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심장-파랑새(행복을 찾아서)
이 장마는 언제 끝이 날까
우리는 왜 죄를 짓기도 전에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걸까
/장마 中, 조혜은
우리는 쉽게도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달력의 그림처럼 흔한 풍경이었다
깜박 깜박 형광등이 변덕을 부리는 밤
벽지 가득 하릴없이 앵 무 새 라고 썼다
곧 겨울이었다
컹 컹 컹 어디선가 흰 이빨들이 날아와
베개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앵무새 中, 황병승
어둠의 갈피를 붙들고 서서 여기가,
내가 아닌 듯
가시지 않는 허기
모서리로 뜨겁게 달려와
이팝나무처럼 터졌다 누군가의 배경으로 사라지는
수천 년의 밤이 한 장의 A4용지로 요약되는, 여기는
어디인가
목을 죄어오는 불안의 그림자가 나를 파먹고 배설하고 낭비하는
지독한 생을 이어가는 내가
바로 너인데, 어찌
안녕을 그리 쉽게 노래할 수 있단 말인가
/탄성, 오명선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하늘도, 숲도, 수리호도 온통 먹빛이었다.
땅거미의 먹빛은 동트기 전의 먹빛과 의미가 다르다.
불안을 부르는 빛이었다. 충동을 깨우는 빛이었다.
머리를 낮추고 포복해오는 광기의 그림자였다.
크고 작은 사고, 폭력과 자살 소동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시간이
바로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었다.
/소설 '내 심장을 쏴라' 中, 정유정
모든 것을 포용해도,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된다 해도
나로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거다.
늘 아름다운 주인공을 꿈꾸는 우리.
그러나 때로는 누군가의 삶에
이토록 서글픈 조연일 수 있음에.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中, 츠지 히토나리
옛날은 상처까지 다정한데 앞날은 희망까지 불안하다.
‘앞날은 다정하다’라고 언제나 나는 쓰고 싶다.
/힐링, 박범신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간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에우로파 中, 한강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강물, 천상병
너 없는 길은 우는 것이 길이였다 어쩌자고 꿈 하나 붙들고 있었는지
꿈 버리고 더 무거운 새는 몸이 모두 울음이다
/소쩍새, 신달자
오늘 밤 먼 곳에서 최후까지 빛나는 별이여 다시 고이기 시작한 깊은 곳의 암울을 향하여 떨어져라
/별을 향하여, 김윤희
내 귀한 추억은 난도질당하고 쏟아지는 햇살에 난 그만 모서리 친다 또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무, 최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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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두운 글귀, 1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