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대작 시집 <만인보>(전 30권, 4001편!;;)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다룬 시가 두 편 있습니다. 한 편은, 제목이 사람 이름과 같음. <노무현>. 1997년에 쓰여져 13권에 수록되었죠.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오직 힘찬 불빛 어리석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으리으리 광내는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분노 같은 진실 때문에
그대 대한민국의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속으로 격렬한
누가 몰라주는 진실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 편은, 2010년에 발표되고 27권에 수록된, 제목만 봐도 짐작이 오는, <봉하 낙화암>입니다.
그 죽음은 무덤이 없어야겠다 차라리
백년 지나도
오늘일 것
백오십년 지나도
어제일 것
긴 씻김굿판 어떤 억울한 독창도 억울하지 않은 합창일 것
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원래 이분이 대단한 시인이긴 해요. 만인보라는 엄청난 계획을 완수하셨다는 점부터가;;
참고로 만인보에서 그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5.18 관련 시들. 애초에 이 대작 기획을 시작한 계기가 그때 구속된 일이었다고 하니까요...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시.
(27권 수록, <학살풍경화>
(27권 수록, <다시 5월 19일>)
(27권 수록, <대폭발>)
풍경 묘사부터 시작해서 각각의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을 조명하는 시까지, 이런 게 최소 323편은 더 있어요!;; 최소라고 한 건 더 많은데, 거기까지 세다가 포기했기 때문에.(...) 27권부터 30권까지는 태반이 5.18 관련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걸 다 읽어본 나도 대단...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