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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없는 삶에 관하여
게시물ID : phil_98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살결
추천 : 4
조회수 : 325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10/03 20:02:15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 고등학교 시절을 같이 보냈던 친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분향소에 차려진 그 친구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당시의 난 사실 그리 큰 상실감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친한 친구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받아들일 준비조차 안되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의 죽음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벅차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려야했다.
친구의 장례에서 피어오를 침묵과 오열, 공포와 엄숙..
그때부터였을까
죽음의 순간이 닥치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삶의 의미를 향한 절박한 갈망이 시작되었다.

삶의 의미에 대한 관심은 대개 임종의 순간에 직면하거나, 또는 개인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고민에서 비로소 자신의 삶이 피상적인, 깊이가 얕다는 인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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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찾지 말라. 죽음이 당신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완성으로 만드는 길을 찾아라." -다그 함마슐드




누군가는 꼭 치열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냐고 말한다.
그저 뭐든 적당히 하면서, 남들이 보기에 나태하고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여유가 있고 현재가 행복하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정답이 아니냐고 말한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히 행복하다는 결과만을 놓고서,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가치확인 없이 긍정적 태도만으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해보인다.
여기, 신이 내린 형벌로인해 바위를 언덕 위로 굴리는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한 거인이 있다.
거인이 바위를 산 정상까지 올리면 바위는 다시금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의 노동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허무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날 신이 이 거인을 불쌍히 여겨, 거인에게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이 고통스럽고 힘들며 무의미한 노동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느끼도록 최면을 건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개인적인 행복의 관점에서 그의 삶이 의미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거인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의 삶은 고통스런 삶에서 최고의 삶으로 올라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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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삶의 의미를 떠받치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있다.
왼쪽 기둥에는 '주관적 행복'이라 적혀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객관적 가치'가 적혀있다.
이 두 개의 기둥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삶을 떠받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개인의 주관적 행복은 충족했다하더라도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가치와 아무런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그 무언가에 열정을 발견하고 추구할 때, 그리고 그 발견 안에서 나보다 더 큰 존재에 관여하게 될 때.
이 두 개의 관점이 서로 합쳐짐으로써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창한 어느 날 평화로운 해변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분명 즐거움을 주는 일이지만 성취감은 느낄 수는 없다.
어떤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선 그것이 객관적으로 긍정적이라 말할 수 있는 가치가 그 속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열정을 품을 수 있는 대상은 특정한 객관적 범위 안에 존재해야하며 고로 어떻게 하느냐 보다도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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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열정을 갖고 몰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무언가는 반드시 그 자체로 가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 객관적인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판단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라는 요청을 받고,
다양한 기준들을 접하고, 경험의 범위를 확대하고, 낯선 문화나 삶의 방식을 배우는 과정에서
이 객관적 가치에 대해 기준을 세우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기준에 대한 확신은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것이어서,
때론 이단에 빠진 신도들이 교주의 명령에 복종하고 권능에 헌신하는 삶을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이
우리또한 비슷한 판단의 오류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기에 항상 스스로를 의심하고 회의하여야한다.
이런 과정들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열정을 바쳤던 목표가
그저 세속적이고 허무한 일에 불과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어느 날 갑자기 얻게 될지도 모른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치 있다고 인정한 대부분의 활동 또한 판단 오류의 위험이 있다.
1명이 가치 판단에서 실수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또한 같이 실수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과거 역사 속에서는, 특히, 도덕성에 관한 부분에서는 사회 전체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며 죽음의 순간까지 안고 살아가야할 고민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이 급급하고 당장 벌어먹고 생활하는데 바빠 이런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사치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에 무관심한 채로 남아 흘러가는 대로 살기엔 우리의 한번뿐인 인생이 너무나도 아깝다.
인생의 대부분을 고작 밥으로 배를 채우고 TV 앞에 앉아 생각없이 히히덕거리며 돈 몇푼 안되는 월급으로 한 달 한 달 삶을 연명해가기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나도 아깝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과 고민은 안락, 명예, 부와 같은 피상적인 목표에 집착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조언을 들려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항상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하는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원하고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논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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