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런, 표현이 과했군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나도 흔치 않은 일이란 거 알고 있으니까.
단어를 바꿔보죠. 살면서 위험한 순간을 겪은 적 있나요?
그래요, 그래. 다들 떠올릴 만한 순간이 있을겁니다. 나만 해도 한둘이 아닌데. 솔직히, 일상이라고 해서 우리가 100프로 안전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시간 때우는 셈 치고 들어보지 않을래요? 궁금하잖아요, 다른 사람의 일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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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들을 이야기는 한 여대생의 일상입니다. 당신이 여리여리한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미안하지만 집어던지도록 해요. 이 친구는 온갖 운동을 좋아하는 근육덩어리거든요. 우리 어릴 때 하나씩 배우던 태권도랑 수영에서부터 클라이밍도 하고 특공무술에, 심지어 주짓수까지 배웠어요. 맨손으로 휴대폰 부수는 걸 누가 봤었어야 했는데.. 그 때 유심칩이 부러져서 연락하느라 애먹었거든요.
아무튼 이 친구가 대학엘 가더니 자취를 했다 이겁니다. 대학생 하면 뭐다? 술이죠. 자취해 본 친구들은 알텐데 학기 초에 자취팸이 만들어지면 걔네들끼리 허구한 날 술 마시러 모이게 돼요. 내 자취방이 니들 방구석 되는 건 한순간이고.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답니다. 숙취에 쩔어있었는데, 군대 휴가나온 놈이 약속시간 전까지 뭉개다 가겠다고 들이닥쳤더래요. 남의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꼴을 보니 다이렉트로 영창에 꽂아주고 싶지만 민간인이 뭘 어쩌겠어요. 일어난 김에 베란다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어요. 여기서 정모 벌이려는 놈이 또 누구냐 싶어서 문을 열었지요. 험한 세상에 문을 확 열어제끼긴 힘들고, 체인 걸어서. 근데 처음 보는 남자가 휴대폰을 내밀었어요. 응? 남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며,
"주희씨 아닌가요?"
묻더랍니다. 이건 또 무슨 지랄이 탭댄스 추는 광경인가 싶어서 화면을 봤어요. 아하.. 돛단배 아십니까들? 익명채팅 앱인데 거기서 주희라는 여자랑 나눈 대화 화면이더라구요. 동기가 쓰는 걸 본 적이 있어서 뭔지 알아챘는데 깔아본 적도 없거든요. 아니라고 답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와 세상에- 저걸 직접 찾아다니는 놈도 있구나 깨름칙해져서 다시 한 대 피러 나갔어요. 조금 있다가 또 초인종이 울리더군요. 다시 제가 나가려고 했는데 마침 전화가 와서 친구놈 더러 나가보라고 했어요. 통화하고 있는데 건물 밖으로 누가 후다닥 달려가더라구요, 그것도 백팩 맨 남자가? 아까 그 남자도 백팩 매고 있었거든요. 찜찜한 마음에 통화도 대충 끝내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친구는 아직도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고 있었어요. 너 이 자식 나가 보기는 했냐, 구박했는데 자기는 분명 나가봤다는 겁니다. 근데 아무도 없었다고. 대수롭지 않은 기색이었는데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쓰여서 끈질기게 물어봤습니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 하더니 마지막에서야 한 줄 덧붙이더라구요. 자기가 문을 열자마자 층계 위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려오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고요. 순간 소름이 돋는 게, 아까 그 남자가 일부러 그랬구나 싶었어요. 내가 화면에 집중한 사이 그놈은 방 안을 살핀건데, 제 자취방이 'ㄱ'자로 꺾여있어서 현관에서 침실이 안 보이거든요. 집에 여자 혼자 있다고 판단하고 다시 초인종을 누른 뒤 반층 위에서 기다린거죠. 만약에 제 친구가 아니라 제가 다시 문을 열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님 저 혼자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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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체인은 별 소용이 없지 않았을까요? 당시 1층에 살고 있던 그 학생은 이제 집을 옮겼지만, 절대 1층으로는 안 간다고 하더라구요. 특히 건물 출입구랑 현관문이 일직선인 곳이요.
일상 이야기, 재미 있게 들었나요? 어때요, 이번엔 당신의 일상을 말해보는 건?
출처 |
지인이 겪은 일을 소설 형식으로 다듬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