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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지지했다가 종북으로 몰려 사형
게시물ID : humorbest_9878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태산발호미
추천 : 90
조회수 : 11419회
댓글수 : 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4/12/13 10:24:36
원본글 작성시간 : 2014/12/13 08:52:08
출처 : 엔하위키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만석꾼 조판상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거기다가 큰아버지는 경성제국대학 의대 교수와 자유당 원내총무를 지낸 조경규였고, 
외삼촌이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하만복.  이 후 아들이 없었던 외삼촌 하만복의 집에서 양자 대우를 받으며 자랐고, 
진주중학교→대구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성장배경 때문인지 굉장히 우파 성향이 강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진주중학교 3학년 당시 학교 내에서 신탁통치 논쟁이 벌어졌을 때 강하게 반탁을 주장하다가 좌파 성향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학교를 중퇴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학 졸업 이 후 민단의 총본부 차장과 기관지 민주신문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1959년, 당시 조봉암이 간첩혐의로 구속되자 민단 내 개혁파 인사들과 '조봉암 선생 구명위원회'를 조직했고, 교포 2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낸다. 
이 일로 그는 극우 성향의 민단 지도부에게 찍혀 도쿄 인근 위성도시의 거류민단 부단장으로 좌천된다. 

일본 유학 시절, 1959년 12월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북송방침에 반대해 시위 주도하기도 했었고, 심지어 철로에 누워 북송열차를 가로막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을만큼 그의 신념은 반공주의자이자, 민족주의 성향을 기본적으로 견지하고 있었다. 
  
민족일보는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이라는 사시(社是)를 앞세워 창간 3개월 만에 판매본 4만 여부를 돌파하며 학생층, 지식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공보처의 1961년도 통계에 따르면 당시 국영신문인 경향신문이 1년 동안 8만 185부를 발행한데 반해 민족일보는 불과 3개월 동안 4만 532부를 발행했다고 한다. 

그러던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장면 내각이 붕괴된다.  당시 조용수는 박정희가 한 때 남로당 활동을 했던 전력에 한가닥 기대를 걸며 5월 17일 자 사설에서 

"자유진영 우방국가들은 이 군사혁명의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지원을 베풀어주기를 바란다"

면서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설을 올렸지만, 군부는 그를 비롯한 민족일보 이사진 13명을 반공법 7조의 "북괴를 찬양·고무한 혐의"로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넘겨진다.  
그는 혁명재판에서 8월 12일의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0월 31일 상고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사형 선고의 이유는 조용수가 조총련의 세작 이영근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 북괴에 이로운 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1961년 12월 21일에 사회당원 최백근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집행 이전 입회한 윤형중 신부의 인도로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의 친동생인 조용준씨, 그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그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그의 37주기인 1998년 12월 21일에 결성되었고,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가 그의 사형선고 사유인 반공법 위반건에 대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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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종필이 기획하고 이회창이 판결을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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