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아내가 오랜만에 오붓하게 영화를 보자고 했다

도서관 사서에게 부탁해서 추천하는 DVD를 빌려왔다고.

아내가 요즘 많이 밝아졌다.

약간의 푼수끼가 아내의 매력 포인트였는데,

밝아진 표정 덕에 그런 아내의 매력이 다시 살아났다.

아내가 밝아진게 나로서는 반갑긴 하지만...

뭐랄까...

결혼 8년차 아내가 한달 사이에 조금은 갑작스럽게 변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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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어느날.

아내는 용한 점집을 소개 받았다며 퇴근 후 나와 함께 가자 했다.

“우리 최 여사님. 그럴 돈 있으면 나 용돈을 좀 올려주는 건 어떨까? 응?”

아내는 눈을 흘겼다.



그 날 저녁.

아내는 만나고 온 무속인을 ‘언니’라고 불렀다.

요즘 아내에게 힘든 일이 많았는데,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아내를 보며 무속 신앙에 이런 순기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언니 너무 용한 것 같아. 생년월일시 알려주니까 대뜸 당신 왼손잡이냐고 물어보더라니까.”

“하하. 대한민국 인구의 10%가 왼손잡이인거 당신 잘 모르지?”

“그게 다가 아니야. 우리 3년 전인가 추석 연휴 때 하와이에서 교통사고 나고 당신 많이 다쳤잖아.”

“오—그런것도 맞춰?”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당신 친가쪽 오랜 조상님 중에 당신을 지키고 있는 분이 있대. 그런데 그 분이 설날이랑 추석에는 차례상을 받으러 가신대. 그래서 차례 지낼 때 당신이 본가에서 있어야 그 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대. 내가 이 얘기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 하와이에서 사고 났던 시간이 여기서 딱 차례 지낸 시간이더라구."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오랜만에 밝아진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당 언니 말이 자기가 모시는 신이 옛날에 당신 지켜주는 조상님에게 실수를 한 일이 있대. 그래서 복채도 안받았어. 내가 억지로 주려고 하는데도 끝까지 안받더라구.”

아내는 그 무속인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듯 했다.

나는 점이나 사주 같은 무속 신앙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 난 아내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또 무슨 이야기 들었는데?”

“당신이랑 나랑 요즘 좀 그래서 우리 궁합 봐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당신이랑 살면서 내가 조심해야 할 것들,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챙겨줘야 하는 것들... 뭐 그런거 이야기해줬어.”

“나한테 챙겨줘야 하는거? 어떤거?”

“당신한테 글 쓰는 재주가 있대. 나더러 당신 쓰는 글 봐주면서 칭찬 많이 해주래. 난 모르는 일이라 했는데... 당신 혹시 소설 같은 거 쓰고 그래?”

총각 때 취미 삼아 소설 쓰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사주팔자에 직업이나 취미 뭐 그런게 보이는건가?

“하하. 젊을 때는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긴 했는데... 나 글 안쓴지 꽤 됐어.”

“거봐—그 무당 언니 용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또? 나 뭐 챙겨주래?”

“음... 그건 비밀이야. 말 안해줄꺼야.”

“혹시 나 용돈 더 챙겨주라는 말은 안해? 내가 요즘 사고 싶은게 있거든.”

아내는 눈을 흘겼다.

그리고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뭐?”

“무당 언니가 다시는 자기 신당에 오지 말래."

“왜?”

“살면서 얼굴 두번 보면 좋지 않은 인연이 있대. 나랑 자기가 그렇다고 다시 오지 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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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빌려온 영화.

재미있는 설정의 이야기였다.

매일 얼굴이 바뀌는 남자 주인공과 미모의 여자 주인공 사이의 사랑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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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라는게 정말 신기한거 같아요. 기타에서 나는 소리가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다는게..’
‘라미레즈. 호세 라미레즈. 이 기타 이름이요.’
‘이 곡… 알아요?’
‘네. 이 곡 들어서 깜짝 놀랐어요.’
‘왜, 왜요?’
‘그냥 나랑 좀 비슷한거 같아서요. 우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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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주인공을 놀라게 한 곡.

Amapola라는 곡이다.

영화에서 처음 나왔을 때 나 역시 놀랐고,

그 곡이 배경음악으로 깔릴 때마다 그녀와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녀와 헤어진 날이 2005년 12월 3일.

그 해 첫눈 내리던 날이니까..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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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4일.

그날은 나의 스물 일곱살 생일이었고,

그녀와 내가 사귀기 시작한지 3주년이 되는 날이었으며,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방한 공연이 있기로 한 날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준비한 날이기도 했다.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라며 그녀는 모리꼬네 공연 티켓 두 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공연이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나는 모리꼬네의 영화 음악 파일을 구해서 그녀의 MP3 플레이어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나면 함께 모리꼬네의 음악을 들었다.

지하철에서, 조용한 밤길을 걸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서, 커피 가게에서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함께 음악을 들었다.

“오빠는 어느 곡이 제일 좋아?”

“글쎄… The Ecstasy of Gold..?”

“역시…”

“왜?”

“음... 오빠는 나랑 좀 다른거 같아서.”

그녀의 MP3 플레이어 ‘모리꼬네' 폴더에는 Amapola(1)에서 시작해서 Amapola(8)까지 있었다.

그래서 랜덤 재생으로 노래를 들을 때면 세곡에 한번 꼴로 Amapola가 재생되었다.

“하하. 사실 나도 Amapola가 제일 좋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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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모리꼬네의 공연을 며칠 앞둔 어느날.

나는 공연이 전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공연 후 프로포즈를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수화기 건너편에서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것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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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던 날.

결혼하자는 나의 말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랑 같이 살려면 오빠가 많이 힘들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뭐가 힘든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우리 제주도에서 살아.”

“왜… 제주도야?”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거기서 살면 내가 좀 더 건강해질 것 같아서.”



특별히 병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다 했다.

약속 몇 시간 전에 갑자기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작은 노트북을 하나 마련했다.

그녀가 약속을 펑크내면 주변의 커피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짧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 그녀를 만났으면 뭘 했을까 상상을 하며 글을 쓰기도 했고,

머리 속에 맴돌고 있는 소재가 있으면 그걸로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녀는 나의 습작 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다.

그녀는 종종 노트북을 열어 나의 이야기를 보았고,

글을 읽으며 그녀가 받은 느낌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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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마지막 주말.

프로포즈를 기념하며 우리는 함께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를 고르면서 그녀는 섬이 좋다 했다.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지 않은 섬.

그런 멀리 있는 섬에 가고 싶다 했다.

우리는 울릉도로 향했다.



울릉도에 들어온 다음날.

그녀는 평소에 비해 생기가 있어보였다.

우리는 성인봉을 함께 올랐다.

성인봉 정상은 안개가 자욱했다.

산 아래 보이는게 구름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성인봉에서 나리분지 방향으로 내려왔다.

주변 봉우리들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나리분지.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유리된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옛날 이야기 속.

산에서 길을 잃은 선비가 자신을 인도하는 노루를 따라가서 찾았다던 신비한 마을.

그런 마을이 정말 있었다면 나리분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음날.

우리는 관음도에 갈 계획이었다.

그녀는 전날 등산을 하며 무리했는지 몸이 많이 안좋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겠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다 했고,

결국 나는 혼자 숙소에서 나왔다.

주변의 커피 가게에 들어가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밤 꿈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야기를 완성하고 나는 도동항 근처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저녁이 되어 나는 숙소로 돌아왔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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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들었을까..

목덜미가 서늘하다.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몸이 뻣뻣해진 듯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게 가위에 눌리는 건가?

나는 가위에 눌린 경험이 없다.

가위에 눌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무척 신기해 했는데...

의식이 또렷한데 어떻게 몸을 못 움직이는지 궁금했다.

드디어 나도 가위를 경험하는구나.

두려움 반 설레임 반.

목을 조르기 시작하는 존재에 몸을 맡긴다.

내 가슴팍에 올라탄 존재의 형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목을 누르는 것 같은데...

목에 서늘한 느낌만 있을 뿐,

숨이 막힌다거나 특별히 불편한 느낌은 아니다.

순간 나의 오른팔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어—이건 뭐지?

내가 팔을 올린게 맞긴한데...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내 팔의 움직임을 통제하는게 어색하다고 해야하나..?

게다가 나는 왼손잡이인데..

나의 오른손이 녀석의 목덜미를 감싼다.

녀석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녀석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오른손을 통해 녀석이 느끼고 있는 공포감이 전해온다.

나의 목을 누르고 있던 녀석의 손이 서서히 풀리는 게 느껴진다.

나의 의식 한편은 손아귀에 잡힌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한다.

다른 한편의 의식은 공포에 떨고 있는 녀석을 놓아주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을 놓아주려는 쪽 의식이 다급해진다.

다른 쪽 의식에게 이제 그만 놔 주라며 애원한다.

나는 이제 가위에 눌린 상태가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제발 그만!!

순간 가위가 풀린다.

그리고 내 위에서 목을 조르던 녀석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

내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그녀는 노트북을 열어 내가 쓴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이거... 무슨 이야기야?”

“아... 아까 도동항에 혼자 나갔을 때 그 때 쓴거야. 좀 무섭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어?”

“어젯밤에 가위 눌린 것 같았는데... 나 그런 경험 처음이거든... 그래서 글로 남겨두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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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서 돌아오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영화에서처럼 흰눈이 예쁘게 내리는 날.

그녀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녀를 계속 만나면 내가 아플꺼라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예쁜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내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픈게.. 나 때문이라고.

먹고 있는 약을 이제 그만 먹고 싶다고.

그리고 이제 자기를 그만 내버려 두라고.

내게 악을 쓰는 그녀의 얼굴.

가위에 눌렸던 밤 나의 손아귀에 잡혀 두려움에 떨던 존재의 얼굴.

두 얼굴이 내 눈 앞에서 오버랩 되었다.

나는 가위에 눌린 듯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떠나갔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얼룩져 보였던 그녀의 뒷모습.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 쌓인 하얀 눈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도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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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났다.

아내와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아내는 졸린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나 있잖아... 영화에서 나왔던 노래 들은 적이 있어.”

“노래?”

“응... 남자랑 한효주랑 음악 감상실에서 들은 노래.”

“그 노래 알아?”

“몰라. 그런데 나 예전에 말했던 무당 언니 있잖아...”

“응.”

“그 노래... 거기 신당에서 들었어. 신당에서 그런 노래가 흘러나오니까 분위기가 좀 묘했거든.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나.”

나는 품에 파고드는 아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거 Amapola라고 꽤 유명한 곡이야. 그 점집 주인이 좋아하는 노래였나보네.”


— 끝 —


아마폴라 곡은 아래 링크에...
[아마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