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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개똥철학 1
게시물ID : phil_97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astlaugher
추천 : 4
조회수 : 57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9/19 13:29:01
 내가 실존한다는 것을 왜 확인하려 애쓸까? 그냥 궁금해서? 세계의 실존하는 것에 대한 출발이 나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간에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나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이니 존재한다고 했던가.
 
 그럼 그러한 사유는 무엇일까? 논리에 바탕을 둔, 좀 더 신뢰성있는 관념의 객관화인가?
 
 실재하진 않지만, 실재한다고 사유하는 그런 RAM 같은 휘발성을 가진 무엇?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되묻고 싶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면, 실존하는 것이라면, 형태를 달리해서라도 남겨져야 하지 않는가?
 
 굳이 물리학법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실존하는 '것'이었다면.
 
 거대한 사유 덩어리의 집합체가, 외부에 그 사유로인한 영향을 주지않고 죽어버렸을 때.
 
 저열한 수준의 사유를 하던 집합체든, 높디높은 수준의 덩어리를 이뤄낸 집합체든 어떤 형태로든 남겨지는가?
 
 인적없는 어느 산골 오두막에, 태어날때부터 죽을때까지 면벽수련을 하다 그자세 그대로 열반에 든 이를 바라보자.
 
 그 사람이 시간의 흐름에 몸과 정신을 통해 높은 수준의 성찰을 이뤄냈다고 치자.
 
 그 사람은 실존했는가? 지금은 실존하는가? 높은 수련과 명상으로 이뤄낸 관념의 집합체인 '성찰'한 사유는 어디로 갔는가?
 
 
 다시 되돌아가 실존을 증명하려 한 그 원인이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찾기 위함이었다면.
 
 RAM의 영역에서 빠져나와 영향을 주고 소통을 하고 밥을 먹게하고, 사람을 살게하고 죽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르치거나 기만하거나
 
어떤식으로든 최소한의 영향을 주는 과정이 실존에의 활용이 아닐까?
 
 
 죽음으로 가보자.
 
 죽는다는 건,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남겨지는 건 육체라는 고깃덩어리일 뿐.
 
 육체는 지구에 환원하기로 하고, 내가 쌓아온 학식과 사유의 덩어리는 휘발되어 사라져버린다.
 
 존재를 갈망하고, 지식과 탐구에 열올리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애썼던 염병을 하며 살았든, 흔적도 없다. '휘발'
 
 그는 죽은 것인가? 그렇다 죽은 것이다.
 
 그럼 죽음을 내가 경험하는 것으로 이입하지 말고, 3자의 시선으로 보자.
 
 위에서 얘기한 산골오두막의 면벽수련옹이 있다. 하지만 난 그의 존재를 모른다.
 
 그는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아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대해 나의 인식속에 존재한적이 없기에 알 수가 없다. 아니 알 수 없는 것 자체도
 
없겠지. 왜? 그는 내 인식의 영역밖에 있었으니까.
 
 그가 살아있었데도, 죽은 후에도 나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적어도 정신적 영역에선 말이다.
 
 다른이를 보자.
 
 세종대왕이 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가 지금 나에게 끼치고 있는 수많은 영향력들을.
 
 그는, 생불에 이르는 높은 성찰을 이뤄 오늘 어느산골오두막에서 열반에 들었지만.
 
 죽은 세종대왕은 실존하는 것이며, 산골오두막의 생불은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다.
 
 
 통속의 뇌에서 매트릭스를 짜서 하늘을 날아다닌들.
 
 영향을 줄 수 없는 관념의 덩어리는 그 수준을 막론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역시 관념적 영역의 덩어리일 뿐이다.
 
 휘발성하여 사라지고 마는.
 
 사유를 통한 나의 존재증명은 오직 나의 관념에서만 증명이 가능하며, 그러한 논리과정을 타인이 전개하여 증명하더라도 그건 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의 증명에 다름아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건 니 생각이고.
 
 존재한다면 움직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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