.
좌절시키는 요인은 1.부상과 그에 대한 두려움, 2.실패했을 때 잃을 점수와 그에 대한 두려움. 정도다.
우리 문명은 자유의 총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이 문제도 언젠가 해결될 것이다. 가령 지금 당장이라든지.
1부터 해결해보자.
아주 쉽다. 뜀틀 아래에 매트리스를 설치하고, 최뜀틀 군에게 손목 발목 무릎 보호대를 착용시키고, 준비체조를 충분히 시키자. 끝.
2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더 쉽다. 뜀틀을 넘을 기회를 여러 번 주면 된다. 끝.
여기서 매트리스나 여러 번의 기회는 위에서 살펴본 경찰이나 라이터, 비타민C를 생산하는 대장균, 여성인권운동가 등과 비슷한 역할들을 한다.
그럼 이제 선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뜀틀 앞에 선 최뜀틀 군의 자유는,
'뛰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권의 증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뜀틀 아래에 설치된 매트리스와 두 번째 기회에서 온다는 것이다.
자, 그럼 서론의 질문을 약간 바꿔서 다시 살펴보자.
책임으로 정당화되는 자유는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자유인가?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는 정말 방종인가?
당신도 이제는 이해했겠지만, 두 질문 다 답은 '아니오'다.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자유는 책임조차 지지 않는 완전한 자유다.
현대자유주의자들이 그 동안 주장해왔던 책임을 운운하는 자유는 유사자유pseudofreedom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럼 방종은 무엇일까?
유사자유가 자유론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생긴 오해가 하나 있다. '책임질 수 있으면 뭘 하든 내 자유'라는 멍청한 생각이다. 옛날 김어준이 라디오방송 '두시의데이트윤도현입니다'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양다리를 걸친 여자(사연을 보낸 사람)가 세컨드인 남자 역시 자신을 세컨드로 둔 양다리였음을 알고 보내온 사연에 대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욕먹을 짓을 했으면 욕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그 비난을 받겠다고 각오를 한다면, 내 평판과 이미지 등을 대가로 지불해버린다면 그 사랑을 할 수 있다. 이 때는 제 3자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만약 그런 비난들이 무섭다면, 그냥 착하게 살아야 한다."
굉장히 소름돋는 아이디어다. 물론 김어준의 인생을 보았을 때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위 논리가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의 야만적인 논리로 치닫는 것을 발견했다. 그 자유주의자의 논리에서는 살인조차 허용된다. "내가 감옥 가고 비난 받고 평생 죄책감도 느끼면서 살겠다는데 살인이 왜 안 돼?"
칸트 선생님을 모셔오면 이 야만적인 자유주의자는 산산조각이 날 거다. 하지만 그의 논리를 깨뜨리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미 그의 논리가 사회에 거대한 혼란과 피해를 가져올 것임을 예상할 수 있고, 따라서 대부분 그의 논리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야만인의 논리가 방종이라는 것이다.
방종은 책임이 없는 자유가 아니다. 도덕이 결여된 자유가 방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