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더욱 더 방황하는 인간
게시물ID : phil_110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널소유하겠어
추천 : 0
조회수 : 37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3/29 01:07:14

"네가 고고성을 울리며 태어나던 날이 생각나는 구나."
흔히 내가 태어날 때, 모두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고들 표현한다.
나는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지옥불에 태어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웃는 것뿐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웃으며 태어난 아이를 반기지만,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떄 운다.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태어나는 것은 곧 정해진 죽음이 태양빛에 비친 그림자처럼 뒤따라 다닌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그 시작이 어디인지에 대해선 미지의 수 x를 남겨둔 채,
영원히 알 수 없는 행복, 어쩌면 지나갔거나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아마도 염세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표현하자면, 방황하고 있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죽음이라는 것에 반항해보며 더 가치있는 것을 만드는 것뿐이니까.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가? 이것을 물어보기에는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FAR) 지나쳐오고 말았다.
항상 삶의 무게가 나를 조여올 때 드는 생각은 후회다.
왜 후회를 하는지 여쭈어본다면, 일찍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있던 것이다.
뭐라고 말해주지 못하는 우리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애써 위로할 뿐.
미안하지만, 나 역시 진심으로 그들에게 위로해줄 수 없었다.

대게 많은 부모들은 아이를 가지는 것으로 새 삶을 시작할 거라고 믿는다.
일종의 채찍질과도 같다. 책임져야 할 커다란 무게를 자신들에게 쥐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책임감 앞에서 도망치는 무기력한 사람들을 우리는 손가락질 한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 도대체 왜 그랬어?"
이런 원망 가득 담긴 말들이 그들에게 돌아갈 뿐이다.
반대로 책임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연민을 느끼고 동질감을 느낀다.
"원래 다 그런 거야."
누구나 죽듯이, 누구나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다는 말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한 아이의 부모는 남들처럼 특출난 것 없이 살아간 자신의 무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스스로 심판대 위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라는 이름으로 그를 책임지며,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죄의식이 자식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이 불쌍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책임을 끝까지 쥐고가는 것.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은 오래 전 이야기고, 그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자식에게 부여하고 있는 샘이다.

곧 자식이 살아있음에 안심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서 '책임감'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바로 희망, 어쩌면 어리석은 거짓.
그런 부모에게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스스로 자식이 부모를 내쳐보낸다면, 그들은 용납할 수가 없다.

자신이 만든 책임감 앞에 그것을 등에 업고 나아갔는데 돌아오는 것은 배신이라니?
그런 딜레마에 빠진 사람에게 흔히 이혼한 가정에서 다시 합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처럼,
결국 가족 주위를 겉돌아 차라리 살아갈 '목적'이라도 그 책임감이라도 다시 느꼈으면 하는 것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장치에 스스로 손가락이 절단된 샘이었다.
삶이란 결국 목적이고, 그 목적을 통한 동기부여다.
가령 위에 설명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우리는 책임감 앞에 무기력하지만,
또한 책임감 덕분에 삶이 더욱 활기를 띄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이 비극을 정리하는 것은 힘들더라도 가족이 합쳐지는 것.
그것이 불합리하고 불편하며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상시 주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더라.
왜냐하면 그들의 삶도 너무나도 불쌍하니까란 말로 설명한다면 납득이 간다.

결국 목적 없는 삶에서 방황하는 인간만 부각될 뿐이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나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뒤돌아보면 세상에게 배신당한 자신의 발자취만 보일 뿐이고,
그걸 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가락질하고 무능하다고 욕하고 있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영화 피에타에서 강도의 엄마라고 나타난 그녀가 그를 완벽히 속이면서 복수에 성공한다.
서로가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결국 남겨지는 사람들은 자각하는 사람들.
그게 거짓이라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책임감(돈) 앞에서 무릎 꿇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알게됐을 떄, 삶은 너무나도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위에 설명한 예시처럼 되려 배신당했다는 느낌에 깊은 허무를 느끼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속죄하고 싶다는 처절한 자기부정과 다가오는 죽음에 무기력하게 자살을 선택하는 것밖에.

하지만 나는 삶이 비극이라며, 이러한 이야기를 권유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남들에게 스마일을 짓게 만들기도 한다.
도대체 웃음을 주는 내가 나인가, 뒤에서 우는 내가 나인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그게 당연한 거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어 더욱 더 방황하게 된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돌아보며, 부모가 되고 어느새 자기의 길을 뒤따라오는 것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건 그렇게, 저건 저렇게, 이건 이렇게.
3세가 태어나면 그들에겐 주름 가득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조부모로써의 기억으로 남아있겠지.
나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런 지루한 삶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미래에 대한 꿈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현재다.
하지만 곧 닥칠 현재가 우리를 더욱 가혹하게 채찍질해댄다.
너무나도 아프다.

흔히 말하는 죽기 전까지 '가치있는 삶'을 만들어놓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러한 의문들에 종착점이 '죽음'뿐인데,
어떻게 우리가 더욱 가치있게 살다가 죽을 수 있을까? 물음을 던져본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책임이란 이름 속에서 헤엄치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유쾌하다.
그게 무엇이던 간에 결국 그걸 이루고 나면,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까? 란 딜레마가 찾아오기 때문.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마다 다르지만,
굵고 커다란 줄기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바로 꿈.

차라리 꿈을 이루지 않은 채, 영원히 꿈만 꾼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일까?
어쩌면 이루지 못할, 아니 이루기 힘든 거대한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일지도.
아마도 꿈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져버린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삶이 아니기에,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니기에, 결국 현재를 위해서만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내일은 태양이 뜨고, 그것은 나를 향해 비출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말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