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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0 독도 정밀지도 나왔다
게시물ID : humorbest_989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나가던
추천 : 50
조회수 : 2171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5/07/03 01:11:44
원본글 작성시간 : 2005/06/29 23:52:24
1:2200 독도 지도 입니다. (주)동아지도에서 기획 제작한 이 지도는 여성동아 7월호 별책 부록으로 나온 것입니다. 사진을 클릭한 뒤 뜨는 사진의 오른쪽 아래에 나타나는 확대 아이콘을 클릭하면 실제 크기의 독도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국내 처음으로 독도 안내도 펴낸 지도 전문가 안동립 
올 초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독도 영유권분쟁이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과연 ‘우리 땅’ 독도의 모습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근 국내 처음으로 독도 지도를 펴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동아지도 안동립 사장을 만나보았다. 

지도제작업체인 경기도 부천의 동아지도 사무실에 들어서자 안동립 사장(48)은 다짜고짜 두툼한 지도책부터 꺼내 보였다. 건장한 체구인 안 사장이 두 손으로 들어도 힘에 부쳐 보이는 두께의 책 제목은 <조선반도 지도집성(朝鮮半島 地圖集成)>. 일제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침탈을 본격화하던 1910년 펴낸 책으로,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이걸 보세요. 우리나라 구석구석, 논 밭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표시돼 있죠? 이런 지도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철저히 지배할 수 있었던 겁니다. 부끄러운 일은, 남의 나라 사람들도 이렇게 꼼꼼한 지도를 갖고 있는데, 정작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런 지도가 단 한 장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수탈하고, 우리는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안 사장은 “지도는 단순히 길 찾는 데 사용하는 종이 조각이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역사·산업구조·정치체계까지 보여주는 중요한 도구”라고 강조했다.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들은 식민 침탈을 시작하기 전 먼저 그 나라의 지도부터 만들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우리 손으로 만든 세계 지도가 한 장도 없다고 한다. 세계 지도를 만들 만한 자본이나 축적된 노하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지도 선진국 일본과 독도를 놓고 싸우고, 중국에 대해서는 동북공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라며 혀를 찼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소리를 높이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지도들을 좀 보세요, 독도가 어떻게 나와 있는지. ‘독도’라는 이름을 단 섬은 그려져 있지만 그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안에 뭐가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가 없잖아요. 일본에서 이미 1백 년 전에 만든 <조선반도 지도집성>보다도 못한 지도를 들고 우린 지금 일본과 싸우고 있는 겁니다.”


올 초 뜻하지 않게 군사 지도 구한 덕분에 국내 처음으로 독도 관광 안내도 펴내
그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직접 독도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은 쉽지 않았다. 독도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최근까지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됐던 것. 그간 지도를 만드느라 전국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 역시도 독도에만은 발을 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군사시설보호구역이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독도가 잘 나온 항공사진을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나왔다고 한다. 올 초 한국지도학회 이사 자격으로 모 부대의 초청을 받아 방문했는데, 한쪽 벽면에 독도 군사 지도가 붙어 있었던 것. 안 사장은 이 지도를 사진으로 찍어서, 지난 6월 마침내 ‘독도 관광안내도’를 펴냈다.

안 사장은 오랜 고생 끝에 만들어낸 독도 지도를 펼쳐 보여주었다. 동도, 서도 등 독도를 이루고 있는 두 섬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표현돼 있을 뿐 아니라, 바위 하나하나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는 지도는 한눈에 봐도 남달랐다. 서도의 한쪽 구석에 있는 우물부터 어민 숙소로 이어지는 작은 길까지, 독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세했다.

“독도 내 시설물들은 군사 시설이 아니라 해경 시설이기 때문에 표시를 해도 문제될 게 없어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런 지도가 나오지 않은 건 상업성이 없기 때문이죠. 독도에 갈 사람이 거의 없는데 지도를 만들어야 얼마나 팔리겠어요. 저는 판매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손으로 제대로 된 독도 지도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게 됐으니 기쁘죠.”

안 사장이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78년. 첫 직장으로 일본의 하청을 받아 지도를 제작하는 중소업체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는 모든 지도를 수작업으로 그려낼 때라, 일본 회사들은 상대적으로 인건비 부담이 적은 한국에 제작 하청을 맡겼다고 한다. 이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안 사장은 88년 ‘동아지도’를 창업해 직접 지도 제작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93년 대전 엑스포 공식 지도제작사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회사 운영에 숨통이 트였죠. 그때부터 독특한 아이디어를 담은 지도들을 펴내기 시작했어요.”

이 때부터 안 사장은 지도에 음영을 넣어 길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소위 ‘3D’ 기법을 개발하고, 한반도의 남쪽을 위로 올린 ‘거꾸로 지도’를 만들어 각각 특허를 획득하는 등 실험적인 지도 제작으로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거꾸로 지도’의 경우 지도의 맨 위에 제주도와 부산이 올라와 있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지도를 거꾸로 뒤집어 놓는 것만으로도 남쪽 지역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편해진다는 것. 덕분에 ‘거꾸로 지도’는 지난 97년 발매된 이래 지금까지 1천만 장이나 팔리는 대히트를 쳤다고 한다.

안 사장은 올 초 ‘초정밀 5만분의 1 대한민국 지도’를 펴내 6개월 만에 무려 6만 권이 팔리는 ‘대박’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도 사업을 시작할 때 제 꿈이 역사에 남는 대한민국 지도와 세계 지도를 만드는 거였어요. 올 초에 정부가 펴내는 대한민국 국가기본도의 내용이 모두 담겨 있는 대한민국 지도를 내놓았으니 하나는 이룬 것 같아요. 이제 남은 건 정말 제대로 된 세계지도를 만드는 것뿐이죠.”
안 사장은 향후 몇 년 안에 우리나라가 중심에 놓인 세계 지도를 제작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사제공= 여성동아  기획·송화선 기자 
                             글·이영래<자유기고가>
                             사진·지재만 기자


다음은 이 독도 지도의 뒷면에 있는 독도에 관한 정보입니다.
아이도 알기 쉽게 정리한 ‘우리 땅’ 독도 상세 정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독도 영유권 문제.  일본 고위 인사들의 잇따른 망언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독도 문제가 불거진 가운데 일본인들이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우리 정부도 그간 일반인의 입도를 금해왔던 독도를 개방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독도 관광이 허용돼 한층 가까워진 ‘우리 땅’ 독도에 대해 지리, 생태, 역사, 수호활동, 관광에 이르기까지 상세 정보를 총정리했다.


위치 동경 131°52′08″, 북위 37°14′22″
주소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
거리 울릉도에서 87.4km, 죽변항에서 216.8km
우편번호 799-805
소유자 대한민국(해양수산부)
면적 약 5만5천 평(여의도의 절반 정도)
우리나라 최동단에 있는 독도는 동도와 서도라는 2개의 주된 섬과 그 주위에 있는 32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도를 수섬이라 하고, 동도를 암섬이라 부른다. 동도와 서도의 거리는 110~160m.

기후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 연평균 기온은 약 12℃.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 1℃, 가장 더운 8월의 평균기온은 23℃로 온난한 편이다. 독도의 연평균 풍속은 4.3m/s으로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연평균 풍속 4.7m/s과 비슷한 수준.
독도는 안개가 잦고 강우일수는 1백50일에 달하며 연평균 강수량이 1240mm로 많은 편(우리나라 연평균 강수량 1200mm).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리지만 바닷바람으로 인해 눈이 높이 쌓이지는 않는다.


탄생 & 생태
독도는 4백60만~2백만 년 전 해저 약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탄생됐다. 울릉도(약 2백50만 년 전~1만 년 전)나 제주도(약 1백20만 년 전~1만 년 전)보다 일찍 생성된 것.
독도는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토양층이 발달하지 못했고, 비는 내리는 대로 흘러내려가 수분이 부족한 탓에 자생하는 식물 종류가 적다. 그나마 울릉도에서 날아온 씨앗이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는 풀과 나무가 70~80종에 이르는데 대부분 키가 작아 바닷바람에 잘 적응하고, 잎이 두껍고 잔털이 많아 가뭄과 추위에도 잘 견딘다.
독도는 식물이 살기엔 썩 좋지 않은 환경이지만 새들에겐 좋은 쉼터다.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황조롱이, 물수리, 노랑지빠귀 등 22종이 서식하며 황로, 흑비둘기, 흰갈매기, 까마귀, 노랑발도요, 딱새 등 철새가 찾아든다. 82년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등의 번식지로 독도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었으며 99년 이후 천연보호구역으로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고 있다. 현재 독도에는 자연산 포유류가 없으며 육지에서 데려와 독도 경비대가 키우는 삽살개가 유일한 포유류.


경제적 가치
독도 인근 해역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북한 한류와 남쪽에서 올라오는 쓰시마 난류가 교차하는 황금 어장. 86종의 플랑크톤이 살고 있으며 이를 먹이로 삼는 연어, 송어, 대구, 명태, 꽁치, 오징어, 해삼, 전복, 문어 등 다양한 어종이 많이 잡힌다. 특히 국내 전체 오징어 어획량 중 60%를 독도 연안에서 잡아들이고 있어 오징어잡이철인 겨울이면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고기를 모아서 잡기 위한 불빛)이 독도 주변을 하얗게 밝히곤 한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한·일 어부들은 독도 어장의 어업권을 놓고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여왔다.

최근 독도는 해저자원 발굴의 전진기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97년 말 러시아과학원 무기화학연구소가 독도 주변 해역을 포함한 동해바다 밑에 새로운 천연가스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하이드레이트가 상당량 매장돼 있을 것이라고 발표한 것. 하이드레이트는 메탄이 주성분인 천연 가스가 얼음처럼 고체화된 상태로 그 자체가 훌륭한 에너지 자원이면서 석유 자원이 묻혀 있음을 나타내는 까닭에 독도 주위 해역에 석유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토 분쟁의 유래
독도가 국제 사회에 ‘분쟁 지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52년. 그해 1월18일 우리 정부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하며 해방 이후 처음으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밝혔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월28일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竹島; 일본에서 독도를 부르는 이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문서를 한국 정부에 보내옴으로써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한·일 양국 사이의 외교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두 나라의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이 내세우는 근거는 일본이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킨 시마네현 고시다. 이 때문에 독도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1905년 이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시켜주는 사료들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부속 도서라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1451년(문종 원년) 편찬된 <고려사지리지>에는 “혹자가 말하기를, 우산과 무릉은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우산은 독도, 무릉은 울릉도를 가리킨다.

○1454년(단종 2)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두 섬의 존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우산, 무릉 두 섬은 현(울진현)에서 바로 보이는 동쪽바다 가운데 있으며,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 것.

○1531년(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 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도) 세 봉우리 위의 나무와 산 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며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을 잇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것. <동국여지승람>은 아직까지 발련되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 역사서에서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기록은 점점 줄어든다. 이는 조선이 부역을 피해 섬으로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왜구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펼친 탓이다. 급기야 섬 주민들에게 ‘본국을 모반한 죄’를 적용하자 울릉도와 독도를 찾는 육지인들의 발길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용복 사건과 영토 분쟁의 종결
이렇듯 서서히 잊혀져가던 섬, 독도와 울릉도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693년(숙종 19) ‘안용복 사건’이 일어나면서다. 이는 경상도 동래 출신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에 출어했다가 일본 어민들에 의해 끌려간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시마 섬에 붙잡힌 안용복이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와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에 항의하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됐다. 안용복의 말을 전해들은 쓰시마 도주(島主, 조선시대 쓰시마섬 영주를 일컫는 말)가 조선에 서계(외교 문서)를 보내 조선 어민들이 일본령인 죽도(울릉도)에 출어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

이에 조선은 울릉도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조선의 영토라며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왕래를 금한다는 내용의 서계를 쓰시마 섬에 보냈다. 그리고 3년 만인 1696년 일본 정부가 마침내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출어를 금지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일본 어선이 나타나자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에 출어한 일본 어민들의 처벌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그 이듬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에 서계를 보내,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해역 조업을 금한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을 알려왔다. 이로써 울릉도 영유권 분쟁이 일단락됐다.

울릉도 영유권 분규가 매듭지어지자 조선 정부는 그해부터 3년에 1번씩 울릉도를 순찰하는 울릉도 수토제도(搜討制度)를 만들었다. 수토가 정기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동해의 지리가 밝혀졌고, 이를 통해 일본과의 국경도 분명해지게 됐다. 당시 제작된 <동국지도> 등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우리 역사
최근 일본은 안용복 사건 당시 일단락 된 영토 분쟁에 대해 당시 정리된 것은 울릉도에 대한 것일 뿐 독도는 여전히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독도에 관한 기록인 <은주시청합기>(1667년)에 “일본의 서북경은 은주(오키섬)로써 한계를 삼는다”라고 쓰여 있다. 오키섬은 독도를 사이에 두고 울릉도와 대척점에 있는 일본 시마네현의 섬. 우리 기록 중에도 이와 들어맞는 내용이 있다. 1714년(숙종 40) 강원도어사 조석명의 보고에 따르면 “울릉도 동쪽으로 도서가 잇달아 있고 이 섬들은 왜경(倭境)과 접하게 된다”고 하여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며, 일본 국경과 인접해 있음을 알려준다.

주춤했던 일본인들의 울릉도 왕래가 19세기 중엽 서서히 재개되자 1881년(고종 18) 조선 정부는 일본 외무성으로 외교문서를 보내 항의하고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에 임명해 본격적으로 섬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규원은 1882년 울릉도를 살펴보고 돌아와 고종에게 울릉도는 개척이 가능한 섬이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울릉도 개척을 결정하고 다음 해부터 희망자를 모집해 입도시키기 시작했다.

사람 수가 늘어나자 1900년(광무 4)엔 처음으로 울릉도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해 제정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울릉군을 정식 지방 관제로 편입했으며 독도가 울릉군수가 관할하는 우리 영토임을 명시하고 있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하나의 독립군으로 정하면서 군청 관할 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및 석도(石島)라고 못 박았는데 죽도는 울릉도 앞에 있는 지금의 죽도를 가리키고, ‘울릉전도’는 울릉도와 이에 부속된 섬과 암초의 통칭이다. ‘석도’는 훈독(訓讀)하면 ‘독섬’ 혹은 ‘돌섬’이 되는데 지금도 울릉도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른다.

그러나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2월 일본 메이지 정부는 돌연 독도를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를 통해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 무렵 대륙으로의 영토 확장 야욕을 내보이던 일본이 러시아와의 ‘동해해전’을 앞두고 그 전까지 동해상의 작은 돌섬 정도로 여겼던 독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 대한제국의 참정대신 박제순이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을 부인한 것을 제외하면 한동안 한·일 양국간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교섭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 정부는 이미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 우리 정부가 1952년이 되어서야 국제 사회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힌 것도 같은 이유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이후 곧바로 동해상에 ‘평화선’, 일명 ‘이승만 라인’을 그어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오고 있다. 국제법상으로 볼 때 영토 주권의 핵심 요소는 지배 형태가 실제 효력을 갖는가를 따지는 ‘실효적 지배’다.


독도의용수비대
해방 이후, 6·25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다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일본 어민들이 계속해서 독도 인근 해안으로 고기잡이를 하러 나왔고, 독도에 상륙해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라는 표목까지 세웠다.

이에 분노한 울릉도 청년 45명이 스스로 의용수비대를 만들어 독도를 지키기로 결의했다. 홍순칠을 비롯한 의용수비대원 대부분은 참전군인 출신이다. 이들은 1953년 4월 첫 활동을 시작한 이후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돌려보내고,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을 경기관총으로 집중 사격해 격퇴시키는 등 ‘독도 지킴이’로서 큰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훗날 이들의 공적을 인정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갔다.


독도 주민
주민등록 주소지가 독도인 최초의 인물은 1981년 독도로 주민등록을 이전한 최종덕씨. 울릉도 주민이던 그는 1965년 독도에 들어가 87년 사망할 때까지 독도에 살았다. 당시 그의 주소는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67(현 독도리 산30). 최씨가 사망한 후 그의 사위 조준기씨가 같은 주소에 전입해 1994년까지 살았다.

최근 독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독도로 주소지를 옮기는 사람 수가 늘어 2003년 1월까지 집계된 바에 따르면 ‘주민등록상’ 독도 주민은 2백15가구 7백49명에 이른다.


독도 관광 정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정부는 일반인의 독도 입도를 금해왔으나 올해 3월24일부터 일반인의 독도 입도를 허용했다. 그러나 독도 환경보호를 위해 한 번에 70명씩 하루 두 번 1백40명으로 입도 인원을 제한하고 있어 독도 관광을 하려면 여객선사에 미리 예약해 입도 인원에 들어야 한다. 

울릉도에서 하루 두 번, 오전 7시30분과 오후 2시30분에 여객선 삼봉호가 운행된다. 운임은 어른 3만7천5백원, 어린이(2~12세) 2만3백원. 문의 054-791-8111~2 (독도관광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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