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두가지로 나눈다고 한다면 본능적 욕망과 그 외들로 나누겠습니다. 본능적이라면 식욕.수면욕.성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성욕은 유일하게 3대욕구중에 정복할 수 있는것이니 식욕과 수면욕으로 규정하겠습니다.
이것을 제외한 모든것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가지만이 오직 개체의 향상성에 "직접적 위협"인것이니까요.
그 외의것에서 가령 누군가 붓글씨를 10년을 하는것. 누군가 재벌회장으로 10년간 회사를 키우는것. 누군가 묵언 수행을 하는것. 욕망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너무 똑똑해요. 숲님이 말했지만 존재적 불안. 존재적 의문. 이런것은 어디서 오느냐. 전 사람이 7살되도 인지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상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순간에 존재적 불안은 시작되는거에요. 왜 사람과 짐승이 다른가. 일단 다르다고 가정하죠 다르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납니다. 바로 인간은 7살이 되면 그 순간에 "자신의 죽음"을 알게된다는겁니다. 그때부터 모든 정신적 작용들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재산을 천억모으는거죠. 누구는 "그건 다 디지털 시그날에 불과하다. 통장에 찍히는 000에 불과한것이다."라고 하는데요. 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단지 현대는 이게 너무나도 복잡화되서 정말로 그 관념과 개념을 따라가다가 지치는 경우는 발생하지만요. 그러나 재산이 축제는 옛부터 있어왔습니다. 누군가 그러죠. "아니 자기생에 다 쓰지도 못하는것. 사람이 3끼먹지 하루에 300끼씩 먹나. 그 돈을 왜 다 모아두나"라고 하는데요.
그게 인간이니까요. "자신의 죽음"을 본다는것이 바로 미래를 예측하기 시작한 기점이라고 봅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미래를 대비하기 시작했어요.
왜 재벌들이 가문을 키우고 그렇게 회사에 집착하는가. 간단하게 그것이 죽어서도 사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난 죽어도 이 회사는 더 강건해지겠지. 나는 죽어도 내 아들은 더욱 크게 회사를 키울거야. 이렇게 말이죠. 이렇게 자신을 일체화시킨겁니다. 지성적으로 존재의 소멸을 보고 그 소멸앞에서 저런 방도를 찾은것이죠.
그래서 재벌이나 예술가나 수행자나 다른가? 라고 묻는다면 다르지 않다고 답하겠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순간에 그에 대한 돌파구. 탈출구로서. 혹은 투쟁이자 소멸시킬 대상으로서 "자신의 죽음"에 대항하는 방법일뿐이에요. 그렇기에 자신이 평생 쓸수없는 돈으로 가지고 있음에도 그걸 방탕하게 쓰지 않는 겁니다. 유일한 이유죠. 그게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찾아낸 극복 탈출 투쟁의 방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