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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사랑한,모두가 사랑한 ‘참 목자’
게시물ID : sisa_98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플리히
추천 : 6
조회수 : 382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04/09/25 03:37:48
김항성 목사와 접했던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김 목사님처럼 가난하게 산 이도 없고 김 목사님처럼 남에게 베푼 이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성자’라고 부른다.”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공로를 철저히 숨기는 것은 몇 배 더 어렵다. 먼 훗날에라도 자신의 선행이 알려졌으면 하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그런데 평생 베풀고 인내하며 사역하고서도 모든 공치사를 거절하고 기록 한 점 남기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간 목회자가 있다. 

지난해 4월 77세의 나이로 소천한 고 김항성 목사의 전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대한기독교서회·02-553-3343)는 독특하게도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간증으로 구성됐다. 쌍지교회,횡성제일교회,고양 주엽교회,부산 동삼중앙교회 등 무려 13곳에서 시무한데다 늘 ‘성경이 최고’라며 설교집 한 권 펴내지 않은 고인의 고집 탓에 관련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김 목사의 오랜 친구인 저자 정행업(대전신학대학교 명예총장) 목사는 김 목사가 사역했던 교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이 책을 엮어냈다. 정 목사는 “때로는 성도들이 울먹이며 증언했고 깊이 숨겨두었던 보물을 찾아내서 보여주는 듯 한결같이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말해주었다”고 전한다.

성도들의 입을 통해 회고된 김 목사는 ‘고난의 시기에 물질에 초연했던 참목회자상’이었다. 자녀들이 수차례 연탄가스에 중독됐을 정도로 가난했으면서도 성도들과 걸인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고 그러면서도 성도들에게는 작은 폐도 끼치지 않으려 했다. 자녀가 결혼해도 성도들이 전날에야 알았을 정도. 또 병약한 사모를 대신해 집안 일을 몸소 하면서도 사모를 지극히 사랑하며 돌보았다. 무엇보다 ‘강대상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기도의 목회자였다. 

특히 정 목사는 김 목사에 대해 증언한 사람들에 대한 공통점으로 한결같이 ‘김항성 목사님께서 저를 특별히 사랑했습니다’고 했다는 점을 꼽는다. 김 목사는 남녀노소 누구를 대하든 1대1의 인격적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수많은 목회자가 “김 목사님의 영향으로 목회를 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한 교회에서 1∼5년 정도 시무한 후에는 아무리 성도들이 울며 매달려도 다른 교회로 가고야 말았던 김 목사에 대해 한 성도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 적응을 못하셔서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분열된 교회,다른 분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작고 가난한 교회를 자청해 부임하셔서 정성과 사랑으로 교회를 키우시고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하면 미련 없이 또 개척교회나 문제있는 교회로 옮기셨다.” 큰 교회는 청빙을 해도 가지 않던 김 목사는 늘 “나는 외모도 왜소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큰 교회,유명한 교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자녀들이 유언을 남겨달라고 할 때도 “성경에 다 있으니 성경을 보라”고 거절했으며 자신의 시신을 부산대병원에 기증했다. 유족들은 이 전기가 나올 때도 “고인의 뜻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하며 걱정했다고 한다. 이같은 삶에 대해 예장 총회장 김순권 목사는 “그분 주위에서 그의 삶을 지켜본 본들은 성도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이구동성으로 그를 작은 예수,성자,참목사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세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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