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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눈물의 씨앗 (스압)
게시물ID : panic_980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dbs4389
추천 : 34
조회수 : 4614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8/02/23 02:38:56



*무서운건 아니고 약간 환상적 요소가 있는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인생에 있어서 특정한 시기를 계절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무렵은 겨울임이 분명했다. 친구들과 속초에 바다를 보러 갔다. 패배자들의 여행이었다. 반 친구 이름 옆에 써진 ' S대학교 合, K대학교 合' 이런 글씨만 눈에 띄어도 우울해졌고 사람들 웃는 얼굴이 보기 싫어서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사회의 불량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언제든 만회할 기회가 있을거라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분위기는 쓸쓸했다. 잿빛 바다를 향해 각자 좋아했던 여자애 이름을 정신나간 듯이 부르짖었다.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던 1살 어린 귀여운 여고생 이름을 외쳤다. 

'J야, 오빠가 많이 사랑했다ㅠ' 

물론 그녀는 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거다.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 부끄럽고 병신같은 일이다.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해 보였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이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가고 뜨거운 갈채와 시샘어린 질투를 받았다. 난 특별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평범한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자존심의 누각을 세우고 그 위에서 몸집만 잔뜩 부풀렸다. 들보는 물에 젖어 썩어 있었고 기둥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온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겁에 질려 재수를 결심할 용기조차 없었다.

강의실 복도는 컴컴한 던전처럼 공포스러웠고 시간은 무한히 느리게 흘렀다. 후회와 무기력은 나를 헤어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끌어들였다. 학교에 나가질 않으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 학교 생활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몇 주만에 출석한 날은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 있었다. 문 앞에 붙은 시간표를 네 번, 다섯 번 확인해보아도 시작 시간까지 오는 사람이 없었다. 법원에 단체로 견학을 다녀왔다고 했다. 아무도 견학 일정을 알려 주지 않았다. 내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언제나 도전적이고 자신만만하고 사물의 밝은 면을 보려 했던 인간은 죽어버렸다. 매일 도서관에 쳐박혀 니체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음울한 책을 읽었다. 밤에는 재수하는 친구들 독서실에 찾아가 소주와 막창으로 끝없는 허무와 무기력를 채우려 노력했다. 연기가 자욱한 당구장, 피씨방과 스타크래프트, 옥상 구석의 담배 피우는 곳, 어두침침한 1인실 독서실 같은 이미지들이 대학 1학년 시절을 가득 채웠다. 이런 염세적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좀 더 즐겁고 인간답게, 귀여운 여고생에게 고백도 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같은 과 동기들은 가끔 수업에 들어오는 나를 완전히 외부인 취급했다. 나도 그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포기해버렸다. 학교는 무한히 넓은 광장이었고 난 폐소공포증에 걸린 것 같았다. 넘어야 할 벽도, 열어야 할 문도, 자물쇠 조차도 없었지만, 미지의 힘에 의해 감금되어 있었다. 철창 사이로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에도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를 느꼈다. 아무도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무도 나의 행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애정을 표현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인간이 고안해낸 벌 중에 이보다 가혹한 형벌은 없으리라. 

군대에 가기로 마음 먹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미궁에서 밝은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군대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느정도 진실이었다. 참 아이러니 하면서도 재미있는 것은, 육체적으로 가장 혹사당할 때 비로소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의 정신은 그런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머리를 박박 깎고, 밥 먹으라고 할때 밥 먹고, 삽질하라고 할때 삽질하고, 때릴 때 군소리 없이 맞으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근육과 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뭘 하든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 훈련소 조교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새벽에 가끔 깨워서 족발 한쌈에 소주도 몇잔씩 먹여줬다. "이새끼 졸라 찐따 같이 생기지 않았냐, 너 미아리 몇번 갔어? 여자 먹은 썰 하나 풀어봐" 이딴 농지거리를 하는 정도였다. 사격을 만발 맞췄고 수료할 때는 상장과 메달도 받았다. 그런 소소한 성공에 힘입어 자신감을 조금씩 찾았던 것 같다. 흐릿하던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가는 것 같았다.

봄은 매년 찾아오지만, 대학 4학년의 봄은 조금 더 특별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려보면 섬유 유연제 같은 달콤한 향기가 훅 불어와 마음을 간지럽힌다. 칙칙한 암갈색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그때만큼은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차 있었고 환한 햇살이 있었고 푸릇푸릇한 여자 사람이 있었으니까. 내 인생에서 진정한 봄은 그때였음이 분명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밝은 인간이었고 꿈과 사랑이 있었다.

나른한 봄볕이 비춰드는 교양 미술 수업이었다. 화면에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보티첼리의 비너스 비교 영상이 떠 있고 학생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수업에 몰두해 있었다. 나는 연습장에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원시 미술 파트인 모양이다. 유럽 여행을 다녀오면서 미술 관련 서적을 댓권 읽었던 터라 수업은 별 새로울게 없었다. 정신은 육체를 이탈하여 창 밖으로 향했다. 남녀 한쌍이 부끄부끄한 미소를 주고 받으며 녹색 소주 박스를 옮기는 중이다. 봄나물 씹는 맛이 나는 풍경이었다. 달달하면서도 씁쓸했다. 

"거기 창가쪽에 앉은 학생."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황급히 정신을 소환했다. 온 교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날 부른게 맞는지 확신이 없어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까."

"........"

"잠시 일어나봐요."

흩어지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사랑?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머릿 속이 새하얗다.

"사랑은...음...눈물의 씨앗입니다."

순간, 교실 전체가 빵 터졌다. 뜻밖의 상황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우두커니 서서 까르르 웃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뭐야? 웃기려고 할땐 아무도 안 웃더니 진지하게 대답하니까 터지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텍사스성 안타에 기분이 좋았다. 분위기가 잠시 진정되고 교수가 말했다.

"하하하, 재미있는 친구로구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랑은 잘 모르지만, 생각할때 마다 가슴이 쓰리고 슬퍼져서요."

"그래요, 앉아도 좋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교수는 빙긋 웃으며 강의를 이어갔다.

"오늘 사랑에 대해서 재미있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표현이 저도 마음에 듭니다. 저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예술과 사랑이라는 주제가 '닮기' 라는 키워드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랑은 상대방을 닮아가는거지요. 단순히 겉모습을 모방하거나 몸동작을 흉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 몰두하고, 나를 완전히 맡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술의 원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물을 단순히 모사하거나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움직임과 울음 소리를 따라하는 고대 제의, 귀신이나 혼백의 소리를 내뱉는 주술사, 이런 것들이 어쩌면 예술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일 수 있어요. 철학자 아도르노는 '닮기'라는 개념을 미메시스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연인들끼리도 자기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서로 미메시스 해야 된다는거 잊지 마세요. 오늘 수업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복도를 지나갈 때면 여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저 사람 그때 눈물의 씨앗 그 사람 맞지. 킄킄" 조소 어린 뒷담화로 들렸지만 애써 개의치 않았다. 투명인간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삐에로가 되는게 덜 고통스러우니까. 수업이 끝나고, 교수가 조별 발표수업을 할 예정이니 원하는 사람끼리 팀을 짜라고 했다. 어영부영하는 동안에 한무리씩 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음이 슬슬 바빠졌지만 누군가 불러주는 사람이 있겠지 하고 거짓 여유를 부렸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나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젠장, 삐에로가 아니라 투명인간이었다.

"아직 팀 못짠 사람 있나요?"

나를 제외하고 남자1명, 여자1명이 손을 들었다.

"그럼 그 3명이 한 팀입니다."

눈치를 슬슬 보다가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한국말을 못알아 들었다. 띠용?? 몽골에서 온 교환 학생이라고 한다. 같은 동양인이어도 중국 학생은 중국인 같이 생겼고 일본 학생은 일본인 같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몽골인은 진짜 한국인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몽골 씨름이라도 하고 왔는지 몸이 거의 디아블로의 야만용사 수준이다. 절대 얘 앞에서 나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시골 청년처럼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손이 솥뚜껑만했다.

여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수업시간에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보호색이 강의실 색 그 자체인듯 배경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름와 학번을 소개 했는데 별 반응이 없었다. 차림새도 기묘했다. 커다란 헤어 집게로 머리를 대충 집었고, 입고 있는 티셔츠는 목이 늘어나 있었다. 화장도 전혀 하지 않았다. 수능이 몇일 남지 않은 고3 수험생 같은 느낌이들었다. 동공은 갈 곳을 잃었고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아,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사회의 불량품으로 낙인 찍힌 사람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눈가에 붙어 있는 짙은 불안과 피로가 그 증거다.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번호를 서로 교환했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다.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학교 후문 쪽에 있는 노점에 갔다. 정식 이름은 없고 통칭 후문 베이커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주력 메뉴가 야채빵인데 나름 먹을만 했다. 이름은 야채빵이지만 소시지와 케첩 맛으로 먹는다. 점심을 여기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12시에서 1시 30분 사이는 식당 출입 불가 시간이었으니까. 아싸 포스 풀풀 풍기는 동지들 사이에서 허겁지겁 야채빵을 먹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다. 수업 시간에 같은 조가 된 그 여자가 복잡한 눈빛을 보내며 지나간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당당한 척 먼 산을 바라봤다. 혼자 먹는게 어때서. 시발ㅠ

며칠 후 첫 모임을 가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조장이 되어 있었다. 몽골 성님은 한국어를 단어만 나열하는 수준이었고 나는 영어를 잘 못해서 대화가 매끄럽지 않았다. 여자는 말할 때마다 우리 얼굴만 번갈아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긴 하는데 알아먹은건지 알 수가 없다. 대화 도중에 계속 시선이 다른쪽으로 가 있었다. 짜증이 나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요, 집중 좀 해주세요."

반응이 없었다.

"집중 좀 하시라구요."

번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눈이었다.

"미앙해요. 제가 귀가 안들려여."

"아...그...아닙니다. 미안합니다."

하 시발. 진작 말하지ㅠ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어쩐지 말할 때 카셋 테이프 늘어난 것 같은 소리가 나더라니. 그냥 총체적으로 답이 안나오는 조합이었다. 한명은 몽골인이고 한명는 귀가 안들리고.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망해있었다. 몽골 성님은 눈치 없이 무슨 일이냐고 자꾸 캐물었다.

"쉬. 캔트. 히어."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키고 양손으로 엑스 표시를 했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을 보니 알아들은 눈치였다. 몽골 성님은 그녀를 보고 뭔가 알수 없는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손짓으로 화답을 했다. 수화인 모양이었다. 곰 같이 생겨가지고 별 재주가 다 있네. 여자는 나에게 입술을 보고 읽을 수 있으니 편하게 말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영어로 하기 어려운 말은 자기가 수화로 통역해 주겠다고 했다. 사지육신 멀정한 사람 사이에서 귀가 불편한 소녀가 통역을 하다니 기묘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둘이서 웃으며 수화를 주고 받았다. 나만 겉돌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소외된 조에서까지 소외되긴 싫었다.

"저도 수화 할 줄 알아요. 산(山)을 표현한 수화."

중간 손가락을 내밀었다. 둘다 키득키득 웃었다. 처음보다 분위기가 밝아진 것 같아서 기뻤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잠깐 나누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몽골 성님은 몽골에서도 변두리인 바이칼 호 근처가 원래 고향이라고 한다. 나이가 동갑이라 친구를 먹기로 했다. 생긴게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피핀하고 똑같이 생겼다. 몸은 우락부락하고 작은 눈은 항상 웃고 있었다. 너 피핀 닮았어 그러니까 피핀이 누구냐고 물었다. 사진을 보여주면 때릴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터키 지방에서 활약했던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군이라고 둘러댔다. 표정이 흐뭇해 보였다. 몽골식 이름이 워낙 길고 어려워서 그냥 피핀으로 부르기로 했다. 피핀도 자기 닉네임이 만족스런 눈치였다. 

귀가 안들리는 소녀는 이름이 린이라고 했다. 백린. "백.이.니에여" 하길래 "인희? 이름 예쁘다" 약간 상투적으로 칭찬했는데, 아니라고 해서 머쓱해졌다. 무용과에 다닌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목덜미도 가늘고 팔다리가 길어 보였다. 순백색 속옷을 고집할 것 같은 타입이다. 난 이런 사람이 싫었다. 슬쩍 다가가기만 해도 "냄새나니까 저리 꺼져!"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것 같았다. 배우 이은주처럼 가녀리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는데, 특정 발음마다 낮게 늘어지는 소리가 나와서 깜짝 깜짝 놀랐다. 이야기를 할수록 엄청 온순하고 착한게 느껴진다. 

조원들이 마음에 들었다. 난 겉모습과 실제 모습이 상반된 사람이 좋았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얼굴에 백치 같은 말투, 맨손으로 소도 잡을 것 같은 몸집에 순박한 웃음, 조로아스터교 교의와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탐독하면서도 핸드폰에는 짱구는 못말려 애니가 있는 사람. 어쩐지 인간적이지 않은가. 양면성이 드러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진실한 사람이다. 

발표의 테마는 '신화와 전설이 깃들어 있는 예술' 이었다. 그리스 미술 위주, 한국의 경우 무영탑 설화 같이 식상한 아이디어만 떠올라서 답답했다. 독특하고 눈길을 끌만한 주제를 찾고 싶었다. 피핀을 보고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향에서 들어본 전설중에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없냐고 물어봤다. 피핀이 살던 곳이 시베리아에 가까운 지역이라 샤먼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마을의 평온을 기원하는 제의가 있는데 그걸 재현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조원들 눈빛이 번뜩였다. 피핀은 벌떡 일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운율에 맞춰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피핀 이자식. 어제는 쓸모없다고 치워놓은 잡동사니가 황금으로 변해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검색해서 샤먼 풍습을 다룬 영상을 같이 돌려봤다. 한국어로 된 다큐도 몇 편 있었다.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주술사는 화살로 몸을 찔러 자신이 불사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장면도 담겨 있었다.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면서 현대의 기계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경험해 볼 수 없는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PPT 자료를 만들어 간략히 설명을 하고 피핀과 린이가 퍼포먼스를 준비하기로 했다. 생각의 물꼬가 트이자 좋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주술사와 비슷한 의상을 준비하고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북도 빌려오기로 했다. 린이에게 안무를 좀 깔끔하게 다듬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엄지와 검지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뭔가 일이 착착 준비되어 가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종종 모여서 연습을 하고, 끝나면 차를 마시기도 했다. 아싸와 몽골인과 귀머거리 소녀. 기묘한 동행이었다. 같은 수업 듣는 사람들은 우리 모임을 외계 생명체 보듯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런 시선이 강의실 공기를 찔릴듯 날카롭게 만들었다. 린이의 표정은 불안했고 눈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화가 나면서도, 린이가 나랑 같이 다니는게 창피해서 그런가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린이는 예전에 알던 사람과 마주쳐서 그렇다고 말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웠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조별 과제 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학교 화장실에 앉아서 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린이 생각이 났다. 카톡 아이디가 특이했다. 난 아이디에 어떤식으로든 그 사람의 내면이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 편이다. dolphinhotel1201. 돌핀호텔? 숫자는 1201호를 말하는 건가? 호텔이라는 어감이 뭔가 꺼림칙하다. 남자친구와 관련있는 단어일수도. 머리가 복잡하다. 갑자기 교활한 책략이 떠올랐다. 발표 자료 검토를 핑계로 카톡을 날려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떠보는거다. 역시 JQ(잔대가리 지수) 하나는 상비군급이다.

나 : 린이야 머해

린이 : 저 학교 다와가요. 왜요

나 : 발표 자료 완성했는데 한번 읽어보라고 크크

      (자료.ppt)

린이 : 수고하셨어요 오빠!

나 : 에이. 뭘 크크 근데 점심은 먹었어?

린이 : 네 ^-^(이모티콘) 오빠는 점심 드셨어여?

나 : 난 좀 있다 먹으려고 크크 학교 오면 강의실로 바로 와. 피핀도 이리로 오기로 했어

린이 : 네!!

젠장. 철벽이다. 변비에 걸린 것 같았다. 한참을 앉아서 스포츠 기사만 보다가 일어서려고 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가고 나면 나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소심병 환자들의 특징이다. 내 의도와 상관 없이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근데 걔네들 졸라 노답 아니냐. 덩치 큰애는 몽골인이래. 크크"

"걔 여자애 나랑 같은 고등학교였잔아."

"진짜?"

"응. 걔 생긴건 예쁘장하게 생겼잔아. 한 학년 위에 노는 선배가 고백했거든. 귀가 안들려서 그냥 쌩까버렸대. 그거 소문나서 엄청 괴롭힘 받았어. 그 선배 쫒아다니던 여자들 찾아와서 소각장에 막 끌려가구. 그때부터 친구 하나도 없고 졸라 불쌍했는데"

"진짜야? 크크 근데 그 찐따같이 생긴놈이랑 썸타는 분위긴거 같지 안냐."

"몰라. 한번 줬을 수도 있고. 킥킥."

소변기에 물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깔이 뒤집힐 것 같았다. 벨트를 잠그고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 저쪽으로 남자들이 히히덕 거리면서 걸어가는게 보였다. 

"야이 개XX들아. 다시 한번 말해봐. 다시 말해보라고." 

아무나 한놈 멱살을 잡고 몰아부쳤다. 

"남자새끼들이 모여서 몸 불편한애 놀리니까 재밌냐 X새들아"

그놈은 눈을 크게 뜨고 놓으라고 팔을 뿌리쳤다. 또라이 새끼라고 욕을 했다. 주위 사람들은 일단 놓으라고 나를 잡아당겼다. 아구창을 아작내버리고 싶었다. 풀무질을 하듯 거친 숨만 씩씩 내뱉았다. 그놈들은 미쳤냐고 밀치면서 나를 위협했다. 칠테면 쳐봐라 하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때 뭔가 거대하고 검은 물체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피핀이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몽골어로 소리를 질렀다. 엄청난 기세에 질려버린듯 그 새끼들은 뒷걸음질 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육두문자를 뱉으면서 멀찍이 쫒겨가버렸다. 나는 바바리안의 함성 스킬을 받은 것처럼 사기가 잔뜩 올라서 욕지꺼리를 내뱉았다. 피핀이 진정하라는듯 나를 껴안고 토닥였다. 피핀 이새끼, 여포의 백만대군보다 더 든든했다.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고 강의실쪽으로 몸을 돌렸다. 린이가 겁에 질려 서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무슨 상황인지 대충 눈치를 깐 모양이다.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시커멓게 멍든 린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울지말라고 어깨를 두드려 줬다. 린이는 손에 구깃구깃한 종이 봉투를 들고 있었다. 붕어빵 넣어주는 그런 흰색 종이 봉투였다. 나한테 그걸 내밀었다. 열어보니 후문 베이커리 야채빵이 들어 있었다. 까닭 모를 울컥함이 올라와 코 끝이 시큰해졌다. 진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모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다음으로 미뤘다. 피핀은 우리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린이랑 잔디밭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야채빵을 하나씩 나눠먹었다. 꿀맛이었다. 니가 사주니까 약 487만배 정도 더 맛있다고 말했다. 린이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두잔 진하게 타달라고 했다. 그리고 학교 근처 백양나무 거리를 함께 걸었다. 수직으로 쭉 뻗은 나무 사이로 봄 햇살이 반짝반짝 빛났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거나 맨손 운동을 하는 동네 주민들이 있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풍경이었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미터쯤 거리를 두고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걸었다. 커피를 한잔 다 비울 때쯤 린이의 눈은 불안의 기색이 어느정도 누그러져 있었다. 옆에서 걸어 줄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여자 아이와 함께 걷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오늘 고마어여."

아,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기분 좋은 소리다.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힘들었던 때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졌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여드름 투성이 졸업사진을 꺼내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다. 린이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말이 편하게 나왔다. 예전에 저질렀던 병신같은 일들, 괴롭고 후회되는 일들, 오래된 가족사까지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린이는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린이는 내 말이 언제나 외국어처럼 느껴질 것이고, 우리는 말이 서툰 외국인들처럼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듣는법을 배우는 것 같았다.

린이도 자기 이야기를 해줬다. 중학생 때 뇌수막염을 심하게 앓고 귀가 서서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고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할 수 없게 돼서 많이 방황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사소한 오해가 화근이 되어 엄청 괴롭힘을 받았다고 했다. 린이는 청력이 점점 떨어지면서 세상의 소리에서 멀어져갔다. 이야기의 전말이 대충 보였다. 린이는 병으로 청력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비겁하고 파렴치하고 신성모독적인 인간들에 의해 중상모략을 당하고 박해를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잔인하게 짓밟고 소리를 강탈했다. 그것도 모자라 간잽이가 고등에 뱃속에 소금을 뿌리듯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려댄 것이다. 나쁜 새끼들.

무엇이든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졸업하면 무슨일이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나중에 국립 무용단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졸업 후에 유학을 고민중인데 혼자가려니 무섭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넌 어디서든 잘할 수 있을거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편해졌다. 자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린이는 후련해 보였다.

"근데 궁금한거 있어요. 예전에 수업시간에 뭐라고 하신거에요?" 

아, 린이는 들을 수가 없었지. 앞니를 잔뜩 빼서 나훈아 형님 표정을 모사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 말하겠어요~'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다. '어휴, 병신' 이런 표정으로 킥킥 웃었다. 세상의 풍파도 그녀를 거칠게 마모시키지 못했다. 맑은 개울물에 다듬어진 돌멩이처럼 반들반들 빛이 났다.

과제 발표를 하는 날이 되었다. 강의실 공기는 싸늘했다. 복도에서 시비가 붙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지만,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단의 지식처럼 내색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잘하고 싶었다. 부족해 보이는 인간들이 모여서 뜻밖의 성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 자체로 멋진 복수가 될 것 같았다.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화염병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 시켜야만 진짜 이기는 거다.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실전이 되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최선을 다해 무사히 브리핑을 마쳤다. 이제 피핀과 린이 차례다. 복도에서 준비하고 있던 피핀과 린이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계단식 강의실이라 약간 무대 같은 분위기가 났다. 린이는 새하얀 겉옷에 삼원색 빛깔 띠를 어지럽게 감고 있었다. 피핀은 검은색 겉옷에 까만 천으로 눈을 가렸다. 준비한 스피커에서 장중하면서 기이한 곡조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핀은 앉아서 북을 치며 알 수 없는 몽골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린이는 피핀의 주위를 돌면서 이국적인 춤사위를 보였다. 시커먼 거구와 새하얗고 호리호리한 소녀가 기묘한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 냈다. 피핀은 점점 주문에 몰입이 되었고 북 치는 동작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곡성의 한 장면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실전은 연습과 차원이 달랐다. 야만 전사의 기백이라고 할까, 불가해한 힘이 느껴졌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피핀은 검은색 눈가리개를 풀고 벌떡 일어나 린이의 몸동작에 맞춰서 무대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둘의 주고받는 춤사위는 수화 같이 느껴졌다. 거기에는 마법적인 신비함이 녹아 있었다. 모리츠 에셔의 '만남'이라는 그림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기묘한 만남이었다. 몽골인과 한국인의 만남, 전사와 귀머거리의 만남, 어둠과 빛의 만남. 나중에 혹시 부자가 된다면 이 장면을 청동 부조로 만들어 벽의 한 면을 장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신묘한 힘, 비밀스러운 공기로 그 공간을 채워줄 것이다.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두 손을 합장했다. '린이가 하고 싶은 일이 다 이뤄지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북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춤사위는 멈췄다.

발표가 끝났을 때 강의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교수는 혼자 감탄한 표정으로 손뼉를 치기 시작했다. 최근에 본 발표 중에 가장 인상 깊었다고 칭찬을 해줬다. 이게 바로 미메시스라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난 무대로 뛰어가서 피핀과 린이를 얼싸안았다. 피핀과 린이는 환하게 웃었다. 기쁨과 먹먹함이 같이 찾아왔다. 복수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승리의 여운을 만끽했다. 이대로 지나가기엔 뭔가 아쉬웠다. 저녁에 내가 자취하고 있는 옥탑방에서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학기 초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밤공기가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평상에 앉아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피핀은 한국 음식을 엄청 좋아했다. 김치나 쌈장도 잘 먹었다. 그러고 보니 피핀 어머니가 한국분이라는 이야길 들은 것 같다.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린이는 이번 과제를 준비하면서 피핀에게 많이 배웠다고 했다. 무용 배우면서 이 정도까지 몰입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춤에 대해, 예술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진짜 예술가는 피핀인 거 같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피핀은 누워서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서울 하늘에는 왜 별이 없냐고 물었다. 별은 그 자리에 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핀은 바이칼호 근처의 밤하늘과 광활한 목초지 이야기를 했다. 신비한 동화 속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린이는 눈을 반짝반짝하면서 '신기해 피핀'을 연발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매달려있는 굵은 빛덩어리들과 끝도 보이지 않는 초원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나는 죽기 전에 몽골에 꼭 가볼 것이다. 머릿속으로 그린 이미지와 비슷한지 꼭 확인해볼 작정이다.

얼근하게 취기가 올랐다. 피핀에게 아까 불렀던 몽골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피핀은 뜬금없이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노래를 잘한다고 한다. 린이는 어떡하냐고 린이를 쳐다봤다.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어렸을 때 어린이 합창단 같은 것도 했었단다. 술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학교 근처로 갔다. 노래방에 들어가면서 참 엉뚱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핀은 아는 팝송이 많았다. 라디오 헤드부터 브루노 마스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굵고 입자가 풍부한 저음이었다. 귀가 편안했다. 나는 얇은 음성이라 성시경이나 김연우 노래를 불렀다. 린이에게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다. 그냥 진동 정도만 느껴지겠지? 마이크가 몇 바퀴 돌고 린이도 한곡 하고 싶다고 마이크를 가져갔다. 거위의 꿈을 선곡했다. 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지만, 박자는 전혀 맞지 않았고 음은 뭉개져서 예쁜 소리가 아니었다. 

고음 부분에서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본인도 답답한지 어눌한 말투로 뭔가 말하려다가 결국 으앙 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가슴이 뭉클했다. 씩씩한 척 했지만 여린 아이였다. 나는 김경호 형님 노래를 선택해서 린이를 무대로 불렀다. 린이에게 마이크를 들고 입만 벙긋거리라고 시키고, 뒤에 숨어서 노래는 내가 불렀다. 린이는 눈에 물기가 가득한 채로 헤드뱅잉을 했다. 피핀이 핸드폰으로 그 장면을 찍어줬다. 나중에 같이 영상을 돌려보면서 엄청 웃었다. 

다음 수업부터 아무도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린이와 나란히 앉아서 수업 내내 필담을 주고받으며 놀았다. 별 시답잖은 내용이었지만 시간이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린이에게 주말에 같이 놀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가족과 롯데월드에 간 적이 있었다. 신밧드의 모험이라는 놀이기구가 있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그것만 네다섯 번 내리 탔다. 아직 남아 있을까. 초등학생 이후로는 놀이공원에 가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뭔가 그리운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말에 같이 놀이공원에 갈래?'라고 쓰고 린이에게 보여줬다. 린이는 눈을 좌우로 굴리면서 고민하는 눈치였다. 너무 부담스럽게 들이댄 건가 걱정이 됐다. 문득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구보씨가 찻집 아가씨에게 나들이를 가자고 제안하는데 아가씨는 잠시 머뭇거린다. 구보씨는 수첩에 OX로 답을 해달라고, 내일 아침까지는 절대 읽어보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나는 노트를 빼앗아서 내일 아침까지는 절대 확인하지 않을 테니 OX로 표시해달라고 적었다. 린이는 싱긋 웃더니 노트를 찢어서 한 손으로 가리고 뭔가 끄적끄적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번 접어서 나에게 줬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걸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 기다리냐고! 약속을 어기고 종이를 살짝 펴보려고 했다. 린이가 등짝을 때리면서 쪽지를 뺏으려고 팔을 뻗었다. 부끄러워서 그런가보다하고 종이를 쫙 폈는데 대문짝만하게 X라고 적혀 있었다. 하, 시발. 이럴줄 알았다. 구보씨도 X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진심 충격먹었다. 난 그냥 혼자 놀아야할 운명인가보다하고 받아들이려는데, X표시 아래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귀가 어지러워서 놀이기구는 못타요ㅠ 동물원에 가요^^' 난 음소거를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미칠듯이 기뻤다. 린이는 '병신^^' 이런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귀여운 술책을 부리다니. 린이에게 꿀밤을 먹였다.

20분 정도 일찍 나왔다. 햇살은 따사롭고 하늘은 깨끗했다. 너무 설레서 잠을 제대로 못잤지만 몸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린이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온갖 망상이 떠올랐다. 항상 화장기 없는 얼굴에 면티나 후드집업 같은걸 입고 다녀서 다른 모습이 잘 상상이 안됐다. 예전에 '너 화장하면 예뻐질 것 같아' 라고 하니까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건 엄청 못생긴 화장을 하고 있는거 같아요' 라고 답해서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늘은 어떤 모습이든 엄청 예쁘다고 칭찬을 해줘야겠다.

멀리서 린이가 오는게 보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용을 전공한 사람 특유의 팔자 걸음이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얀색 테니스 스커트에 분홍색 반팔티를 입었다. 머리는 버섯 모양처럼 끝이 귀엽게 부풀려 있었다. 티셔츠 색이랑 맞추려고 했는지 볼에 가볍게 터치를 했고 눈을 깜박거릴때 마다 연한 살구색 아이쉐도가 보였다. 과즙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린이야 오늘 왜 이렇게 이쁘게 하고 왔어" 하고 인사를 건넸다. 린이는 수줍은 듯이 웃었다. 린이를 데리고 동물원으로 들어갔다.

보이는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귀를 간지럽히는 새소리에도 감사했고 공기에는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꽃밭에 온갖 종류의 꽃이 만발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린이가 제일 예뻐보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 천사의 은총을 표식하는 깃털이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반듯한 눈썹, 차분하게 내뱉는 숨소리까지 모든게 다 좋았다. 핑크빛 포자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 오장육부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 입은 귀에 걸렸고 눈은 하트모양으로 변했다. 사랑의 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린이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정신없이 나를 끌고 다녔다. 얼룩말도 보고 코뿔소도 보고 캥거루도 보고 공작도 봤다. 오후의 볕은 후끈후끈했다.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앉아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린이의 목은 땀에 젖어서 촉촉했다. 머릿카락이 몇 가닥 엉겨 붙어 있었다. 흰색 손수건을 꺼내서 땀을 닦았다. 뭔가 린이스러운 모습이어서 엄청 귀여웠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매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린이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이제 어디갈까 했더니 돌고래 쑈를 보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공연장으로 이동해 제일 앞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련하시는 분들이 나와서 돌고래를 한마리씩 소개했다. 손짓에 따라 재주를 넘기도 하고 후프를 던지면 그걸 주둥아리에 걸어서 돌리기도 했다. 조련사가 뭔가 신호를 보내자 일제히 날카로운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린이가 신기하다는 듯 물개 박수를 쳤다. 나는 린이가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는게 더 재미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휘리릭 지나갔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린이가 카톡을 보내왔다.

린이 :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요

나 : 난 너무너무너무 재미있었어 크크 

린이 : 크크 돌고래 꼭 보고 싶었거든요.

나 : 돌고래 엄청 좋아하는구나

린이 : 네 너무 귀여워요

린이 : 돌고래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초음파 영역으로 대화를 한대요. 신기하죠?

나 : 오 진짜? 

갑자기 뭔가 떠오르는게 있었다. 린이 카카오 계정의 의미가 이해가 됐다.

나 : 근데 너 혹시 카카오 아이디랑 그거랑 관련 있는거야?  

답장이 없었다. 2분 정도 지난 후에 답장이 왔다.

린이 : 그건 비밀 ^-^(이모티콘) 

린이 : 잘자요!


날이 점점 더워졌다. 사람들은 반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강의실에는 에어컨이 돌아갔다. 연락이 다소 뜸하다가 린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학교 안에 카페에서 잠깐 만나자고 했다. 린이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찍 왔네. 왠일이야 먼저 연락을 다 하고."

"오빠. 6월 6일 생일이져. 왜 이야기 안했어요."

"아 그러네. 나도 잊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생일이 몇일 안남았다. 생일날 문자라도 보내주는 사람은 아웃백하고 XX미용실 이런데 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자취방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혼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린이는 배시시 웃으며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예쁘게 포장된 네모난 꾸러미였다. 

"선물!"

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가 그날 일이 있어서 학교에 못 나올 것 같아서요. 미리 축하드리는거에요"

"너무 고마워. 나 여자한테 이런거 처음 받아봐"

린이는 '그럴줄 알았어 병신아 ^^' 이런 표정으로 웃었다. 괜히 말했나보다. 

"지금 뜯어봐도 돼?"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두 권으로 된 양장본 책이었다. '양을 쫒는 모험'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었다. 하루키 소설을 여러권 읽었지만 이건 처음보는 제목이었다.

"와우, 너 책 읽는거 좋아하는구나. 나도 책 엄청 좋아하는데. 하루키 말고 또 누구 좋아해?"

"음...기욤 뮈소 소설 좋아해요."

"아 큐트 스마일. 재밌는거 많지."

린이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무슨 뜻인지 깨달은듯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린이는 이런 개그 좋아하는구나.

"아무튼 잘 읽을게. 고마워. 그리고 수업 빠지지 말고. 교수님이 다음 수업 시간에 자화상 그려서 제출한다고 하니까 그날은 꼭 나와."

"네."

린이와 카페를 나왔을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벌써 장마가 시작되려나. 흙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미세한 물 분자가 피부를 시원하게 적셔주는 것 같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린이와 남방을 뒤집어 쓰고 강의실까지 뛰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카페로 다시 돌아왔을때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6월 뱃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비가 그칠때까지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놀았다. 

집에 와서 가장 편한 자세로 선물받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어느날 일본 정계를 주무르는 거물 정치인의 대리인이 주인공을 찾아온다. 행방불명된 동업자 네즈미가 잡지에 어떤 사진을 게재했는데 그 사진 속의 양을 찾아오라는 의뢰였다.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광고업을 이어갈 수 없게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주인공은 북해도의 양 박사를 찾아가고 현지에서 숙박을 하게 된다. 호텔 이름이 돌핀 호텔이었다. 

주인공의 여자친구도 북해도까지 따라간다. 이 여자는 예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여자친구 직업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귀 사진만 찍는 '귀 전문 모델'이다. 전체적으로 신비하고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몰입해서 단번에 읽었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거기에 포스트 잇이 붙어 있었다. '1201은 제 생일이에요^^' 그렇구나.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아니, 그러고 보니 소설 말미에 여자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명확한 언급이 없었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다. 사실 관계를 굉장히 모호하게 서술해 놓아서 이해가 안가는 점이 많았다. 린이에게 카톡을 쳐보기로 했다.  

나 : 린이야 니가 준 책 다 읽었어 엄청 재밌다 크크

린이 : 벌써 다 읽으신거에요 대박

나 : 근데 궁금한게 있는데 마지막에 주인공 여자친구는 어떻게 된거야? 이해가 안돼ㅠ

린이 : 여자친구는 사라져요 ^-^(이모티콘)

나 :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린이 : 그냥 사라져버려요

나 : 응...그렇구나 알았어 암튼 고마워 수업시간에 보자

린이 : 네!

교양 미술 마지막 과제는 자화상을 그려서 제출하는 거였다. 종이나 재료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미술 전공한 사람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평소에 그림을 끄적끄적 해본 편이라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8절 도화지에 샤프로 얼굴을 그렸다. 린이는 수업 시간 내내 거울로 자기 얼굴만 관찰했고 피핀은 알 수 없는 괴생명체를 그리고 있었다. 생각 외로 잘 그리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깨진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그렸다. 교수가 왜 이렇게 그렸냐고 물으니 분열된 자아가 잘 드러난 것 같아서 그대로 그렸다고 했다. 교수가 고개를 끄덕거리는걸 보니 마음에 든 눈치다. 옆을 슬쩍 보니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자신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교수가 지나가다가 내 그림을 보고 물었다. 

"귀에 붕대를 감았네요. 본인이 고흐라고 생각한겁니까?"

"그런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그렸어요?"

"음...예전에 어떤 광고에서 암투병중인 친구를 위해 반 친구들이 전부 머리를 깎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뭔가 가슴이 뭉클하더라구요. 제가 아끼는 친구중에 귀가 안들리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려봤습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우우' 하고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멋있다'라고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이 닥쳐왔고 우리는 전공 공부를 하느라 각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시험이 끝나고 몇일이 지났을 때 피핀에게서 연락이 왔다. 교환 프로그램이 끝나서 몽골로 돌아간다는 메시지였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시 보자고 했다. 카페에 갔더니 린이도 와 있었다. 한 학기가 진짜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피핀과 린이를 봤을 때가 떠올랐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고 백안시 했었는데. 만약 인격에도 향기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사프란이나 용연 향이 날 것이고 내쪽은 상해버린 우유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피핀은 내쪽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수화를 배워'라고 말하고는 린이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내 손을 잡고 '굿바이 브로' 라고 했다.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정말 형제처럼 느껴졌다. '피핀이 누군지 검색해봤어' 라고 말하고 헤드락을 걸었다. 죽는줄 알았다. 그렇게 피핀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메일을 가끔 주고 받았다. 몇년간 연락이 없다가 하와이쪽에 있는 대학으로 박사 과정을 하러 간다고 메일이 왔다. 해변에서 뭔가 알로하스러운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멋지다 피핀. 나의 형제여.

린이는 졸업이 가까워서인지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준비하는 시험에 전념하기 위해 2학기는 휴학을 신청했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달에 한 두번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나는 도서관과 자취방만을 오가며 시험에 집중했다. 자기 전에는 틈틈이 수화를 연습했다. 슬슬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는 2월 쯤이나 수화를 써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린이에게 연락이 왔다. 린이 생일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린이는 뜻밖에 대담한 제안을 했다. 파도 소리가 듣고 싶다면서 당일치기로 바다에 다녀오자고 했다. 난 숨도 쉬지 않고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지루한 수험 생활이 몇 달간 지속되다보니 뭔가 탁 트인 공간에 가고 싶어졌다. 린이와 함께라면 어딘들 좋지 않겠는가. 나는 친구에게 간청해서 하루 동안 차를 빌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수화도 연습했다. 사람은 항상 준비가 철저해야 하는 법이다.

순식간에 여행 가는 날이 다가왔다. 린이를 태우고 속초로 향했다. 쌩쌩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밀린 일상 이야기를 했다. 장거리 여행이었지만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눈내리는날 개처럼 백사장을 뛰어갔다. 끝없는 수평선이 보였다. 주위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았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린이의 머리카락이 세찬 바닷바람에 나부꼈다. 오랜만에 본 린이는 전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옷차림이나 외모를 말하는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치근거림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뭔가 단단한 심지 같은 것이 보였다.

"파도소리 들려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좋아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좋다고 말하면 린이가 서운해 할 것 같았다.

"그냥...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지 뭐. 크크. 그냥 쏴아 쏴아 하네."

린이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멀리 흰 방파제와 테트라포드가 보이고 끄트머리에는 붉은색 등대가 서 있었다. 5년전 그대로였다. 다만, 바다색은 전혀 달랐다. 그때는 분명 '해변의 수도승'에 나오는 바다처럼 시커먼 잿빛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짙푸른 암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인도 철학의 가르침이 맞았다. 세상은 거대한 정신에서 탄생한 모양이다. 땅의 밑바닥을 거북이가 받치고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액체 위에 땅이 있고, 대륙이 움직인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애초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다.  

린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모래바닥에 뭔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뭐라고 적은건가 궁금해서 다가갔을 때, 파도가 밀려와 글씨가 사라져버렸다. 린이는 빙긋 웃었다.

"파도 소리 들어보실래여?"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됐지만 그냥 보고있는게 좋아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린이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는 물결을 묘사하는게 아니었다.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나고 백사장에 부딪혀 부서지는 모습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예술적 상상력이란건가.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린이의 몸짓에서 진짜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린이에게 목소리와 숨소리, 들뜬 발소리를 들려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린이 곁으로 다가가 린이를 덥석 껴안아 버렸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팔을 풀어주지 않자 포기한 듯 그냥 안겨 있었다. 알싸한 가글액 냄새가 났다. 여전히 깔끔쟁이구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저 할말 있어여."

린이가 품에서 살짝 떨어져 내 눈을 봤다. 

"나도 할말 있어."

나는 머릿속으로 사랑한다는 수화를 상기했다.

"저 유학가여."

"................."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린이의 눈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너무 잘됐다, 축하해. 넌 어디서든 잘 해낼거야."

린이는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고마어여."

내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하아, 그때 그런 소원을 비는게 아니었는데...' 

나는 린이의 장애가, 린이의 결함이 우리를 더 끈끈하게 이어줄거라고 믿었다. 세상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지만, 린이라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그런 행복한 착각을 했었다. 정말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 바람이 세지?"

나는 린이 뒤로 돌아가 코트를 열고 린이를 품속에 안았다. 린이의 숨결, 린이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대로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던 린이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까 무슨말 하려고 했어여?"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린이는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보며 보챘다.

"말해주세요."

"그럼... 한번만 말할테니까 잘 들어야해."

린이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나는 린이의 등 뒤에서 어깨를 껴안고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린이야! 오빠가 많이 사랑했다!"

12월의 바닷 바람이 선뜩하게 옆구리를 찔렀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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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길 쓰자고 시작했는데 너무 혼자만 몰입해버린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부족한 점이나 고쳤으면 하는 점 댓글로 조언 부탁드릴게요.
설정이 엉망이라든가, 쓸데없이 어렵게 썼다든가, 어디 본듯한 이야기라든가, 개그가 노잼이라든가
뭐든 감사히 듣겠습니다 신랄한 비평도 좋아요^^

결론은....여자를 멀리합시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임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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