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했던 하루, 잠들기에는, 그리고 퇴근을 하기에는 조금 이른시간에. 이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하다가, 그래요.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을 곳은 몇 군데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또 쓰는거에요.
가을의 날씨답지 않게 추운 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긴 밤을 조금은 짧게 줄여줄 것만 같은 은은한 불빛의 커피숍.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이에서, 나는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 그러나 매우 자연스럽게 웃으려 노력하면서 그녀 앞에 앉습니다. 10분정도 늦었거든요. 그 10분은, 미리 도착했지만 차마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같은 거리를 몇 번이나 돌고서야 들어간 커피숍이었지요. 왜 용기가 나지 않았을까요, 그래요.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어렴풋이, 그러나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왜냐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따뜻한 거 한잔 마셔야죠?"
"괜찮아요. 늦어서 미안해요."
먼저 도착해 있던 그녀의 커피잔은 식은 거품만이 약간, 그리고 놓여있는 물 한잔. 난 따뜻한 커피대신에 그 물 한잔을 마시기로 했어요.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빨리 가리고 싶었지요. 우리는 그 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계속 서로의 사이에 있는 공기를 향해 대화했어요. 어디 커피가 맛있다, 어느 동네는 어떻다, 날씨가 참 춥다, 오늘 어디 갔었다. 그치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어요. 단 한마디의 단서도 없었지만, 나나 그녀나 어떤 이야기를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난 지금 내가 짊어진 책임을...나눠줄 자신이 없어요. 미안해요."
나는 며칠전에 그녀에게 고백했어요. 만나보지 않겠냐고. 그리고 차였죠. 이렇게요. 하루만 생각해보겠다는 말이 이틀, 삼일, 그리고 오일째가 되는 날, 나는 그렇게 한 여름밤 꿈의 결말을 듣게 되었어요. 어쩔 수 없었죠. 마주친 눈에 눈물이 약간 그렁그렁해서, 정말로 이 사람이 미안해하고 어려워한다는걸, 그럼에도 아직도 그 모습이 예뻐보인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한심하다며 생각하고는, 최대한 그녀의 죄책감따위를 없애주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웃으려 노력했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어요. 이렇게 어려운일인줄 몰랐다고.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전에 말했었던 대로.. 그래서 그럴 수 밖에 없다고. 감정이전에, 그녀는 그 사이에 흘려보내지 않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어요. 그래요. 우리는 아마, 금세 지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얄궃게도 딱 접어둔 채 말이에요. 비겁하게,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그런 이야기를 행간에 숨겨버리다니. 그래서 더 열심히 웃었죠. 괜찮아요. 난 다 알고 있었거든요. 괜찮아요-.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행간에 숨기지 않았더라면 바보같을 정도로 황당한 용기로 그런건 다 필요없다고 외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정말 현명했던 거에요. 확실히 연상이라서 그럴까요.
아마 주말 저녁이나 월화 황금타임에 나타나는 멋진 남자주인공이었다면, 로맨틱 코메디에 나오는 수염난 양아치 같은 남자나, 멋들어지고 세련된 남자, 혹은 청바지와 후드티가 잘 어울리는 남학생 등- 그게 누구건, 어쨌거나 그런 것들에 나오는 남자였다면, 아마 대화 사이에 숨겨졌던, 현실의 벽같은 그런건 다 상관없다고 두 손을 붙잡고 Say love you 를 외쳤겠지만, 그래요. 나는 어렸을때부터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얻은 남자였고- 그런건 당연히 할 수 없었죠. 사실 그런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쪽이 바빠서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거나, 잘 만날 수 없다는건 처음부터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난 그걸 다 알면서 했던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그녀에게는 너무나 중요했겠지요. 그걸 잘 알았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어요. 괜찮아요. 미안해 할 거 없어요. 그냥 잠깐, 내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만큼 돈도 많고, 나이도 많고, 차도 있고, 집도 있고, 권력도 있었다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하는 기대감은 있었지만요. 그랬기 때문에, 난 그냥 괜찮다고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어요. 커피를 시키지 않기를 잘했어요. 분명 잔을 드는 손이 떨렸을 테니까. 그때만큼 포켓속에 손을 숨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적은 없었어요. 표정만큼은 잘 웃고 있었거든요. 열심히 각오했으니까.
그래요.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꺼낼것도 없죠. 나는 차였어요. 그 앞뒤에 아무리 절절한 이야기가 있더라도,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죠. 어쨌거나, 올해의 절반정도는 참 즐거웠어요. 덕분에 말이에요. 참 아쉬운게 많았네요. 키보드 앞에서 타닥거리는것의 절반만큼이라도 말로 전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녀는 나쁜말이라는걸 말하면서도, 그리고 미안해서 고개를 숙이면서도, 불편해하지 말자고 했지만, 그리고 난 웃으면서 그러겠다고 했지만.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위해, 천천히 조금씩 하나하나 , 깔끔하게 없어질 수 있도록 없애나가야죠. 그녀를 만나며 바꾼 핸드폰 때문에 핸드폰만 보면 자꾸 생각나고, 학교 강의에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하필 출석번호가 앞이라 들을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겠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가까워졌던 것 만큼이나 멀어질 순서만이 남아있네요. 잘 할수 있겠죠. 시간은 내 편이니까요. 깔끔한건 중요한거에요. 그리고 아쉽게도, 전 이런건 베테랑이죠.
걱정이에요. 티나지 않게 잘 웃었어야 하는데. 집에 돌아가는 길목까지 배웅하면서, 최대한 활기차게,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어서 보냈는데. 행여라도 들키지는 않았을지.
2010년이 다 가네요. 2011년 3월엔 전 일본으로 출국하게 되겠군요. 오늘 가족들과 회의후에 결정했어요. 다 좋게 흘러가는 것 같네요. 어쨌거나, 현실에 맞추어서 말이에요. 매번 이상론을 외치던 저였지만, 의외의 곳에서 정말 현실의 벽이란걸 크게 체감하게 된 며칠이었어요. 생각보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좋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구나하는걸 많이 느끼게 되었네요. 뭐, 어쩌면 그런 현실을 무시할 만큼의 매력이 없었다는 면도 있었겠지만요.
음, 역시 좋네요. 털어놓고 나니 퇴근이 가까워 졌어요. 가는 길에는 맥주라도 한캔 사 마실 까 하는데. 걸어가는 길이 꽤 길거든요. 밖에서 마시면서 걷기엔 좀 추우려나..
참 좋은 여자였는데. 세상살이 뜻대로 되는게 별로 없군요!
전 그럼 퇴근 준비를 하겠습니다. 오늘처럼 시국이 불안불안한 날, 이런 글이 맞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 악플이 많이 달리면 지워질 테고, 평소대로라면 정말 적은 리플이 붙을테고, 그것도 아니면.. 자연스레 다음페이지로 넘어가거나, 내일 아침쯤 이 오글거림과 부끄러움에 빠른 삭제를 하고는 오밤중에 베게를 물고 이불을 발로 걷어찰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