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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물가에 비친 가로등 불빛을 보고 생각했다.
게시물ID : phil_110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널소유하겠어
추천 : 0
조회수 : 44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4/01 00:53:52

어디에선가 분명히 나를 향해 비추리란 희망의 빛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존재하지 않으리란 실망감이었다.

우리의 존재여부에 대한 회의는 항상 남을 향해 투영하여 알아내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발생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책임감으로 감싸안는 거대한 비극을 가져가게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이 자신을 향해 비추는 희망의 등불을 마저할 사람은 없다.
예외는 있겠지만, 사랑하는 연인도 서로를 향해 비추는 이 등불을 마저하지 않는다.

모든 시작은 즐겁고 유쾌하지만, 모든 중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비극'만이 기다리지만,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그것은 느껴지는 가치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비추는 이 희망의 등불이 우리를 몹시나 가엾은 사람으로 만든다.
나도 남들처럼 행복해지고 싶다는 기대감을 만들어주고,
그 기대감은 당연히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모든 자식은 모든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 등불이다.
나쁘게 말해서, 모든 자식은 모든 부모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연인들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향해 비추는 이 거대한 불빛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나에게 거대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주며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가치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시작할 때' 뿐이다.

사춘기 소년은 부모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갱년기를 맞은 여성이 남편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연인들이 흔히 헤어지는 이유를 빌미삼아 말해조바면 그렇다.

익숙해지면 모든 것은 지겹고 불쾌감을 안겨준다.
새로운 낯선 것을 찾아 기대감을 잔뜩 부푼 채로 우리는
미지의 것을 탐험해나가는 여행을 꿈꾼다.

다시금 자기가 느꼈던 열정적이고 희망적인 '시작'을 바란 채,
다시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자신을 빛추는 저 희망이란 이름의 등불이란) 거대한 책임감 덕분에
우리는 그저 아니꼽게 깔려있는 아스팔트 도로를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

국적, 혼인으로 시작해 소속팀이나 학교, 단체같은 '속박'된 틀 말이다.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그러나 그것이 되려 속박하게 만드는.
어느 것이던 장단점이 존재하고 단점만 부각시키니 나쁘게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물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 단점은 너무나도 취약하며 거대한 모순을 지니고 있기에
장점에 파묻혀서 잊혀버리기에는 작고 단순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바로 삶에 있어서 절망이란 이름처럼.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추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주는 그러한 에너지를 받으며 그들의 미소를 위안 삼는 소소한 행복을 바란 채 사는 삶.
더불어 나를 비추는 저 작은 불빛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이 떠밀려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야속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

나의 존재의미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계속 희망이란 이름으로 조명되고 있었다.
기대감은 배신으로, 고된 노력은 책임이란 이름으로 끊임없이 어디론가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길 반복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 것처럼, 지구가 둥근 것처럼,
그 이유가 둥글다면 설명이 가능할까?

겨우 납득할 만한 대답은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니까."
왜 인생이 그래야만 하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침묵할 뿐이다.

이런 인간에게 주어진 문제의 해결은 너무나도 손쉽게 이루어진다.
무미건조한 삶에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일단 뛰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야만 하는 삶.

성공한 사람이 말하길, 그것이 곧 삶의 원동력이며 목적이 되는 바로 열정이란 이름.
그들에겐 그만큼 좋은 동기부여도 없을 뿐더러,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강렬한 믿음을 통한 자기합리 혹은 부정 뿐이라고 말해준다.

항상 실패한 사람들은 말한다. 사실 인생에 있어 모든 사람들이 결국 실패한 패배자로 남을 뿐이지만,
여기서 실패자란 '여전히 많은 여부를 남겨둔 삶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그 상태에 빠진 자'로 칭할 수 있는데
실패라는 단어를 이용해 마치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란 환상에 젖었던 사람들이 부르짖는 오만이 아니던가?
사실 어떠한 믿음도 결국 믿을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에 불과하니까.

말은 달라도 맥락은 같은, 그러나 그 뜻은 천지차별인 모순은 일상에 너무나도 많이 적용된다.
언어라는 이름이 아마 삶을 파괴하는 가장 큰 주범이 된 것일 수도.
그러면서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되는 아이러니.

'빛은 우리에게 삶의 비참함을 비춰주지만, 그 이유만으로 빛을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선택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비록 물가에 비친 한낱 가로등 불빛이 거짓된 희망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누가 요구를 했는가? 나 자신인가?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로 타인에게 비춰질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비춰줄 대상이 없어지자 나는 방황했다. 
'도대체 무엇을 향해 등불을 켜고 있는가?'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빛을 비춰주기 시작한다. 아니 꺠달았다는 것이 맞을지도.
'아마도 누군가가 나를 등불로 비춰주듯, 나도 누군가를 비춰주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 가보다.'
그 마저도 없었더라면 이 어두컴컴한 세상에서 존재의미를 잃어버렸을 테니까.

고작 그런 작은 믿음 하나로 살아가는 우리가 우습지 아니한가?
거울 앞에 선 나는 누군가를 향해 비추던 불빛이 나 자신에게 비추는 모순을 겪을 수 있었다.
"괜찮아." 오직 그 말 한 마디만 할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은 어렵다.
아니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그녀의 어두운 표정에는 여러가지가 담겨있었다.
자신에게는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동시에 자신이 그랬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하는 생각들을 정리해두는 것.

"도대체 내가 뭐라고 해주길 바라는데? 내가 대신에 그 책임을 져줄까?"
아마도 내가 그녀에게 주구절절 떠들어 댔다면 그녀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 때문일 것이다.
삶이라는 것도 그 기반은 이미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탄탄하게 세상을 다져나가는 것이기에,
결국 우리들의 운명은 나비가 될 애벌레가 아니라,
이 등불이 얼마동안 지속되느냐에 대한 기묘한 장치에 걸려 허우적대는, 결국 증발되어버리는 물과 같다.

흐르는 대로 흐르다가, 거슬러보지만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강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어 인정하며 다시 흘러내려가는
그렇게 깨끗한 강을 만들고 죽어 없어지면, 다시금 또 다른 누군가가 반복하겠지.
적어도 그녀는 그것이 옳은 삶이라고 말하니까 수긍할 수밖에.
나 또한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수긍할 수밖에.

하나만 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그렇다고 둘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더 가혹하다.
'요구'의 늪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나라면, 그것이 당연하단 이유로 합리화되는 것인가?
내가 나가 아니라면, 그것은 당연하게도 불합리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원래 불합리한 거라면, 그게 당연한 것이 되는 건가?

모처럼 비가 오길래 밤거리를 걷다가 문득 인도에 고여있는 물가를 만났다.
옆에 놓여진 텃밭에서는 정체모를 냄새가 나는데,
항상 비내리는 날 흙에서 나는 냄새는 이상하게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곳에 서서 나는 생각해봤다.

희망이란 이름이 얼마나 산산조각 났는지 테이프로 제아무리 비슷하게 붙여보아도
처음 보았던 그 기쁨을 다시 찾을 수가 있으랴.

아...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멍청한 내 잘못인지 약삭빠른 그자식 잘못인지
아니면 정체모를 신을 탓해야 하는지 태어날 때부터 갈리는 운명을 탓해야 하는지 말야.
심히 의심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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