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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은 남자사람친구를 잃었다.
게시물ID : bestofbest_983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ydreamer
추천 : 923
조회수 : 72925회
댓글수 : 3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3/02/04 02:54:37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2/04 01:32:02

쓰고보니 완전 스압인데요,

제가 처음엔 블로그에 정리하는 식으로 써서 반말이에요.

이해해주세요. ㅠ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서, 가끔씩 연락하는 남자사람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같은 반을 했었고, 참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첫 연애를 고2 말에 시작했었는데,

사귀는 거 애들한테 말하지 말자고 남자친구랑 약속해놓고

책사이에 끼워 몰래 주고받던 편지가 

하필 이 친구한테  걸렸었다.

그 때까지 우리가 뻘쭘해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못해봤던 터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랑도, 남자쪽하고도 어느정도 친한

그 남자사람친구와 같이 놀러가자고 꼬셨고

세명이서 놀러 다니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뻘쭘함이 가시고 난 첫 연애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되고도 남자사람친구랑은  가끔 연락을 했었다.

내 마음을 홀랑 다 줬고 나에겐 세상과도 같던 첫 연애가 끝나던 스무살 5월,

하필 헤어진 그 다음날 오래간만에 연락 온 그 남자사람 친구가

'나중에 OO랑 같이 한 번 보자 술이나 사줄게' 하는 바람에

거짓말 잘 못하는 내가 '사실 어제 oo하고 헤어졌어' 라고 이실직고를 했더니

밥사준다고 만나자고 하더라.


내가 다른 지방에서 학교를 다녀서 일주일 뒤 만났다.

그때까지 난 헤어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난 상태여서

주변에 헤어졌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도 알고, 남자쪽도 알고, 헤어졌다는 사실도 아는 친구를 만났더니

그 동안 눌렀던 게 꾹꾹 터졌다.

그 날의 일을 잊으려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바람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술먹고 신세한탄하고 울기' 류의 온갖 꼬장이란 꼬장은 다 부린 건 기억난다.

너무 부끄러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감정적으로' 제일 슬프고 힘들었던 날

날 안쓰럽게 바라봐주고 어설픈 충고도 안하고

괜찮다 괜찮다 해주던 남자사람 친구 표정은 잊을 수 없다.

내 얘길 이렇게 들어준 게 너무너무 고마웠다.


아 내가 얘한테는 진짜 잘해야지 싶더라.

그래서 의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연락도 꼬박꼬박하고. 문제 있음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가끔 만나서 밥 먹고. 술도 한두잔 할 때도 있었고.

둘다 술을 안 즐겨서 스무살 이후로 술은 관뒀지만.



그렇게 가끔 연락하는 사이로 지냈다.

방학 때 내가 고향가면 (요 친구는 고향에 있는 대학다녔음) 얼굴이나 보고.


이 친구는 방위산업체근무를 했었는데,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이 좀 다쳤단다.

Degloving injury 라고 아는 분은 아실건데,

엄지손가락쪽이 뼈만 남기고, 살갗과 근육이 모두 그렇게 되어서

바로 미세수부접합 전문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더라.


당장은 아니었지만 병문안을 갔다.

친절하고 잘 웃는 성격 그대로 헤헤거리는데 맘이 안 좋았다.

괜찮을 상황이 아닌데 괜찮다 괜찮다하고 있는게 빤히 보여서.


꽁꽁 싸매고 있어서 상처는 보이지도 않았다.

에라.

신경은 쓰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서 말동무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학교만 그 쪽이면 뭐 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결국 얘는 몇번을 재수술하고 몇 달을 입원했다.

지금도 엄지손가락은 짧고, 엄지손톱엔 흉이 있고, 피부도 흉터피부다.

겨울엔 가장 먼저 차가워지고.


수술한 병원에서, 장기입원 가능한 병원으로 옮기더니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연락해보니 퇴원은 했고

어학연수 겸 필리핀을 갔다왔다더라.

간다는 말도 안했었는데

싸이에서 물고기잡고 노는 모습이 정말 밝아보였다.


에이, 간다고 하면 연락이나 좀 해주지.

나한테 그 친구는 참 고마운 친구였지만 걔한테 난 별 의미 없었나부다.

내가 더 좋아하는구나. 그러고 말았다. 



사실이 그랬다.

유감스럽지만,난 주변에 사람이 있는 성격이 아니다.

친구도 정말 조금밖에 없고, 주변 사람들한테 잘 하지도 못한다.

그런 나같은 사람한테 이런 친구의 의미는 참 크지만


이 친구처럼 주변에 잘하고 사람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한테

나같은 친구는 그냥 여자사람친구 중에 하나구나.

내가 그렇지 하고 말았다.


그 뒤로는 많이 뜸해졌다.

사실 나도 공부가 빡센거라면 둘째가라기 서러운 학과를 나왔고

이 친구도 복학하고 정신없었을 거다.

또 실습을 서울쪽으로 가게 되어서 (고향은 경상도쪽)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한 2년만에 봤을까.

친구집 근처 공원에서 봤는데,

날씨는 좋고, 바람소리에 댓이파리들은 서걱거리고

오랜만에 좋아하는 친구 만나니 난 참 좋더라.


걷다가 벤치에 쉬게 되었는데

어쩌다 그랬는지는 잘 생각 안나지만

앉아서 친구한테 잠깐 기대게 되었다.


좋더라.

기대서 하늘보고 있는 게 참 좋더라.

이렇게 얘한테 기대고 있으니 좋구나. 하는 생각 솔직히 했다.


그런데 그 날따라 참 이 친구가 냉정했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을 시켜도 시큰둥하고.

같이 있어도 즐거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아까 얘기한 것처럼, 난 주변에 사람들이 잘 없어서

아 얘도 드디어 나한테 뭔가 맘이 떠났구나

난 정말 잘해주고 싶은 사람들한테도 제대로 못했었나보다

얘도 자기 생활이 있고 나랑 접점이 없다보니까 이렇게 멀어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난 다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서울로 취직했고

고향에 있는 이 친구한테서는 연락이 안오고

그렇게 시간만 지났다.


가끔 1년에 한두번? 많아야 네다섯번? 정도 잠시 안부를 물었을 뿐.


서울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름 똑똑하단 소리 듣고 컸지만 사회생활은 또 달랐다.

스트레스는 폭식과 야식으로 이어지고

징징거리는 남자친구는 감정적으로도 다른 면으로도 더 지치게하고

결국 4년을 질질 끌다 헤어지고

난 내가 점점 더 싫어지기만 했다.


그렇지만 친구하고 연락할 때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소리는

에이 남의 돈 벌기 쉽지 않네 정도였다.


나이가 드니까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짝을 찾기 시작했다.

부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머리만 아팠다.

인간관계의 좁음, 유지를 잘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컴플렉스가 많아서

그렇게 한 사람을 믿고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오래오래 같이 지낸다는게 엄두가 안났다.



그 날은 친한 언니가 결혼할 분을 소개시켜준 날이었다.

다른 것보다, 그 형부되실 분이 언니를 바라보는 그 사랑스러운 눈빛이 너무 부러웠다.




그랬다. 난 사랑받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하필 또 그 친구가 그날 연락을 했다.

되도록이면 남자 얘긴 이 친구한테 안했었는데..

(첫사랑때문에 꼬장부린 후에 너무 부끄러웠다 -_-)

그 날은 외롭다는 소리가 그냥 나왔다.


얘기해보라길래, 내가 원하는 사람 조건을 몇가지 이야기했다.


사실 평소엔 '자격지심없는 백수 ㅋㅋ' 라고 하고 다니긴 했지만

그 날은 좀 진지먹고

날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고

자상하고

가치관이 바른 사람

내가 뭔가 배울 수 있는 사람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사람 (내가 무교)

가족과 제대로 독립이 되어 있는 사람

뭐 이런 것들을 얘기했던 것 같다.


걔가 '난데?' 그러더라

뭐 다른 면이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야, 니는 내 안좋아하잖아. 

날 여자로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그게 젤 중요하다고' 라고 했다.



정말이지 그 긴 시간동안 걔가 날 여자로 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도 날 여자로 안 보는 사람은 단호히 끊을 수 있는 다행인 성격을 가졌고.

날 여자로 안 보지만 호의로 대해주는 사람을

내가 오해해버리면 도끼병도 그런 도끼병이 어디있겠나.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면서 연락이 잦아졌다.

난 또 내가 허전해하니까 얘가 사람 챙겨주는구나 싶었다.

몇달에 한번 하던 연락이 거의 매일이 되면서

'어, 혹시?' 라는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닌데,

이 친구의 장거리연애불가론을 들으며

아, 서울에 있는 나는 안된다는 간접적인 어필이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것 처럼

잘해주니 지 좋아하는 줄 안다. 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되기 싫었다.



하지만 저 '난데?' 발언 이후

아. 이 친구가 참 괜찮은 사람인데.. 라는 생각은 나한테서 점점 커져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잠을 자는데 이 친구가 꿈에 나왔다.

신사적인 모습으로 내 입에 지 입을 딱 맞추는 꿈.


깨고 나니 패닉이었다.

난 왜 도대체 이런 꿈을 꾼 것인가.

내가 얘를 남자로 보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왜 근데 도대체 싫지 않은건가.

꿈이라서 안 싫고 어색한건가.

아니 근데 실제라도 괜찮을 것 같은 이 기분은 뭔가.


@_@





그 와중에 이 친구랑 연락을 하는데 계속 마음이 복잡했다.

이 친구랑 사귀게 되면 어떨까 상상하게 되고..


그런데 무섭더라.

십년 넘게 알아온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둘다 결혼 적령기고,

둘다 짝이 생기면 이렇게 지내기는 힘들텐데

어차피 그 때 서먹해질 거면 지금 잃은거랑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직업이 정신적인 집중을 좀 요하는 직업이라

도저히 이 놈 생각에 일이 안되는 거다.




그래서 전화로 얘기해버렸다.

나 : 니가 나 안 싫어하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도 생각하나?


이랬더니 무슨 말이냔다.

뻔히 알 것 같은데 이런 식이니까 답답하더라.


나 : 아 그러니까 난 니를 남자로 보는 것 같은데 너는 어떠냐고!


하니까 대답이 없다.



나 : 싫으면 싫다고 하라고. 좀 마음은 안 좋겠지만 

      니가 아니라고 하면 끊을 수 있다. 나 그런 거 잘 한다.



또 잠깐 침묵



그리고 들려오는 말은..



"내가 어떻게 싫다고 하겠노..

니가 내 첫사랑이고.. 아직도 좋아하는데.."






........


그렇게 난 내 인생 최고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난 친구로 지내는 내내 내가 더 좋아한다고 생각해왔고

이번에도 나만 남자로 봤다고 생각했고

잃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하고 고백했는데...




지금 백일이 조금 못 되어 아직은 좋기만 하지만,

그래도 몇 안되는 연애를 하는 동안

이렇게 내 생각과 잘 맞고 날 이해하려고 먼저 노력해주고

내 편이 되어주려는 사람을 만나본 건 처음이다.


똥차가고 벤츠온다는 말이 정말인 것도 알았고..


정말 지금은 내 인생 최고로 충만한 연애를 하고 있어서 매일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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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신 분들 감사해요.

그러니까.. 남자사람친구를 잃고 애인이 생겼어요.

이런식으로 훼이크를 써서 죄송하구요.



그리고 사귀고 나니 남자친구가 오유인이었다는 게 유머네요.

남자친구가 열심히 말렸지만 ...

가입하고, 오유하는 남자친구가 보라고 여기에도 글 올려요.


그러니까 제 글 읽으시고

친구였던 사이에 고민하시는 분들 용기 내셨음 좋겠어요.

신뢰가 쌓인 바탕에 애정이 더해지니 시너지가 장난 아니더라구요.

남녀사이에 우정이 길게 지속되는 건 둘 중 한 사람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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