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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림 감상 및 아쉬운 점 + 게임 잡담
게시물ID : gametalk_990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누굴까?
추천 : 10
조회수 : 1586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3/09/15 02:31:45
**주의 : 낮에 친구와 대화하던 걸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흐름에 맡겨 적었기 때문에 글이 산만하고 깁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
 
제가 처음 접한 엘더 스크롤 시리즈는 4편인 오블리비언이었습니다. 당시 오블리비언을 플레이하고는 'RPG의 한 계통에서 일가를 이루기는 했는데 내 취항은 아니다'라고 느꼈지요. 그 후 3편 모로윈드를 해 보고는 '이게 오블리비언보다 훨씬 나은데?'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몇 달 전 5편인 스카이림도 플레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스카이림이 오블리비언보다도 더 못한 게임이 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분명 베데스다 게임 특유의 장점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특유의 단점도 훨씬 심화되었고, 저에게는 이 단점들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우수한 기술력과 개발능력, 인원과 자본을 가진 게임회사가 이런 식의 게임을 만든다는 데 안타까움을 느껴, 다른 분들과 의견을 나누고자 이 글을 씁니다.
 
 
그래도 리뷰이니 스카이림의 장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카이림은 개발방향이나 성향은 몰라도 베데스다답게 그 완성도는 상당히 높은 게임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출난 장점을 두 가지 꼽자면 미술적인 부분과 완성도가 되겠습니다.
스카이림의 미술적, 시각적인 면은 거의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원경과 근경, 지형지물과 자연현상, 도시와 가로, 각 종족의 컨셉, 생물체들과 건물 모두가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잘 어울립니다. 같은 회사의 폴아웃 3도 시각적인 면에서만큼은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는데, 이번 작품도 그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 줍니다. 간혹 게임 전체가 단색, 저채도 위주라고 싫어하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그 이외에는 게임을 해 보신 분들은 다들 시각적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충분히 느끼셨을 겁니다.
그리고 몰입감. 스카이림의 몰입감은 훌륭합니다. 특유의 양손을 마우스의 두 버튼에 대응하는 시스템과 맞물려, 스카이림은 1인칭이든 3인칭 숄더 뷰 시점이든 캐릭터와 하나가 되어 플레이한다는 느낌을 주는 데 있어 성공적인 게임입니다. 심지어 콘솔 위주의 UI나 몇몇 모션(제자리뛰기 등), 효과음 같은 사소한 문제들마저도, 직접 확인은 못 해 봤지만 유저 MOD가 충분히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지요. 이런 면들에 있어서는 '역시 베데스다'라고 할 만합니다.
 
 
실컷 비행기를 태웠으니 본제인 단점으로 넘어가야겠지요 : )
스카이림의 단점을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몰입감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위에서 몰입감이 장점이라고 해 놓고 무슨 소리냐고요?
스카이림의 장점으로 든 몰입감은, 말하자면 '조작적 몰입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후좌우로 움직이고 동작을 취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플레이어는 모니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만 정말 게임 세계 안에 들어가서 캐릭터가 되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는 다른 차원에 관여하는 몰입감도 존재합니다. 바로 RPG의 근간이 되는 '롤 플레잉', 역할을 연기하는 데서 오는 몰입감이 그것인데요. 시쳇말로 컨셉질입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상황적 몰입감'이 되겠네요. '캐릭터의 입장'이 되어, 현재 캐릭터가 알고 있는 정보로부터 무엇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위와는 다른 의미에서 캐릭터와 하나가 되는 것이 이 상황적 몰입감입니다.
 
조작적 몰입감이 극단적으로 중요한 FPS나 TPS 같은 슈터 게임은 몰입감을 위해 더 사실적인 모션과 음향을 만들고,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화면을 붉게 점등시키거나 암전시키며, 데드 스페이스 같은 게임에서는 HUD 자체를 극단적으로 간소화해서 플레이어가 모니터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상황적 몰입감을 증진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제가 두 가지를 꼽자면, 첫째로는 플레이어가 하고자 하는 행동을 캐릭터가 실제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캐릭터의 행동의 과정이 플레이어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따르거나, 혹은 최소한 플레이어의 동의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 전자는 물론 위의 조작적 몰입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빵 한 덩이를 다룸에 있어 그냥 먹거나, 여러 덩이로 나누거나, 잼을 바르거나, 가루를 내서 뿌려 새를 모으거나, 찢어서 안에 뭐가 든 것이 없는지 살피거나, 잉크를 닦는 데 쓰거나, 독을 뿌려 옆 사람의 자리에 두거나, 창문에 던져 신호를 보내는 데 쓰는 것, 혹은 어떤 엄중하게 감시받는 건물 안의 중요한 서류를 훔쳐보기 위해 캐릭터의 능력에 따라 변장하고 잠입하거나, 지붕에 밧줄을 걸고 올라가 덧창으로 들어다보거나, 벽에 칼집을 내서 잡고 기어올라가거나, 멀리 보기 마법으로 들여다보거나, 폭탄으로 벽을 날리고 잔해를 살펴보거나, 경비병을 매수하여 훔치게 하는 것 등 훨씬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하겠다'라고 생각한 것을 캐릭터가 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데 게임에서 그 상상력을 무한히 지원할 수 는 없으니까요. 옛날 게임들은 이를 구현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단어를 키보드로 입력함으로써 캐릭터를 움직이는 인터페이스를 선택하기도 했습니다만, 점점 플레이어와 제작자 모두의 성향이 보다 직관적이고 단순한 쪽으로 옮겨가면서, 일부 어드벤쳐 게임처럼 정해진 몇 개의 행동(walk, see, investigate, pick 등)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나, 폴아웃 시대의 게임처럼 마우스 좌,우클릭 조작 + 특수 행동에 필요한 스킬 버튼으로 조작하는 방식을 거쳐, 요즘은 정해진 몇 개의 동작을 제외하면 모든 동작이 하나의 액션 키(대표적으로 E키나 F키)에 수렴하는 게임이 많지요. 이 때문에 역으로 E키가 화면에 뜨니까 누르기는 하는데 그럼으로써 캐릭터가 무슨 동작을 취할지를 플레이어가 모르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여담이지만, 얼마 전 어떤 플래시 게임에서 아이템 - 수류탄을 선택했더니 수류탄을 먹었다면서 대미지를 입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점은 어느 정도는 그래픽의 발달에 따라 수반되는 부작용이기도 합니다. 그래픽이 발달하고 정교해지며, 특히 3D 그래픽으로 옮겨오면서, 게임의 퍼즐적 요소를 해결하기 위해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을 찾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또한 행동의 결과를 표현하는 것(특히 지형 차원의 오브젝트의 처리) 또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은 웨이스트랜드 -> 폴아웃 1,2 -> 폴아웃 3의 흐름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나지요.
스카이림도 이런 면에서 썩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만 이것도 일종의 시대의 흐름인지라 이 점에 있어 스카이림만을 비판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후자를 살펴봅시다. 캐릭터의 의사결정이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게임 시스템, 그 중에서도 게임 디자인과 시나리오가 받쳐 줘야 합니다. 캐릭터가 처히진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플레이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결정에 따른 게임 경험이 따라와야 하고, 플레이어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결정을 캐릭터가 멋대로 내리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이건 어렵습니다. 즉석에서 던전 마스터가 유연하게 대응하거나 변명: )할 수 없는 컴퓨터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제어하도록 설득하는 것도, 상상력을 실천하게 하는 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RPG의 정수라고 할 만한 부분입니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롤 플레잉 게임의 기본입니다. 단순히 캐릭터 육성만을 위해 RPG를 한다면 그건 쿠키 클릭커를 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물론 RPG의 장르는 넓고 많은 곁가지가 있습니다. 디아블로처럼 실시간 액션에 치중하고 RPG의 요소는 캐릭터 육성만 남겨 둔 액션 RPG, D&D나 기타 RPG 룰에 기반한 전투와 던전 크롤링에 집중한 게임들도 많이 있으며 일본식 RPG는 플레이어가 주인공 캐릭터에 이입하기보다는 이들을 따라가며 지켜보는 것에 가까운 게임들도 많지요. 이런 종류의 게임들 중에서도 훌륭한 게임들이 많습니다.
스카이림은 어떨까요? 스카이림은 물론 분량상 던전 크롤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던전 크롤링이 주가 되는 게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스카이림에서 메인 퀘스트를 빼 버리고 하염없이 돌아다니며 던전을 탐사하는 게임을 만든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스카이림의 이야기, 주인공이 처해진 상황과, 주인공이 겪는 사건과, 그 도중의 위기와, 마지막의 대단원까지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분명 메인 스토리라인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비록 빈약한 메인 퀘스트 구조 때문에 그렇게 안 보일 수도 있지만, 일단 플레이어의 판단과 결정 하에 이루어지며, 따라서 스카이림도 정통 RPG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렇게 롤 플레잉의 시스템을 구현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때문에 위에 적은 것이 '최소한 플레이어의 동의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입니다. 캐릭터가 무엇을 하고 어떤 일을 겪을지에 대한 제어권을 완전히 플레이어에게 넘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그 과정을 플레이어가 납득하여 '나라도 저렇게 하겠다'는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게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중요한 선택에서 분기를 만들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결과, 다른 경험이 주어지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게임의 개연성과 당위성, 자유도가 모두 포함되는 거지요. 이 부분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따라 RPG의 성향과 완성도가 결정됩니다. 이러한 롤 플레잉의 요소와, 어찌 보면 정반대되는 부분인 '정해진 시나리오, 정해진 캐릭터'의 요소를 어떤 비율로 섞고, 얼마나 잘 배합하는가에 의해 게임은 목적 없이 세계 자체를 체험하는 게임이 될 수도,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 외에는 그냥 책을 읽는 거나 다름없는 게임이 되기도 하며, 시나리오가 아름다우면서도 자유로운 게임이 될 수도, 억지 진행이 눈에 띄는 게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왕년에 발더스 게이트가 RPG계의 이단아로서 호불호가 갈리고 논쟁의 대상이 된 것도 이러한 문제가 중심이 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바로 이 점, '캐릭터의 의사결정이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저는 스카이림에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스카이림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한 문장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서브퀘스트 따위를 하고 있을 분위기가 아니다'
장난 같지만 이건 엄청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선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주인공의 상황부터 생각해 봅시다.
스카이림에 무시무시한 고대의 생명체인 드래곤이 재림하여 스카이림 전역의 마을과 가도를 습격하고 있으며, 점점 세를 불려 최종적으로는 고대에 있었던 드래곤의 지배를 부활시켜 인류를 다시금 노예로 삼으려 합니다. 이들을 부활시키는 것은 아카토쉬의 첫째 자식이자 세계를 삼키는 자, 엘더 스크롤의 최후의 예언에 등장하는 드래곤 알두인입니다. 여러 영주들은 사건데 대처는커녕 인식도 거의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오로지 자신만이 용을 죽이고 알두인을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인 드래곤본이라는 운명을 깨닫고, 회색 현자들과 몇몇 조력자들의 도움만으로 알두인을 저지하고 당장 끝장날지도 모르는 세계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 상황에서 주인공은 마카스의 미숙한 대장장이 도제나 솔리튜드의 경비병들을 위해 책을 구하러 어딘가의 던전을 뒤지고 있는 건가요?
 
이와 같이 스카이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브퀘스트와 무수한 던전들은 이들을 체험할 당위성이나 개연성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아니, 오히려 체험하지 않아야 할 당위성이 훨씬 크지요. 메인 퀘스트의 설정은 엄청나게 급박해서 일직선으로 알두인을 막으러 달려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자니 분량은 얼마 안 되고 게임을 뭐 하러 샀는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각 세력(컴패니언, 대학, 길드) 퀘스트를 억지로 메인 퀘스트에 엮어 놓은 걸 볼 때 제작진도 이 게임을 메인 퀘스트만 달리라고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제 관점으로는, 게임의 엔딩을 봤는데도 게임 경험의 반도 경험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엔딩을 본 뒤 서브퀘스트와 던전을 찾아다니자니 목적의식도 의미도 없고 뭐 하자는 건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스카이림을 플레이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습니다. 바로 '메인퀘스트를 보면 사태가 급박하다고는 되어 있지만 사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느다'라는 게임 외적인 인식을 바탕에 깔고, 주인공이 중대한 사명을 지닌 드래곤본이 아니라 그냥 힘 센 용병이 되어 스카이림을 유람하는 입장이라고 (아니면 주인공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주인공이 놓인 급박한 상황에 플레이어가 동화되어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것이 스카이림의 치명적인 결함이며, 몰입감을 엄청나게 저해하는 요인입니다. 캐릭터의 입장에서 부탁과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이건 메인, 이건 서브퀘스트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RPG의 몰입을 막는 요소인데, 이들이 서로를 방해하기까지 하며 퀘스트 구조의 존재감을 재차 인식시키니 아무리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도 이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물론 메인-서브 퀘스트의 포맷은 어느 정도 정형화되었으며, 여러 게임들에 익숙한 플레이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 구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위에서 말한 플레이어의 동의, 즉 당위성과 개연성이 필요합니다. 즉 플레이어로서가 아니라 캐릭터로서도 저 퀘스트를 수행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소한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장치는 많습니다. 게임마다 이런 설득력을 부여하는 방법은 다양하지요. 미덕을 쌓아 아바타가 되기 위해서라거나, 마을을 구하기 위한 미약한 단서만 쥐고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조그만 단서라도 얻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탐색하는 상황이나, 정체를 감추고 새로운 신분으로 유명해질 필요가 있다거나, 여행을 위해 들르는 경유지에서 자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거나,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이 생업인 사람이 몬스터에 얽힌 기괴한 사건을 해결하는 와중에 다른 몬스터에 대한 의뢰도 받는다거나 하는 설정들은 모두 여러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서브 퀘스트를 수행할 충분한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다시 위로 돌아가 스카이림의 설정을 보면.. 게임 디자인과 시나리오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게임을 망쳐 놓는지를 알게 됩니다. 동기 부여와 당위성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메인 퀘스트에 집중하게 되어 있지만 게임의 구조나 분량은 정반대인데다, 이 둘이 끊임없이 충돌하기까지 하지요.
 
퀘스트 구조가 계속해서 눈에 띄며 몰입을 방해하는 데는 각각의 퀘스트의 구성의 탓도 있습니다. 스카이림의 퀘스트는 대체로 빈약하다고 평가받는데, 이는 메인 퀘스트의 비중이 적고 절대적으로도 너무 짧다는 것에 의한 부분도 있지만, 퀘스트의 대부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면이 큽니다. 어떠한 퍼즐적, 어드벤쳐적인 요소도 없다는 것이지요(게다가 각 세력 퀘스트들은 줄거리 자체가 어색하기까지 합니다..). 이건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고 해석하기는 힘든 것이, 실제로 퀘스트의 절대 다수는 그냥 아이템 획득, 던전 클리어와 목표 살해가 전부, 게다가 그 위치까지 퀘스트 마커가 찍어 줍니다(퀘스트 마커를 끄면 된다는 분도 계신데, 퀘스트 마커 없이 디자인한 게임과 퀘스트 마커를 넣도 디자인한 게임에서 마커만 끄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데이드릭 아티팩트 퀘스트에는 아주 조금 더 공을 들이긴 했지만, 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한 부분이고, 어떻게 하는지를 플레이어가 생각해야 하는 부분은 대동소이합니다. 스카이림의 퀘스트에는, 다른 게임이라면 이 중 한두 요소는 가지고 있을, 저널을 뒤져 가며 정보를 찾아야 하는 부분도, 키워드를 물어 가며 지명을 알아내는 부분도, 자기 캐릭터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퀘스트를 해결하는 부분도,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부분도 극단적으로 부족합니다. 이건 이미 게임이 아니라 작업, 노동입니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퀘스트는, 실제로 서브퀘스트들을 수행할 개연성이 없다는 사실과 시너지-_-를 일으켜 기껏 만들어 놓은 컨텐츠를 즐기는 것을 방해하는 데 엄청난 효율을 보입니다.
 
 
이상으로 스카이림에 대한 푸념 반, 게임 잡담 반으로 감상을 적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악담을 적어 놓았습니다만 역시 그냥 가망도 아무 것도 없는 흔한 3류 게임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적지는 않았겠지요. 이런 긴 글을 적게 된 것은 정말로 대단히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맨 위에 '일가를 이루긴 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베데스다는 RPG 업계의 몇 안 남은 보루입니다. 바이오웨어는 정신줄을 놓고 RPG의 본질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선택지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인터플레이의 잔재라는 옵시디언은 인력도 자본도 부족한 그냥 하청제작사지요.. 사실 RPG 자체가 만들기 힘든 장르고, 어찌 보면 사양길에 들어선 지 오래입니다. 킥스타터로 몇몇 게임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기획도 노하우도 부실한 팬소프트에 가까운 물건들이 많으며, 경험을 가진 제작자들이 웨이스트랜드나 토먼트의 후속작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건 좀 더 기다려 봐야 합니다. 그런데 베데스다는 자본도 기술력도 충분한 상황에서, 정말 모두가 꿈꾸는 그런 RPG를 만들 능력을 갖고는 그 능력만 과시한 채 알맹이는 하나도 볼 것이 없어서 모딩으로 꾸미는 것이 가장 큰 컨텐츠인 반쪽짜리 게임만 만들고 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더욱 우울한 점은 이것이 단순한 능력 부족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는 점입니다. 게임을 컨텐츠로서가 아니라 오직 휴식처로서, 한두 시간 단위로 별 생각 없이 슈터 게임처럼 RPG를 플레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하는 부분이 게임 전체의 완성도를 깎아먹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더 잘 팔린다는 기획이 엿보이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요? 그러나 전작인 모로윈드, 오블리비언보다 못해진 부분은 그런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RPG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많은 가능성을 가진 제작사가 일부러 한 발짝 물러서려는 태도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산만하고 긴 글을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도, RPG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고, 살면서 다양하고 재미있는, 좋은 RPG들을 경험할 기회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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