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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죽음에 반항하는 것만이 옳은 걸까?
게시물ID : phil_109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널소유하겠어
추천 : 1
조회수 : 53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3/17 23:54:42

물론 아직까지 다른 의미로 저 또한 도망자가 맞겠네요.

모든 것을 부정하지 말라는 말과 조언은 분명히 틀린 것이 아니나,
나에게 그러한 '다른' 잣대를 들이밀며, 그것에 따르는 순간
나라는 존재에 대해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로써는 타협했다는 의미가 옳겠습니다.
휴전정도랄까요?

인생 최대의 난제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라는 말이
이토록 내게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던 이유는.
신을 부정하고, 삶을 부정하고, 나를 부정하며, 세상을 부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우리는 비겁한 도망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은 이러하다, 저러하다라는 이유를 찾아 떠나며, 그것이 틀리다면 무엇이 맞는지를 찾아떠나죠.
사실 삶이라는 것이 그러한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인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내가 왜 그래야 하냐는 허무함입니다.

얼마 전 문득 떠오르는 상황이 하나 있었는데,
삶과 희망, 시간의 흐름 앞에서 좌절된 노인들이
먼저 떠난 자신의 친구를 기리며 울고 있는 상황이었죠.

나는 그들을 보면서 저것이 나의 미래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를 부정하고, 다른 삶을 찾아 만드는 순간, 어쩌면 '조금'은 달라지겠지요.

먼저 떠난 친구를 향해 서럽게 우는 노인의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제일 먼저 자신도 그렇게 될 거라는 운명 앞에 흘리는 서러움의 눈물이며,
지옥같은 세상에서 먼저 떠날 수 있는 시기 섞인 부러움의 눈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로 무능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쫓겨다니는 처지라고 볼 수 있죠.
그게 바로 우리들의 처지이고, 항상 달려야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달려, 달려야만 해. 시간이 지나면 너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사실 세상에 그러한 의문을 남기는 사람이 적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의 선택으로 삶을 끝냈기 때문이라고 결정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은 삶과 타협하며 반대로 삶의 목적을 찾아다녔을 것이니까요.

이런 시각으로 두 부류를 나눌 수 있다면,
하나는 죽음에 반항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삶에 반항하여 삶을 끝내는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왜 불균형을 유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은 삶을 사느냐, 끝내느냐의 이유때문이라 봅니다.

죽음에 반항하는 것 또한 우리들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지만,
그 삶에 반항하는 것 또한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사악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 영화처럼, 서로를 헐뜯고 짐승처럼 물어뜯는 싸움처럼 말이죠.

지금까지 겨우 타협하며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삶을 부정하는 순간, 내가 삶을 살아갈 목적을 잃어버리지만,
그 삶이라는 목적에 한계점을 만들며 일시적으로 결정을 보류하는 상태를 만들어 놓는다면,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되려 긍정하게 된다면,
영원할 것만 같은 삶의 지속을 부정, 즉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이유를 찾아 떠나는 순간,
이것에 근본적인 물음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죽음을 기다리게 될 것이며,
죽음을 외면하고,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을 찾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 말에는 월급이 들어오고, 집에 돌아가면 가족이 기다리고 있으며,
주말에는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고, 여가, 취미, 그 모든 쾌락을 즐길 수 있으리란 일말의 희망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위해 달려간다면 내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이코가 무섭다고 하는 거겠죠. 오히려 나는 그들과 가깝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그 속에서 혼란 속에, 두려움 앞에 좌절하여 다시 어영부영 삶과 타협하는 선택은 있을지 몰라도,
분명한 것은 그런 그들의 삶의 무게는 나날이 갈수록 무거워진다는 겁니다.

인간은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삶의 무게가 무거워집니다.
뭐 유명한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길, 삶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거라고 하는데,
나는 다른 의미로 우리가 실존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행동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동시에 그 행동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무게가 증가한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정의내리자면 우리가 편해지기(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은 가만히 있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인데, 이런다고 우리의 삶의 무게가 줄어든다면 오산입니다.
그동안 쌓여있던 거대한 산의 육중한 자태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죠. 외면한 고통의 실체 말입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죽거나.
죽는 사람들에게는 내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움직임으로써 얻는 삶의 무게가 가혹한 것을 알고 있기 떄문입니다.
일반적 입장에서 그들은 '비겁한 겁쟁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 쓰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곤 하죠.
결국 삶과 타협하여 어영부영 희망을 찾아 떠나는 인간들.
죽음이라는 것에 부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죽는 자들은 말합니다.
"에라이 한심한 새끼들아." 그 말 속엔 '비겁한 겁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죠.

둘 다 재밌는 상황인 것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며 '겁쟁이'라고 여긴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상이니까요. 

함부로 이런 딜레마에 접어든다는 것은 어찌보면 몹시나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일종의 훈련을 통해서 이 두 가지의 상태에 접어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것을 무엇이라고 정의내려야하는지 의문일 뿐이죠.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살아갈 만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이러한 세상에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졌을까?
단순히 의미부여를 떠나, 개개인의 형상화를 떠나서 근본적인 해답을 찾는 것 말입니다.

신은 구원도 하고 천벌도 내립니다. 그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용서하시죠. 
그럼에도 그는 우리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며, 그것 마저도 용서하십니다.
(이유는? 신이니까, 신은 그 자체로 정당성과 자기합리화의 지존입니다. 웃기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합니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라는 이유를 들먹거리며 정당성을 부여하고 온갖 치졸한 짓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죠.
만약 신을 믿어야한다면, 이곳이 지옥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아니 사실 신이라는 존재는 내가 만들어낸 가짜에서 내 마음 속의 나인 자아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나는 그를 개념화시키기 몹시 어려운 존재로 봅니다.

예전에 지인과 이야기를 나눴던 적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살아가는 목적이 어떤 일말의 동기부여를 얻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었죠.
가령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오직 그 하나의 목적만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가는 범죄영화 속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나 또한 그런 심리상태에 취해있었을 때였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러한 욕구는 정말로 나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내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죽여 없애거나 가혹한 응징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됐죠.

여러 상황을 만들어 작은 타협점을 만들었는데 나는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에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은 바로 나라는 피조물을 만든 생물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바로 부모였죠.
그들을 죽여 없앤다면, 복수한다면, 나를 이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이닥쳤죠.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내가 욕구를 표출하고 난 뒤에도 내가 행복할 수 있냐는 물음을 하자,
즉, 거짓된 동기부여가 끝났을 때, 더 이상의 목적의식 없이 떠도는 내가 행복할 수 있냐는 말이었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죠.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됐으니까요.

결국 그 끝은 장대한 고통이리라고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거라고.
이겨내지 못한 자들은 겁쟁이라 불리게 되며, 
그것을 당연시 여기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접어둔 채,
내일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죠.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의 외면이 바로 대중에게 나타난다는 생각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야하는 이유를 많은 것에 빗대어 말하지만, 그것이 정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국 이런 생각들에 잠기면 닥치는 건 역시 허무뿐이죠.
오합지졸의 싸움, 치졸하고 더러운 짐승들의 세계. 그 뿐입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것에 끌립니다.
죽음에 반항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 반항하는 삶을 말이죠.
그 속에서 타협하는 내가 한편으로는 몹시나 아이러니한 것이죠.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두 가지의 모습을 갖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의 나로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기에 말이죠.

재밌는 생각이죠?
결국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이 문제의식 앞에서,
나 또한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손가락질 받겠지만서도,
이 유쾌한 생각들을 접을 수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때문일까요?

아이러니, 모순, 나는 이것이 인간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절대 진리는 없는 그러면서 희망을 진리라 생각하는 오류.
신이 없다면, 진리도 없어야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어떤 개념으로 다가가냐에 따른 차이인가요?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이런 생각들이 너무나 재밌습니다.

이제 한 번 까주시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단순한 겁쟁이로써의 의미를 초월해서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도대체 어느 쪽이 겁쟁이가 되지 않는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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