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참 오래 사귀었다. 그치?
헤어진지도 6개월이 지났으니까 제법 오래 되었고.
지난 시간들 정말 행복했었어
처음 데이트 했을 때 기억나? 스파게티 먹었었잖아.
난생 처음보는 하얀 스파게티 색깔에 한번 놀라고,
돈주고 사이드 메뉴로 풀을 시켜먹는 것에 두번 놀랐었지.
그리고 스파게티는 퍽퍽하고 맛이 없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그 때 나는 니 얼굴 보느라
스파게티가 불어버린지도 몰라서 그랬었던 것 같아.
순수했지, 그 때 나는...
재수학원 담임선생님 눈 속여가며 시간차로 조퇴해서 같이 밥먹으러 다니고,
교보생명 뒷길에서 처음 니 손을 잡았을 때,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했을 때 기억나?
그 때 했던 말 아직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하루종일 이불 빵빵 차면서 부끄러워 할 수 있는데
"오늘부터 너는 악마랑 계약하는거야. 나 말고 다른사람 절대 보지마!"
그 때의 나, 죽어버려라.
그리고 내 인생 첫 고백의 날.
11월 밤이였지만 왠지모르게 따뜻한 날이였었지
가스폭발 사고가 있었던 서울 어느 동네의 작은 공원에서
"오늘부터 악마고 뭐고 그런 역할놀이 안 할래. 대신 오늘부터 너의 천사가 될게."
라고 20살인데도 편집증 환자같은 고백을 했지
그 때 너는 이 말 듣고 가만히 있었던거 보고 너도 보통사람이 아니라는걸 알아야했어.
모르겠어, 서로에게 첫 연애여서 그랬을까.
너랑 나는 순식간에 서로를 알아갔지.
오죽하면 연애 3년차 될 때까지 했던 농담이
"첫 키스는 빼빼로 맛, 백번째 키스도 빼빼로 맛" 이였겠어?
나에게는 첫 연애였으니까 잘 하고 싶었어
그래서 '연애교과서'라는 이상한 책부터 시작해서 온갖 연애소설을 읽어갔지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있었어. 내 행동으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항상 행복한 표정 지어준다는게
밤 10시 자기전에 전화를 시작하고 정신 차려보면 해가 떠있던 거 기억나?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별 이야기 아니였을텐데
아무래도 우리 연애 할때 가장 큰 사건은 그거 였지
고등학교를 문과로 졸업하고, 인서울 하겠다고 들어간 공대에 적응 못해서
학교는 다니는둥 마는둥 하면서 커피가게 했었잖아.
가게 정리하고 집에 와서 자려고 하는데
새벽 3시에 니 친구 한테 전화왔었지 니가 식은땀 흘리면서 기절해 있다고
그리고 넌 그 때 대전으로 답사 가있었고...
바로 옷 챙겨입고 가게 포스에서 돈 꺼네다가 서울역에서 첫차타고 내려가서
반쯤 기절해있는 널 업어가며 서울에 있는 큰 병원 응급실 가서 입원 처리하고
앞 뒤로 쏟아내는거 닦아주고 옆에서 어머님 오실때까지 기다렸던 일
몇일 동안은 가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병원에서만 지냈던 일
사실 이게 독이 될 줄은 몰랐어
별로 큰일도 내가 잘한일도 아니였지만 헤어지려 할때마다
이 일이 발목을 잡았었지.
서로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도 결혼이야기를 앞두고 우리 관계가 크게 금이 가기 시작하더라
너랑 나는 자라온 환경이 너무 달랐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서로 더 끌렸던 것이였겠지만
너는 곱게자란 하나님의 꽃, 나는 운명이니 점이니 하는걸 믿으며 굴러다닌 건초더미
가족과 가족간의 만남 앞에서는 우리 사랑도 힘없이 무너지더라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버려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헤어지고 6개월동안 끈질기게 연락했었지?
나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너는 질렸었고, 나는 오해 살만한 행동만 했으니까.
사실 나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들 너무 싫었었어.
그래서 서로 결혼하고 살려면 뭐라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뜬금없이 요리 하겠다고 했었지.
요식업쪽은 이직이 잦은데 너는 내가 사회생활 적응못하고 직장 옮겨다니는 줄 알았었잖아.
첫 직장은 이사라는 놈은 허구헌날 주방에서 때리기만 하는 놈이였고
부장이라는 놈은 내 몸 만져가며 날 짜증나게 했었지
난 거기 너무 싫었어.
그리고 옮긴 직장은 돈으로 가게 해보려다가 몇달 해보고 안되니까 사장이 변심해서
가게를 다른 사람한테 팔아버렸고
마지막 직장은 솔직히 요리한다기보다 술집이여서 그만 뒀었지
사실 요리 하겠다고 마음먹은게 행복한 식사를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 큰 이유였지만
술마시고 비틀비틀대는 사람들 보면서 이게 내가 원한게 맞나 싶더라고
이제와서 생각하지만 나 정말 너에게 고마워
행복한 기억들 소중한 시간들 나와함께 공유해줘서 고마워
사실 이별하고 몇 달간은 인정하지 못했었지만
어제 너랑 통화하고 괜찮아보이는 목소리 듣고나니까
모든게 다 풀리더라
걸어온 길은 같았으나
걸어갈 길이 달랐기에
헤어진거라고
이제 편하게 보내줄게 나혼자 놓지 못하고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기를 빌게
잘가 내 20대의 모든것이였던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