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법수련자가 적어놓은 글중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젊은 대학생이시라 바쁘셔서 아직 허락을 못구하고 적당한 주제를 퍼왔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여기 ㅁㅁㅁ게시판에서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는 아마도 그것은 귀신이야기일 거야. 그런데 귀신이야기는 비단 옛날 옛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야. 몇 해 전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출몰한 ‘숄을 걸친 귀신’이나, 일본에서 화제가 된 ‘모닥불을 쬐는 귀신’ 이야기가 세계적 화재가 된 것만 보아도 알 법한 일이야.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대강 이러하지.
1.필라델피아의 한적한 마을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날 숄을 걸친 소녀가 병원에 나타나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렸다. 의사는 황급히 의료기구를 챙겨 소녀를 따라 나섰다. 소녀가 일러준 방으로 들어서자 한 중년 부인이 병석에 누워 있었다. 의사는 진료를 하며 말했다. “어린 따님이 참 착하기도 하네요. 달랑 숄 하나를 걸치고 장대비를 맞으며 병원에 오다니 말입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내 딸이라니요? 그 얘는 지난 달 바로 오늘 앓다가 죽었는데요. 그리고 숄이라면 바로 저기 걸려 있는 저 옷이구요.” 어머니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과연 소녀가 걸쳤던 숄이 있었다. 비에 흠뻑 젖어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2.일본의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인 이노키 박사의 고향인 야마나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2월 초순의 어느날 교교한 달빛이 얼어붙은 신작로를 비추고 있었다. 그날밤 그녀가 응급 환자를 왕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길 앞쪽에 갑자기 이상한 광경이 나타났다. 이 추운 한밤중에 한 남자가 길바닥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 사나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분명히 100미터쯤 걸었을까 할 때 갑자기 섬뜩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뒤를 돌아 보았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아까 그 사나이가 바로 그녀의 등뒤에서 다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사나이는 비통한 눈매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사나이의 얼굴을 쳐다 본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 앉으면서 소스라치고 말았다. 그 사나이는 조금 전에 그녀가 왕진한 바로 그 응급환자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숨을 헐레벌떡이며 자기집 대문을 힘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전화 벨이 울려대었다. 조심스레 전화기를 들은 그녀는 다시 한 번 기절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아까 그 응급 환자가 죽었다는 전화였다.
뭐 전형적인 귀신 스토리이지.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이런 류의 얘기를 들으면 등골이 으쓱해지거나 머리카락이 쭈삣 서는 것에 만족을 느끼. 더 이상 귀신에 대해 알려 하지 않고 그냥 순간의 스릴로 넘겨 버리고 마는 것이야. 그러나 귀신에 관한 문제는 단순한 심심풀이의 대상이 아니야. 왜냐하면 누구나 결국은 죽어 귀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따라서 귀신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목적지에 관해 미리 알아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어. 목적지를 앎으로써 사전에 필요한 것을 준비할 수 있듯이, 사후의 세계를 앎으로써 인생의 지표를 올바로 수립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귀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뒷바침되어야 해. 사후 세계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귀신에 대한 이해는 그야말로 귀신 시나라 까먹는 소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귀신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과감히 내던진 사람이 있어. 1926년 미국에서 하리 프디디라는 사람은 영혼의 실존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일을 감행했어. 그는 탈출 묘기의 기인으로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하루는 기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자신이 죽은 후에 영계 통신을 하여 영혼이 실존하고 있음을 증명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지. 그 방법은 맨하튼 은행에 자신의 암호문을 보관하고 자신이 죽은 후에 영매를 통해 그 암호문을 풂으로써 증명하겠다는 것이었어. 그는 1926년 10월 31일 튼튼한 쇠상자 속에 들어가 영영 나오지 못하게 돼. 그리고는 1929년 1월8일 영매사 아더 포드를 통해 암호문을 세상에 발표하게 하였어. 결국 은행에 보관하고 있는 암호문과 일치하여 세상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지
프디디와 같이 산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영혼의 실존을 증명한 경우는 흔치 않아. 그러나 죽은 영혼이 산 사람과 소통을 하여 영혼의 존재를 알린 경우는 수없이 많지. 그 소통을 담당하는 무속인을 차치하고라도 심령 체험을 한 일반인 또한 적지 않아.
한 예로 영국 서포크 주에 있는 보오리 박물관은 약 200년 동안 무려 1300회나 귀신이 출몰했다고 하는데, 이 곳에서 귀신을 목격한 일반인이 무려 수만 명이나 된다고 하지. 세계 도처에는 제2의, 제3의 보오리 박물관이 무수히 널려 있다고 해.
우리 주변에도 심령체험에 관한 사례는 적잖게 찾아 볼 수 있어. 몇 해 전에 성왕리에 방영되었던 MBC 다큐멘터리 ‘이야기속으로’만 보아도 알법한 일이지. 게다가 그 시나리오를 맡았던 그 작가는 아직도 사과박스로 열 개가 넘는 분량의 심령체험담이 쌓여 있다고 했어.
대개가 충분한 정황 증거를 가지고 있고, 그 중에는 9시 뉴스에 까지 오른 살인사건과 관계된 심령사건도 있다고 했어. 그러나 너무 충격적이고 실증적인 것은 방송위원회에서 삭제되어 방영되지 못했다고 해. 여하튼 심령체험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조차 50% 이상이 영혼의 실존을 믿고 있다고 해.
그럼 지금까지 검증되고 연구된 영혼의 실체에 대해 알려줄게
일단 영혼의 모습부터 알아보자.
영혼의 모습에 대하여 나라마다 민족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 가령, 벵갈만에 있는 네그리토족은 영혼을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어. 산탈족은 영혼이 도마뱀과 유사하게 생겼다고 믿었고, 말레이시아와 보르네오 사람들은 영혼이 새와 같은 존재라고 믿었지. 그리고 콜롬비아의 노트카족, 인도인, 에스키모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없어지나 인간 형상의 주먹만한 크기의 영혼은 살아서 떠돈다고 믿었어. 이렇게 지역과 민족에 따라 각기 다른 영혼관을 지니고 있었지. 그러다가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영혼에 대한 인류의 체험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영혼의 모습이 인간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아래는 2차대전경 만주 하이자루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기호라는 청년이 겪은 이야기야.
-당시 ‘니야마’라고 창씨 개명한 조선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기호에게 자신이 죽으면 고향에 소식좀 전해주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기호는 속으로 멀쩡한 녀석이 별 부탁을 다한다고 싱겁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리고 며칠 후 소련군으로부터 무차별 폭탄세례를 받았다. 그날밤 10시경 기호는 파수를 서게 되었는데 전방 10미터 거리에서 니야마가 성큼성큼 걸어서 자기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니야마는 전투모를 쓰고도 흰두건을 항상 늘어뜨리고 다니는 특징이 있어서 한눈에 니야마인 줄을 알아보았다. 그래도 기호는 군령에 따라 “누구야 정지”하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마구 오더니 2미터 전방에서 방향을 바꾸어 진지 꼭대기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기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튿날 날이 밝는대로 니야마가 넘어 갔던 방향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그 바로 밑의 참호에 폭격으로 산산이 찢어진 니야마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때서야 기호는 전날 밤에 나타난 니야마가 유령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니야마는 자기의 주검을 기호에게 확인시키고 예전에 부탁했던대로 고향에 알려주기를 바래서 유령으로 나타난 것이었나 보다. [혼정설화
뭐 어쨋든 수도자나 신인(神人), 무속인(巫俗人) 등은 종종 신의 체험을 하게 돼. 그런데 어떤 경우는 자태가 곱고 밝은 신을 보고 황홀해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흉측하고 무서운 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지. 그렇다면 귀신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한번 알아보자
귀신은 그 형상도 가지각색이야. 앞의 설화에 나오는 니야마와 같이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아. 가령, 굶어 죽어 배를 웅켜쥐고 있는 귀신, 교수형을 당해 목을 흐느적거리는 귀신, 객사하여 거지같은 몰골을 하고 다니는 귀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얼굴은 백지장 같은 처녀 귀신(손각시), 늙어 꼬부라져 죽은 할매귀신, 상사병에 걸려 비쩍 말라 죽은 총각 귀신(몽달귀), 불에 타서 시커멓게 그을려 죽은 귀신, 물에 빠져 퉁퉁 불어터져 죽은 귀신, 태아로 죽어 올챙이 같이 가분수로 생겨먹은 귀신, 독약 먹고 죽어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리는 귀신… 등등 그 죽은 바에 따라 천차만별의 형상이 있어.
그렇다면 이렇게 육체상의 가해에 의하여 죽은 경우, 귀신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며, 또한 어떤 성질이 남아 있게 되는지 알아보도록 할게.
일반적으로 늙어 죽는 경우, 가령 70세의 노인이 죽는다면 그 영혼의 모습이 대체로 50대의 모습으로 보이게 돼. 이는 육체의 모습과 영혼의 모습이 일치하기는 하지만 얼굴에 쭈글쭈글한 주름과 곰버섯이 핀 노인의 모습까지 그대로 영혼의 모습으로 옮겨가지는 않기 때문이야. 실제로 할아버지 귀신들을 보면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이 휘날려 언듯 보기에는 70, 80 먹은 노인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주름이 그렇게 심하지 않은 피부를 지니고 있어 5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아.
생전의 모습은 육체에 의해 100% 결정되지만, 죽으면서는 육체라는 껍질에서 탈피되어 적정 상태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 바로 물질과 비물질의 차이에 의해 영혼이 생전의 모습과 약간의 구별이 생기는 거야. 불행하게 열달을 채우지 못하고 낙태가 된 경우를 보면, 각자의 근기에 따라 올챙이 모양의 낙태귀가 될 수도 있고 동자나 동녀신으로 환신할 수도 있어. 또한 어려서 죽은 아이 귀신의 경우, 가령 한 살 때 죽었어도 실제로 그 영혼을 만나 보면 3~5살은 되어 보이지. 이는 한 살에서 세 살까지는 아직도 전생의 성질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이 때 죽은 애기 귀신들은 전생의 여력을 받아 동자 동녀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육신 상의 가해를 입고 죽은 영혼들이야.
사례를 한번 들어볼게,
어떤 남자가 중고차를 사고부터 늘상 배가 아프다며 찡그리고 다녔다. 몇군데 병원을 찾아가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글쎄 차의 우측 앞바퀴에 배가 터진 채 붙어 있는 귀신이 있는 것이었다! 죽을 때에 배가 터져 끔찍하게 죽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귀신이 차의 주인에게 감응되자 원인 없이 배가 아프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돼. 바로 귀신은 이미 육신을 벗어났음인데 어째서 배가 터진 모습에 배가 아픈 표정을 그대로 짓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 거두절미하면 귀신은 지적 작용이 감소되어 감정 위주로 반응하는 정혼(情魂)이기 때문이야.
위에서 적은 것을 그냥 복사 붙여넣기 할께. 쓰기 귀찮아서....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을 가리킬 때는 ‘정신(精神)’이라 하고 죽은 귀신을 통칭할 때는 ‘신(神)’이라 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바로 글자그대로 ‘정(精)’이란 글자가 있고 없고에 있어. 정(精)이란 기(氣)를 써서 지적 판단을 하는 작용을 하지. 그런데 죽으면서 정(精)이 대부분 이탈되어 정신(精神)이 아닌 신(神)이 되고, 이렇게 되면 지적(知的) 의식이 대폭 떨어지게 돼. 즉, 감정 위주로 반응하는 신(神)이 되는 것으로, 이 때의 성질을 감안하여 정혼(情魂)이라 부르는 거야. 대개의 귀신은 이렇게 정혼이기 때문에 판단력이 미비하고, 따라서 사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배가 터져 있고, 그래서 아픈 것으로 믿게 되는 거야. 이런 경우에는 음식을 잘 차려 대접을 하면서 납득을 시키는 것이 관건이지. 이제는 영혼이 되어 배가 아프지 않을 텐데 무엇을 그리 고통스러워하느냐고 납득을 시켜 맺힌 감정과 배가 터졌다는 그릇된 믿음을 버리게 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될 수도 있어. 그러나 생전에 영적 퇴락이 심하게 된 귀신은 지적 작용이 극소하여 그래도 풀어지지 않아. 이런 경우는 천도제를 지내 신계에 귀속시키던지, 아니면 빨리 윤회하여 인도환생할 수 있게끔 해 주는 것도 절실하지
이렇게 귀신은 정혼으로서의 성질에 의해 생전에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면 죽어서도 이것을 그대로 믿게 되는 특징이 있어. 이것으로 인해 목이 잘린 귀신은 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머리를 밑으로 흐느적거리며 나타나게 돼. 불에 타 죽은 귀신은 시커멓게 그을린 상태로 돌아다니게 되지. 이치 상으로는 영혼이 되면 육신의 형상과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온전해야 할 것이지만, 이들 귀신들은 지적 작용의 미흡으로 인하여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마는 것이지. 그러나 관운장 같은 신은 목이 잘려 죽었지만 신체상의 하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어. 오히려 생전의 위엄보다 더 굳세고 기풍이 당당하여 천하의 귀신들을 호령하는 천상의 대장군으로 거듭나 있어.
이것은 생전의 영적 역량이 높아 죽어서도 살아서와 같은 지적 역량을 그대로 지니는 바, 육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신은 죽으면서 정(精)을 잃으며 정혼(情魂)이 되지만, 영력이 높은 경우는 정(精)의 손실이 적어 생전의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게 돼. 이렇게 생전의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영혼을 일러 선신(仙神)이라 하며, 이 쯤은 되어야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온전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지.
요컨대, 영적 차원이 낮은 귀신들은 육신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되어 죽을 때의 흉측한 모습을 그대로 지니게 돼. 이런 흉측한 귀신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잘 달래서 원한을 풀도록 한 후 이치적으로 설명해 주어 납득하게 하던지, 아니면 무조건 믿도록 유도해야 회복을 기할 수 있을 거야. 즉, 치료 약이 곧 해원이며 믿음인 거야. 그러나 수준 미달의 귀신들에게는 ‘무식한 도깨비는 진언도 모른다’는 말이 있듯 이 또한 잘 먹혀들지 않아. 그래서 귀신 하면 무섭고 흉측하다는 관념을 세상에 심어 주게 된 것이지.
이걸로 일단 영혼의 모습은 끝, 조금 있다가 영혼의 크기와 무게에 대해 설명할게
심령과학을 다룬 책에 보면 임종시의 몸무게와 임종 후의 몸무게를 측정하여 그 차이가 있음을 밝혀 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어. 즉, 그들의 말에 따르면 몇 그램 정도의 작은 차이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라는 거야. 이 점에 대하여 하버트(Herbert B Greenhouse)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어.
-대개의 유령은 배경과 뒤섞여 보이거나, 때로는 딱딱히 굳어 만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런던에서 ‘부르’라는 노인의 유령이 가족들 앞에 나타났을 때 집안을 걸어다니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은 그의 아내가 자신의 이마에 그의 손이 닿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령현상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이 ‘에텔체’나 ‘제2체’, 혹은 ‘복체(復體)’ 등으로 불리는 밀도가 희박한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이런 견해는 동양의 형상학(形象學)적 입장에서 보면 모순된 점이 눈에 띄여. 형상학이란 물질만을 위주로 다룬 과학과는 달리 우주를 물질과 비물질로 양분하여 다루지. 이 때 물질을 형(形)이라 하고, 비물질을 상(象)이라 해. 상(象)의 세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정(精)과 기(氣)와 신(神)이며, 영혼은 바로 정기신으로 이루어진 상계의 요소인바, 물질적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즉, 물질이 아닌 것은 형체와 부피가 없으며 무게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지. ‘기(氣)’라는 것이 ‘정(精)’과 덩어리져 농축되면 물질적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고, ‘신(神)’이 인간의 의식을 점령하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낄 수도 있게 돼. 이런 환유(幻有)적 현상을 실제의 현상으로 착각해서는 안돼. 만약 영혼이 극소하나마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같은 3차원 인간계 의 테두리에서 존재하는 것이 되어 결국 삶과 죽음의 구분조차도 무의미해지 말아. '그렇다면 귀신의 크기는 생전과 동일한 것인가'라는 의문점이 들 수도 있어. 실제로 귀신을 접한 일이 있는 사람들은 그 크기가 사람과 비슷하다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말하지.
그러나 간혹 귀신의 크기가 사람 보다 크거나 혹은 매우 작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 귀신은 인간과 대면 할 때 대체로 사람의 크기와 비슷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의 크기가 생전과 동일하다고 믿어 왔지. 그러나 물질이 아닌 영혼을 물질적 관점에서 크기를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게 돼. 실제로 최근엔 어떤 수련자는 명산에서 수련을 하다가 산신을 보좌하며 신계의 일을 맡아 보는 지령관(地靈官)이 거하는 곳을 본 일이 있었는데, 사람이 올라가기 힘든 기암괴석의 바위 틈 속에 위치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구멍의 크기가 대략 축구공 정도에 불과한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극히 협소한 곳이었지. 그러나 이 속은 온갖 신계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수많은 조상신들, 객귀, 신장, 장군신, 수문장, 동자 동녀신 등등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서울의 명동 거리를 방불케하고 있었다고 해. 이것은 바로 귀신의 형상을 물질적 관점으로 가눌 수 없다는 사실을 뒷바침해 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또 한 예로 단전의 힘이 세어지면 신을 부리게 되는데, 귀신이 말썽을 부리면 기(氣)를 써서 그 부피를 줄여 병에 가두어 놓을 수도 있어. 무속에서는 악귀를 잡을 때 흔히 신장을 움직여 병에다 잡아 가두는 수가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신은 크기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
요컨대, 신은 그 크기와 무게가 고정된 것이 아니야. 이는 신을 구성하는 정기신(精氣神)이 비물질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야. 정기신의 파동이 느슨하게 확장되면 그 형상이 커 보이게 되고, 반대로 파동이 탄탄히 밀착되면 작아 보이게 되는 거야.
정기신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설명해 볼게 잠시만....(조금 어려울 수 있어...)
기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주의 구성요소인 정(精)과 신(神)을 함께 알아야 하지. 조금이라도 단전호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정기신(精氣神)이라는 단어에 익숙할 거야. 일반적으로 정기신을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과 연관시켜 단전의 위치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생각했지. 그러나 정기신은 그러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이는 마치 가위,바위,보 놀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우주 변화를 관장하는 근원적 힘을 말하는 것이지. 정기신은 물질이 아닌 바, 그 설명은 철학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다소 이해가 어려울 수 있음을 일단 공지할게. 다만, 정기신이 가위바위보 놀이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어서 이것에 빗대어 설명하도록 할게.
일단 정(精) 부터....
소문(素問) 「금궤진언론(金匱眞言論)」에서는 “정(精)이란 신체의 본(本)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어. 이런 정의를 바탕으로 도가(道家)에서는 정을 X액 또는 생식활동과 생명활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에너지로 파악하고 있지. 정을 다시 선천과 후천의 정으로 구별하여 선천의 정을 원정(元精)이라고 하여 정력이라고 부르는 무형의 작용이라고 보고 있어. 그리고 후천의 정은 누구나 직접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精液(미안하다 레스주들,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여성의 경우는 愛液(다시 한번 말하는데 정말 미안해 레스주들,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을 말하며, 이것은 기가 유형화되어 보이게 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지. 위의 내용은 정의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적인 측면만을 보고 정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린 것이야. 다시 말해서 목화토금수 오행의 원리를 이해할 때 보이지 않는 작용으로서의 목의 개념을 단지 현실적으로 보여 지는 나무의 특성으로서 규정하여 설명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지[마침 잘 되었다 이것에 관해서도 오늘 시간이 되면 설명해줄게]. 왜냐하면 나무에는 단지 목의 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화토금수의 전체적 순환 원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정(精)의 정확한 개념을 알기 위해서 정력, X액을 만들어 내게 하는 근본적인 측면을 이해해야만 해.
정(精)이란 맺히려 하는 힘을 말해. 이것을 과학에서는 입자성이라고 해. 다시 말해 주변의 것들을 한 곳으로 모아 덩어리를 이루려는 힘이 바로 정인 것이야.
이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위,바위,보 놀이를 예로 들어 보도록 하겠어. 가위,바위,보 놀이 중에서 덩어리져 뭉치려고 하는 특성을 손으로 잘 나타낸 동작이 바로 바위이지. 바위는 손을 안으로 꽉 쥐면서 통일을 이루려는 정의 성질을 잘 표현해 주고 있어. 이렇듯 정의 성질은 자꾸 안으로 수렴하여 통일하는 작용으로 음양의 관점으로 살펴보았을 때 음에 해당하지. 이렇듯 정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타나 보이는 현상이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있기 훨씬 이전에 작용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이야.
이 다음에는 기(氣)에 대해서 설명해줄게...
기란 무엇일까? 기를 모르고서 기 수련이 그 효과와 다른 운동과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때의 허신은 기를 추미(芻米)로 풀이하였어. 추미란 손님에게 주려고 밥을 짓는 뜻이야. 밥을 지을 때 솥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기의 어원이 비롯되었지. 세월이 흐르면서 기는 수증기라는 뜻에서 차츰 발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에너지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
노자의 도덕경에도 기라는 글자가 세 차례 등장하지. 도덕경 10장에는 「專氣致柔 能嬰兒乎(전기치유 능영아호)」 즉 ‘기를 잘 다스려 부드러움에 이르면 갓난아이처럼 될 수 있는가?’ 라는 대목이 있어. 그리고 제42장 두 번째의 기에 대한 언급이 있어.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로서, 즉 ‘기를 비게 하면 조화롭게 된다’는 대목이지. 기에 대한 마지막 구절은 제 55장에 나오는 「心使氣曰强(심사기왈강)」, 즉 ‘마음이 기를 다스리는 것을 강’이라고 한다는 대목이야. 그러나 아쉽게도 노자께서는 ‘기는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어. 단지 기를 다스려 일어나게 되는 결과만을 서술했을 뿐이지.
반면 서양에서도 근래에 들어 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기에 대한 개념 정의를 시도하고 있지. 예를 들어 생체 에너지 또는 타기온, 우주파동, 우주의식, 공간에너지 ,생명자기 등의 말들이 주로 서양에서 기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어지는 말들이야!
기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기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려는 힘'을 가리켜. 서양에서 사용되는 과학적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파동성'에 해당하는 것이야. 기는 먼저 설명된 덩어리져 뭉치려고 하는 정(精)과는 반대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다시 말해 정은 안으로 수렴하여 뭉치려고 하는 힘인데 비해 기는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려고 하는 힘을 말하는 거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시 가위,바위,보 놀이를 통해 비유해 보면 기에 해당하는 것은 가위의 동작이야. 가위는 뭉쳐 있던 상태에서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표현하고 있어. 원래 옛날에는 지금처럼 검지와 엄지를 펴서 가위를 하지 않았고 검지대신에 약지를 폈었지. 그런데 약지를 펴는 것보다 검지로 펴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면서 가위를 내는 모양이 변하게 된 것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가위는 기의 동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준 동작이라 할 수 있지. 정리하면 기란 맺히려는 정(精)에 반발하여 제멋대로 사방으로 퍼지려는 것을 뜻하는 거야. 음양의 관점으로 정과 기를 비교해 보면 정은 음에 해당하고 움직여 변화하려는 기는 양에 해당해....
기존에 나와 있는 신의 개념을 보면 정신, 의식, 마음 또는 사유 등을 가리키는 말로 인간의 생명 활동을 주재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지. 그리고 선천과 후천의 신으로 나누어, 선천의 신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무의식을 말하는 것이며, 후천의 신이란 인지 가능한 의식작용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너무 막연하지... 그렇다면 신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신은 만물의 바탕을 이루어 기산작용(氣散作用)을 하며 자율적 반응을 하려는 힘을 말해. 가위,바위,보 놀이에서 보자기에 해당하는 것이 신이야. 보자기의 형상은 손바닥을 쫙 편 상태인데 이것은 신의 작용이 모든 만물에 고루 미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주역》에 이르기를 “정기는 물질을 만들고 신은 물질을 주재한다(精氣爲物游魂爲變)”라고 하였지. 만약 정기신 중에 신(神)이 빠지면 결국 유물론이 되어 생명의 가치는 길바닥에 뒹구는 돌멩이와 같이 되고 마는 거지. 정(精)과 기(氣)는 물질을 만들고 변화를 주장하지. 그러나 신(神)이 없으면 생명으로까지 이어질 수 없어. 거대한 박물관을 지어 놓고도 그것을 감상할 관람객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처럼, 신(神)이 빠진 세상은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럼 이런 정기신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줄게.
위 에서 정기신(精氣神)의 속성과 작용을 가위,바위,보 놀이를 예로 들어서 살펴보았어.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즐겨하는 가위,바위,보 놀이의 이면에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너무 과장하면 태일(太一 - 佛性)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천지창조의 열쇠인 정기신의 신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 태일은 태초점(太初點)에 의해 통일성이 깨지면서 그 구성 요소였던 원기(元氣)에서 정(精)과 기(氣)가 나오고, 원신(元神)에서 신(神)이 솟아나오게 되었어. 정기신은 서로 어우러져 반응하며 상계(象界)와 형계(形界)를 창조하게 되었으니, 실로 천지창조의 주역이 아닐 수 없지. 삼라만상을 쪼개고 쪼개어도 결국 존재하는 것은 정기신 셋뿐이며 이것이 하나로 통일된 즉 태일인 것이지.
동양의 철학은 음양으로, 서양의 과학은 +-로써 우주의 원리를 파헤쳐 보려고 노력하였어. 하지만 이런 것은 결국엔 극단의 이수(二數) 논리가 되었지. 그러나 오직 삼수(三數)의 원리를 이용하여야만 알아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 삼수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인 기(氣)와 -인 정(精), 그리고 생명의 본원인 무형(〇)의 신(神)인 것이지. 그러나 불행히도 정기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결국 정기신을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에다 끌어 붙여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말았어... 그 이유는 현세에 이르도록 그 원리에 대하여 전해 오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지. 그러나 다행히도 정기신의 원리가 가위․바위․보 놀이를 통해 알 수 있지. 가위․바위․보에서 보듯이 정기신에도 상호 우세 원리가 작용하게 되. 예를 들어 바위가 가위를 이기듯 정이 기를 제압하고 통제할 수 있어. 또한 가위가 보자기를 이기듯 기가 신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며 좌지우지할 수 있지. 그리고 보자기가 바위를 이기듯 신이 정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어.
인간의 정신을 관하건대, 대부분이 기의 영향을 받아 신이 동하는 형국이야. 신이 일으키는 생각이란 것은 언제나 기를 타고 솟아 나오지. 그러나 기라는 놈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동성(動性)이 강하여 생각도 제 멋대로 일어나니 생각을 마음대로 통제하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야. 가령 더러운 오물을 보고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화사한 꽃을 보고 향긋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는 어려워. 완전히 깨달아 생각을 거두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지.
인간이 지(知)의 영역에서는 감정(感情)의 영역과는 달리 대부분 자신의 통제 하에서 상념을 일으킬 수 있는데, 지의 영역을 주재하는 기운이 바로 정(精)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다시 말해 신이 정을 사용하여 기를 잡아 정보를 모으고, 다시 모아진 정보를 이리저리 조합하며 판단을 하는 것이지. 그런데 만일 지(知)의 작용에 있어서 주먹에 해당하는 정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다고 한다면 가위인 기는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가려고만 할 것이고 따라서 보자기인 신이 기의 조종을 받아 질서를 잃게 될 것이야. 이렇게 되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특징인 이성을 영영 잃어버리고 마는 비운을 맞게 될 것이지.
주체인 나, 즉 신은 정이 부족하여 기의 지배를 받으면 받을수록 본능적으로 되어 인과라는 틀 속에 점점 더 속박되게 되. 따라서 필요량의 정(精)이 있어야 제대로 인간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우리가 흔히 눈에 총기가 없고 멍청해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흐리멍텅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정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일정 양의 정이 신과 엮어져 있는 바, 이를 정신(精神)이라 하지. 돌연변이로 정이 불급하게 태어나거나, 혹은 후천적 영향으로 정의 극심한 감퇴가 발생한다면 기형아나 정신박약아의 원인이 되는 것이야. 그러나 만일 신을 계발하거나(참선), 혹은 기를 모으는 방법(단전호흡)으로 정을 축적하여 나가거나, 또는 삶 자체를 수련화(원력을 가지고 생활)하면 기를 제어하여 선정에 몰입할 수 있게 되지. 이렇게 될 때 신은 명(明)을 얻어 선인(仙人)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고, 여기서 더 정진하여 정기신의 통일로까지 이어진다면 불, 보살의 경지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야.
여하튼 신(神)은 오직 정(精)으로써만이 예측 불허인 기(氣)를 통제할 수 있는 바, 건강을 넘어서 영적 성장에 뜻을 둔 자는 필히 이 이치를 새겨 두어야 하지... 물론 신이 정으로써 그 우세인 기를 제어하듯이, 정도 기로써 신을 제어하고, 기도 신으로써 정을 제어한다면 극심한 혼란이 야기될 것이야. 그러나 이런 경우는 결코 발생하지 않아. 왜냐하면 정기신 중에 정(精)과 기(氣)는 태일에서 갈라져 나올 때 그 모체가 원기(元氣)인 바, 주체 작용을 일으키는 원신(元神)에서 나온 신(神)과는 그 성질이 판이하기 때문이야. 즉, 정기신은 삼위일체인 것은 사실이나 그 중심을 꼽는다면 단연코 신(神)이 되는 것이지.
요컨대 정기신 삼요소는 가위․바위․보 놀이의 원리와 같이 셋의 우세가 서로 맞물리며 변화해 나가는 것으로, 특히 신의 경우는 정과 결합하여 정신을 형성하여 기를 통제할 수 있어. 이는 신이 결국 정과 기를 모두 거느리게 된 것으로, 결국 우리 인간은 태일의 복제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정기신'이라는 말을 썼는데, 정기신에 대하여 보충 설명을 해줄게.
'한얼 특히 우리가 '삼라만상'이나 '참나'라고도 부르는 것은 삼위일체로 이루어져 있어. 절대(絶對)인 한얼이 상대(相對)계로 작용함에 정(精), 기(氣), 신(神) 셋으로써 나누어지지. 한자에 보면 밝을 ‘정(晶)’자가 있어. 세 개의 태양이 모여 거대한 밝음을 이룬 것이지. 이 셋이 바로 정과 기와 신이야. 정기신이 통일될 때 비로소 한얼을 자아내게 되는거야.
정이란 맺히는 힘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입자성에 해당해. ‘정(精)’자의 구성을 보면, ‘米(씨알) + 主(촛불) + 丹(단전)’으로 되어 있어. 맺히는 힘(米)으로써 단전을 만들고, 이로써 불(主)을 밝힌다는 뜻이야. 여기서 불이란 ‘얼빛’이야.
기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힘으로, 파동성에 해당해. ‘기(氣)’자는 ‘.(기운) + 米(씨알)’로 , 맺히는 정(精)에 반발하여 제멋대로 사방으로 퍼지는 기운을 뜻해.
신이란 스스로 반응하려는 자율적 힘을 말해. ‘신(神)’자의 구성을 보면, ‘示(보다) + 申(기운)’으로 되어 있어. ‘示’는 어떤 현상을 본다는 것으로 생명을 뜻하며, ‘申’은 단전(田)에서 기가 위아래로 퍼지는 것을 말하지. 즉, 기를 써서 이리저리 반응하는 자율반응체를 가리키는 거야.
정기신 삼극 중에 정과 기는 물질 세계를 형성하였고, 여기에 신이 추가되면서 생명이 발생하였지. 그래서《주역》에서는 “정기는 물질을 만들고 신은 변화를 일으킨다(精氣爲物游魂爲變)” 라고 하였어. 이렇게 온 우주는 정기신 셋의 작용에 의하여 조합되고 변화해 나가지. 가히 천지인(天地人) 삼계(三界)의 존립 근간인 셈이야.
즉, 정 → 맺히는 힘(-) → 입자성
기 → 퍼지는 힘(+) → 파동성
신 → 자율적 힘(o) → 자율성 이지.
이제까지의 동양철학은 음양의 두 축으로써 전개하였지. 서양의 과학 또한 +와 -로 전개 되었어. 그러나 두 축으로는 통일장 이론을 완성할 수 없어. 한자의 ‘적을 사(些)’자를 보면 ‘此(이것) + 二(둘)’로, 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뜻이지. 따라서 적어도 셋은 되어야 완전하게 되는 거야. 옛날로부터 복삼(福三)이라 하여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가령, 3월 3일은 삼짇날이라고 떡을 해 먹고, 10월 3일은 개천절이라고 천제를 올렸어. 민족의 시조인 환인, 환웅, 단군을 삼성(三聖)이라 불렀고, 자손의 잉태를 주관하는 신을 삼신(三神), 그리고 하늘임을 삼신상제(三神上帝)라 불렀지. 심지어 우주 변화의 원리마저 삼태극(三太極)에서 찾았어. 그래서 《천부경(天符經)》은 3의 원리로 풀었고, 《삼일신고(三一神誥)》는 노골적으로 3의 의미를 표제화 하였지. 이렇게 3이란 숫자는 '참나'의 상징이 되어 왔어.
사실 알고 보면 불교의 법신(法身), 보신(補身), 화신(化身),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 기독교의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도 3에 그 원류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삼라만상, 즉, '참나'의 원리를 하나로 꿰는 완성 이론은 오직 세 축, 즉 정기신으로써만 풀 수 있어. 이것이 정,기,신이야
조금 쉬었다가 영혼의 음성에 대해 알려줄게
전설의 고향을 비롯하여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보면 귀신의 음성이 사람의 음성과 동일하게 묘사되어 있지. 또한 실제로 접신이 되었거나 신통이 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봐도 인간의 음성과 동일하다고 해. 다음은 귀신이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는 설화야.
-신라 37대 혜공왕(779년 4월) 때의 일이다. 갑자기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준마를 탄 김유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40명 가량의 군사가 무덤에서 솟아 나와 미추왕릉(죽현릉)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능 속에서 다시 진동이 일어나고 우는 듯한 소리와 하소연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신(김유신)이 평생동안 신명을 다받쳐 난국을 헤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으며, 죽어서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무고한 저의 자손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임금님이나 신하들이 저의 공과 충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을 쓰지 않을까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미추왕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공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누가 돌본다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시오.” 미추왕이 세 번을 청해도 김유신은 세 번 다 듣지 않고 다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는 자신의 무덤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괴변이 계속되자 결국 혜공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혜공왕은 황급히 대신 김경신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어 잘못을 사과하고 공을 위해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려서 명복을 빌게 하였다. 《삼국유사》
-신라 진평왕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만 다니므로 이찬 김후직(金后稙)이 왕께 여러 번 간(諫)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나 김후직은 늙고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신하의 도리를 못하고 죽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구나.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임금께서 사냥다니시는 길가에 묻도록 하여라.” 하였다. 그의 자식들의 부친의 유언대로 진평왕이 사냥 다니는 길 가에다 묘를 썼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진평왕은 으례이 그렇듯 그날도 사냥을 나갔다. 그런데 김후직의 무덤 옆을 지날 때 갑자기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께서는 사냥을 가시지 마옵고 정사를 돌보소서,”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왕은 괴이하게 여겨 주위를 둘러봤으나 보이는 것은 무덤밖에 없었다. 그 때 동행한 신하가 이 묘는 김후직의 묘이며 그가 유언한 이야기를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에서 내려, “후직은 과연 충성이 지극한 신하로다!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뜻을 잊지 않았으니 내 어찌 이찬의 말을 쫓지 않으리오” 하고는 발길을 대궐로 돌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다시는 사냥을 나가지 않고 오로지 정사에만 힘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김후직의 묘를 죽어서도 뜻을 간(諫)하는 신하라 하여 ‘간신묘(諫臣墓)’라 불렀다.《한국민간전설집
그런데 실제 귀신의 음성은 인간의 음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야. 인간이 신의 소리를 듣는 데는 두 가지가 있어. 첫째는 신이 인간의 의식에 빙의나 접신이 되어 소통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인간이 자신의 의식을 영계의 파장대에 맞추어 신과 소통하는 경우야. 전자의 경우는 신의 소리가 인간의 음성과 같게 들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높은 음계에서 나오는 신의 음성을 듣게 돼. 마치 바이올린의 높은 음이나, 피리의 높은 음에서 울려나오듯 신의 음성이 고음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이는 신의 진동이 대단히 빠르기 때문으로, 신을 부르는데 요령을 사용하거나 장단을 빠르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야. 무당이 굿을 할 때 처음에는 천천히 뛰다가 신이 실리게 되면 빠른 동작으로 펄쩍펄쩍 뛰게 되는 것도 바로 신의 진동수에 맞추는 과정에서 비롯된 거야. 교회에서 기도할 때 방언이 터져나오는 원리도 마찬가지야. 기도 시에 점점 흥분되어 뇌파가 격렬하게 되면 신의 고주파와 간섭현상이 일어나고, 이때 신의 음성이 뇌파를 타고 들어와 사람의 언어를 교란하게 되는 거야. 그러면 말이 뒤틀어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게 되는 거야.
뭐 여하튼 실제 신의 음성은 인간의 음성과는 높낮이가 다른 고음에서 나오는 소리인 것으로, 신과의 소통 시에 이 점을 염두에 두면 현재 어떤 상태에서 신통이 이루어지는 지를 가늠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사람이 주체가 되어 신파(神波)를 자신의 의식에 끌어 소통하는 경우도 신의 음성이 인간의 음성과 동일하게 들려. 그러므로 신의 음성이 고음이 아니라 하여 무조건 접신이나 빙의로 볼 수는 없어.
이걸로 영혼의 음성은 끝, 그 다음에는 영혼의 운행에 대해 알아모도록 할게
아래의 설화를 한번 볼까?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젊은 나이에 죽어 10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하루는 묘에서 삼우제를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르릉 쾅 하며 무덤 한 가운데에 금이 쫙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덤을 다시 파보니 관이 움직이는가 하면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가족들이 관을 열고 보니, 죽었던 선비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른 염했던 것을 풀어 주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선비는 가족과 친척,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승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였다.“내가 죽자 얼굴이 흰 저승사자 둘이 집 앞에서 날 기다리다가 어디론가 데려갔지요. 밀밭, 보리밭을 지나서 갈대밭을 지나니까 큰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어요. 그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는 없고 긴 대나무 장대가 양쪽 강둑에 걸쳐 있었어요. 그래서 대나무로 된 외나무 다리를 밟고 건너 갔는데, 강둑을 지나 얼마를 걸으니까 눈 앞에 큰 대문이 나타나는 거였어요. 그 문을 지나서 저승왕인 염라대왕 앞에 끌려 갔지요. 염라대왕이 이리 저리 묻는 말에 대답을 하였더니, 갑자기 나를 끌고 온 저승사자에게 화를 버럭 내면서 꾸짖지 않겠어요? 그말이, ‘한양 사는 선비를 데려 오라 했건만 왜 타지방 사는 이 선비를 데려 왔느냐?’고 하면서 호통을 치더군요.
한 양 사는 선비와 내가 이름이 같아 저승사자가 착각을 한 모양이예요. 그래서 나는 이승으로 복귀하라는 명을 받아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 강가에 도착하였지요. 대나무 외다리에 올라 조심조심 걸어 나오는데, 한 가운데 쯤 왔을 때, 별안간 그 장대가 딱 부러지지 않겠어요? 바로 그 때, 아마 내 무덤에 금이 간 모양입니다. 이게 내가 살아돌아온 얘기요.” 그 후 그 선비는 살아서의 선행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깨닫고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김광순,《경북민담》
이상의 설화를 보면 선비의 영혼이 밀밭과 보리밭과 갈대밭을 지나고, 대나무로 만든 외다리를 건너 강둑을 따라 저승으로 가는 대목이 나오지. 새와 같이 날아가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생전의 인간이 힘겹게 걸어가는 대목을 연상케 하지. 여기서 '신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걸어다니는지 아니면 날아다니는지, 그리고 이 때의 속도는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어.
영계를 접하다 보면 실로 각양각색의 신을 보게 되는데 이들의 움직임도 천태만상으로 다른 것을 알 수 있어. 어떤 귀신은 인간의 걸어가는 속도밖에 안되는데, 어떤 신은 비행기가 날아가듯 빠르게 움직여. 이승에서는 제 아무리 신체가 발달되었다 하여도 보통 수준의 속도에 비해 큰 차이가 나지 않아. 그런데 사후에 신이 되어서는 이렇게 큰 폭의 차이가 생기게 돼. 이승은 물질의 세계인지라 물질의 역학적 지배에 의해 큰 차이가 있을 수 없지만, 사후의 영계는 물질적 원리가 아닌 정기(精氣)의 운행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들 정기의 상태와 이를 쓰는 신의 영적 수준의 여하에 따라 큰 폭으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거야.
영적 수준은 내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크게 1천에서 10천까지 열단계로 나뉘어져. 1천은 식물령, 2천은 동물령, 3~4천은 보통의 인간령, 5~9천은 신선, 10천은 절대계야. 여기서 3천에 해당하는 귀신들은 인간이 뛰는 정도의 속도를 지니고 있어.
그러므로 만약 대전에 있는 귀신이 서울에 오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꼬박 반나절은 걸리게 되지. 그런데 4천의 신명 정도만 되어도 한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어. 여기에 선계(仙界)의 신들을 예로 들면, 실로 몇 초 단위로 오고 갈 수 있어. 가령, 5천의 신은 평균적으로 1초에 구만리를 날아갈 수 있으며, 6천의 신은 빛의 속도에 버금가게 돼. 게다가 7~8천에 이르면 공간이동이 자유롭게 되고, 9천에 이르면 상념의 속도가 되어 거리의 제한이 없어지지. 이 정도 수준에 이르면 실로 시공의 구분이 묘연해져 절대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사람이 탈것을 이용하여 이동 속도를 빠르게 하듯, 신계에도 이러한 수단이 하나 있어. 신장 중에서 가장 빠른 신장이 팔문신장(八門神將)인데, 이 신장이 이렇게 빠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氣)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이를 타고 운행하기 때문이야. 기(氣)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그 움직임이 변화하는바, 이를 제대로 포착하여 흐름을 타게 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야. 마치 순풍에 돛을 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체계화 시켜 놓은 법술을 ‘구궁진법(九宮進法)’이라 해. 구궁은 자신이 현재 서 있는 곳을 중앙의 중궁(中宮)에 놓고 주위를 여덟게의 궁(宮)으로 갈라 기(氣)를 포착하는 운기술(運氣術)의 일종이야.
그렇기에 신 자체의 영적 역량이 미흡하다 하여도 이것을 이용하게 되면 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데 되. 마치 인간이 비행기를 이용하면 빨리 운행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그래서 3~4천의 귀신이나 신명들도 자신의 느린 움직임을 극복하기 위해서 구궁진법을 배우는 경우가 적지 않아. 그러나 이것도 단순한 원리가 아니어서 지적 작용이 미흡한 귀신이나 신명들이 터득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야. 그런즉 4천의 신명들 중에 일부만이 이 법술을 조금 사용할 줄 알며, 적어도 5천 이상의 선신은 되어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지.
팔문신장이 바로 이 법을 가장 잘 활용하는 신장으로, 구궁을 이용한 진법이 너무나 빨라서 항상 일을 처리함에 번개같이 나타나서 또한 번개같이 사라져.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고 말아. 그래서 팔문신장을 구궁을 관장하는 신이라 하여 무속에서 태을신장 다음의 서열로 높이 받들고 있는 것이지. 팔문신장은 호법의 개념을 넘어 천지조화를 주관하며 차원의 문을 지키는 천상의 대신장으로, 구천현녀 직속에 속해 있어. 팔문신장은 모두 여덟 개의 신장이 있는데, 휴문(休門)신장, 생문(生門)신장, 상문(傷門)신장, 두문(杜門)신장, 경문(景門)신장, 사문(死門)신장, 경문(驚門)신장, 개문(開門)신장이 그것이야.
요컨대 신의 속도는 이와 같이 영적 차원에 따라 천양지차로 갈라지게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기의 흐름을 이용하는 구궁진법이야. 세간에 기문(機門)이나 방위술에 등장하는 구궁은 원래 신계에서 운행을 위해 사용하던 것인데, 이것을 사람이 배워 풍수도 보고 운명도 예측하는 방술 이론으로 체계화된 것이지. 그러나 이것을 이론적으로만 이해해서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어. 기를 실제로 활용하는 수단으로 연구하고 깨우쳐야만 훗날 죽어서 선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선신(仙神)에 버금가는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야. 여하튼 인간 세계에서는 정신 수준의 높낮이가 행동의 민첩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죽어서는 이와 같이 천양지차로 벌어지게 되는바, 이 점을 명심하고 정신 계발에 힘써야 할 거야.
이걸로 영혼의 운행은 끝, 그 다음에는 영혼의 수명에 대해 알아모도록 할게
아래의 설화를 한번 보자.
-조선 태종 때 전라감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하연(河演)은 생전에 인천 소래산에 자신의 묘터를 잡고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그 나무는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는데 여기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하연 대감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백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인천 근방에 살던 그의 후손이 너무 가난하여 무덤 주위에 심어 논 나누를 어느 소금장수에게 팔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인천부사로 내려오는 사람은 관하에 부임하자마자 요절하곤 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영특하고 담력이 센 사람을 뽑아 인천 부사로 내려 보냈다. 새로 부임한 부사는 동헌의 사방에다 불을 밝히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조복(朝服)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부사는 이 노인이 생전에 높은 벼슬을 한 분임을 직감하고 당상으로 인도하여 앉게 하였다. 노인은 부사를 불러 가까이 앉게 하며 말하기를, “나는 예전에 벼슬을 하였던 하연이란 사람인데 부사한테 소청이 있어서 왔소. 전에도 왔지만 그 부사들은 나를 보고는 모두 놀라 죽고 말아서 소청을 말할 수가 없었오. 이제 담력있는 부사를 보니 내 소원을 이룰것 같구려. 인천 소래산에 나의 묘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내가 심어 놓은 나무가 많아 거기서 노닐곤 한다오. 그런데 불초한 자손이 가난을 핑계로 그 나무들을 소금장수에게 팔아서, 소금장수가 조만간에 나무를 베러 올 것 같으니 감사가 그것을 막아 주면 고맙겠소.” 하는 것이었다.
부사는 일단 승락하고 다음 날 조사해 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서 소금장수에게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다음 날 밤 하대감의 영혼이 부사를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갔는데, 말벗이 생기자 하대감의 영혼은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부사를 찾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자 하였다. 부사는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찮기도 하여, “하대감님, 도대체 신의 수명은 어느 정도 되기에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고 계십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하대감의 영혼이 대답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신수(神壽=신의 수명)가 남는 것은 아니지. 보통 사람들은 죽는 즉시 없어지고, 대인은 몇 백 년은 살게 되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사는 다시 물었다. “대감의 영혼은 몇 백년 지속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한 5백 년은 남지.” “그러면 저는 죽으면 얼마나 남겠습니까?” “자네는 영특한 일물이니 한 3백 년 정도는 남을 걸세.” 부사는 이 말을 듣고 나서 다시 물었다. “혹시 귀신이 꺼리는 물건은 없습니까?” 그러자 하대감은 복숭아를 꺼린다고 대답하였다. 그후 얼마가 지나 하대감이 다시 부사를 찾아 왔는데, 부사는 복숭아를 깎아서 대접하는 것이었다. 하대감은 이것을 보고는, “보통 귀신이야 복숭아를 무서워 하지만 나 같은 귀신은 상관없네. 그러고 보니 나는 정이 들어서 찾아오는데 자네는 내가 싫은 모양이구만. 그렇다면 걱정 말게나. 이제는 아니 오겠네.”하였다. 그 뒤로 하대감은 다시 오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민속종합보고서(전북편)》
이상과 같이 귀신의 수명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헌은 많지 않아. 귀신이 영적 수준에 따라 그 수명을 달리한다는 이론은 참으로 옳은 것이지. 그러나 보통 사람은 죽는 즉시 소멸된다는 말은 옳지 않아. 저급 귀신이라 하여도 수명이 보통 100(3대)~200(7대)년 가량은 되거든. 그 후가 되면 정기(精氣)가 느슨해져 더이상 신계에서 지탱할 수 없게 되. 즉 윤회해야만 하는 것이지. 그런데 생전에 정신계발에 힘써 정기가 공고한 신명은 200(7대)~450(15대)년 정도 존속할 수 있어. 그 후에는 마찬가지로 영적 진화를 위하여 윤회하여야 해. 그러나 5천 이상으로 진화된 선계(仙界)의 도통신들은 더욱 오랜 시간 동안 영계에 머무를 수 있어. 뭐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5천의 경지에 오른 신은 500~2000년, 6천의 경지에 오른 신은 2000~10000년 까지도 존속 할 수 있어. 7천 이상은 어느 정도 윤회의 굴레를 통제할 수 있는 바, 신수(神壽)를 거론할 의미가 없어지게 돼.
신의 한계 수명이 관찰된 바으로는 이와 같지만, 실제로 450년을 살 수 있는 신명도 죽는 즉시 윤회하기도 하고 몇 십년 만에 윤회하기도 해. 4천 이하의 신들은 영적 진화를 위해서는 저승보다는 이승이 훨씬 유리하기에, 영적 진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면 영계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윤회하려 하기 때문이야.
여하튼, 생전에는 정신의 수준과 수명과의 관계가 적지만, 죽어서는 이와 같이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이걸로 영혼의 수명은 끝, 다음에는 영혼이 사는 곳에 대해 설명해줄게
3천의 귀신과 4천의 신명은 5천 이상의 선신(仙神)들과는 달리 지상에 가까이 거하고 있어. 이는 인계의 영적 차원이 대체로 이들과 비슷하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선계는 지상과는 동떨어진 하늘나라, 즉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 형계와 영계(상계)의 공간 개념은 상이한 것으로, 형계에서의 공간은 결정적(決定的)이지만 상계에서의 공간은 가변적(可變的)이야. 그런즉 인간의 정신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어. 가령 어떤 사람이 영력을 높여서 정신이 5천에 오르게 된다면 이 자에 한해서는 선계가 지상에 접하여 있는 것이 될 것이야.
반면에 감정에 영향을 쉽게 받고 판단력이 흐려 언행이 불순한 사람이 있다면, 이 자는 3천의 귀계가 접하여 있을 것이지. 또한, 이 보다 더 심각하여 육신의 환락만 추구하고 충동적으로 언행 하는 자는 실로 그 정신이 동물적이라 할 수 있는 바 2천의 축신계와 접하여 있다 할 거야.
이렇게 신이 응하는 것도 인간의 영적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져. 따라서 신계의 위치는 곧 영적 차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지. 그러면 '지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귀신들은 어디에서 기거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점이 들 수도 있어.
옛 사람들은 귀신 하면 으례이 무덤에서 사는 것으로 믿어 왔어. 다음의 설화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지.
-옛날 어떤 나그네가 산길을 가다가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묘 옆에서 자기로 했다. 한참을 자는 데 어디선가 사람소리가 나서 깼다. 가만히 들어보니, “여보게, 여보게!”하고 조금 떨어진 묘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왜 부르나?”하고 나그네가 있는 묘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저쪽 묘에서, “오늘 밤이 내가 죽은 날일세. 그래서 아들 녀석이 오늘 밤에 내 제사를 지낸다네. 나하고 같이 제사밥이나 먹으로 가세나.” 그러니까 다시 이쪽 묘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보다시피 손님이 와서 못 가네. 자네나 얼른 다녀 오게.” “하는 수 없지. 그럼 나만 다녀 오겠네.” 그리고는 이내 조용해져서 나그네는 다시 잠이 들었다. 한 참을 자고 있었는데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 다녀 왔네. 자네 집의 손님은 잘 있나?” “으응, 잘 있네. 그런데 어째서 벌써 왔어?” “가 보니까 신통치 않아 이렇게 일찍 왔네.” “아니, 뭐가 그리 신통치 않아?” “제사 지내는 태도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손주녀석을 아궁이에다 집어 넣고 왔네.” “그게 무슨 소리야?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랬어?” “아, 국이라고 보니 글쎄 구렁이를 집어 넣어 놓고, 밥이라고 보니 바위덩이를 넣어 놓았는데 어디 먹을 맘이 생기겠는가? 그래 홧김에 손주 녀석을 아궁이에다 집어 넣고 왔다네.” “듣고 보니 자식들이 원체 잘못했구만.” 나그네는 이런 말소리를 듣다고 피곤하여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밤에 헛것을 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덤에서 들린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여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물었다. “혹시 어젯밤에 아무 일 없었습니까?” “아이고, 어제 저녁에 제사를 지냈는데, 우리 집 아들녀석이 아궁이에 데어 경황이 없었습니다.” “어제 누구의 제사를 지냈습니까?” “예, 저의 아버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나그네는 어제 밤에 묘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고는 밥과 국을 살펴보니, 과연 밥에는 돌이 들었고 국에는 머리카락이 빠져있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어제 밤에 헛것을 본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 집 주인은 감명을 받아 다시 제물을 마련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최운식,《충청남도 민담》
그런데 실제로 귀신은 이상의 설화 같이 무덤에만 거하는 것은 아니야. 흔히 귀신들은 백(魄/시체)이 놓여진 무덤에 기거하기도 하고, 여기서 벗어나 자유로이 떠돌아다니기도 해. 무덤에 기거하는 경우는 영이 아주 퇴화하여 해체의 위기에 놓여 백을 통하여 지기를 얻고자 하는 경우와, 자신의 사인에 원한이 사무친 경우를 들 수 있어. 후자의 경우는 대개의 귀신들이 억울하게 비명횡사하였을 때 그 죽은 자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는데 있지. 가령, 물귀신이라 하면 물에 빠져 죽은 귀신인데, 억울하게 객사하였기 때문에 원한이 남아 아직도 죽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지. 차에 쳐 죽은 귀신도 흔히 그 차에 계속해서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귀신이 정혼으로 되어 있어 원한이 사무치면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야. 명산을 찾아가 조상신을 찾아 제 자리를 찾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하는바, 죽은 자의 후손이나 친지가 직접 천도제를 올려 신계로 인도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야. 제 명에 맞게 죽는 경우는 대개 저승사자가 대기하고 있어 신계에서 자리잡기에 문제가 없지. 근데 이렇게 돌발적인 사태에 의하여 객사하는 경우는 명부에서도 손 쓸 겨를이 없는 것이야.
이렇게 귀신은 객귀가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퇴화되어 무덤에 거하며 지기를 흡기하거나 죽은 장소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기도 해. 명부를 거쳐 조상신계에 들어온 귀신이나 신명들은 지령부에 속하여 신계의 일을 맡아 하거나, 산천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모여 살기도 하고, 혹은 집집마다의 터주가 되기도 해. 집에서도 부엌, 안채, 마당, 변소, 사랑방 등등에 따라 나누어 신이 거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속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인간에 들어 붙어 강신을 내리기도 하는 등, 실로 귀신과 신명은 이렇게 광범위하게 인간 세상과 연관을 맺으며 존재하고 있지. 실제로 이신통(耳神通)이 일어나 영혼의 소리를 듣게 되면 명동 거리에 사람이 붐비는 것과 같이 주변에 귀신이나 신명이 널려 있음을 알 수 있어. 단지 그 영향이 미미하여 있는 듯 없는 듯 할 뿐이지 신이 인간의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야.
이걸로 영혼이 사는 곳에 대한 것은 끝. 아직 귀신에 대한 낱낱이 해부하기는 끝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