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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목욕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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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3
조회수 : 5290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5/04/15 14: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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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역사 이야기로군요. 요번에는 로마의 목욕탕과 목욕문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로마가 수백만의 인구를 거느린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요소중에 하나가 바로 이 목욕 문화이기 때문에 목욕을 떼어놓고는 로마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인 것 같습니다. 로마인들이 얼마나 목욕을 즐겼는지 후대에 "로마는 목욕등의 '사치'를 부려 망했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이 퍼지기도 했지요. 로마가 목욕문화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중세 기독교가 목욕을 사치스런 것으로 여기면서 그런 속설이 퍼졌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이런 설이 어디서 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로마가 처음부터 목욕을 즐긴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로마가 만들어 질 당시에는 '젊은 양치기 소년들'의 나라였고 목욕은 커녕 마누라 삼을 여자마져 부족해 약탈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아주 목욕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목욕과는 거리가 있을 정도로 그냥 '씻는' 정도에 불과했죠. 심지어 목욕은 신체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육체 노동자나 전사들은 목욕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로마가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 그리스의 '선진문화'를 습득하면서 이 목욕 문화가 서서시 싹이 트기 시작했지요. 스파르타의 열기욕에서 시작된 목욕 문화는 그리스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목욕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인식이 있어 유행하고 있었죠.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목욕 습관이지 공공 목욕시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목욕 문화가 로마에 들어오고 로마의 부유층들은 자기 집에 목욕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부자의 도락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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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BC33년에 율리아 수로가 생기고 로마인들이 다량의 물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목욕은 크게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로마는 공공 도로와 수로 시설을 다수 건설했는데 물이 적은 유럽에서 이 수로 시설은 100만 넘는 인구를 부양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습니다. BC312년 부터 건설한 로마의 수로는 AD1세기 경에는 수로교 6개를 건설했고 100년 뒤에는 11개로 늘었는데, 여기서 공급되는 물의 양은 일간 11억 3600만 리터 가량이었습니다. 이 중에 반은 공공 목욕탕에서 소비되고 나머지 반은 200만 로마 시민 한 사람당 230리터 정도씩 돌아가는 양이었지요. 이는 현대 뉴욕 시민이 쓰는 물의 양과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자, 이렇게 물이 넉넉하게 공급되니 로마에는 수세식 화장실 (예전의 로마의 화장실 포스팅을 참조하세요)이 만들어졌고 공공 목욕탕도 다수 건설되기 시작합니다. 사실 로마의 아파트라는 포스팅을 할 때 말했듯 로마는 부유층의 집이 아닌 다음에야 화장실이나 식사, 목욕, 세탁 모두를 외부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욕탕도 꼭 필요한 시설에 들어갔고 로마의 정치인들은 공공 복리와 자신들의 인기를 위하여 목욕탕을 건설하기 시작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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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목욕탕은 후대에 알려진 것 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습니다. 보통 작은 공간에 사우나 시설과 열탕 시설이 있는 정도였고 외부에 찬물을 담은 수영장이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로마가 부유해 지면서 네로 시대를 전후해 점차 공공목적으로 목욕탕을 크고 화려하게 지어나가기 시작하더니만 목욕탕 안에 체육관과 도서관, 식당 그리고 공원까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200년 경에 건설된 카라칼라 목욕탕은 1,6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280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은 욕실만 3,0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목욕탕이 일종의 3S (SEX,SPORTS,SCREEN) 정책처럼 로마 시민을 회유하기 위한 공공시절물에 해당하는지라 좀 더 화려하게 만들어 자신의 인기를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죠.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은 욕실 바닥에 타일을 깔아 화려하게 장식하고 이집트산 대리석과 장식유리를 써서 벽면과 지붕을 꾸미고 프레스코화까지 넣어 그 넓은 목욕탕을 꾸몄으니 그 화려함은 지금의 목욕탕도 못 따를 정도라고 생각이 될 정도지요. 더더구니 이 목욕탕은 공공이기 때문에 입장료의 기준이 '로마 최 빈민층이 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금액으로 책정되었고 그나마 어린아이는 무료 입장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좋았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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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알마 타데마가 그린 카라칼라 목욕탕>

이러다 보니 로마의 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회당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로마의 목욕탕 구조를 살펴보면 더욱 더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아포디테리움으로 입구를 통과해 탈의를 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후대 목욕탕은 여기서 부터 장난이 아닌데 우리나라 공중 목욕탕처럼 홀라당 벗고 들어가는게 아니라 여기서 욕실 전용 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당연히 노예들이 시중을 들었고 관리자가 귀중품(?)을 관리했지요.

그리고 아포디테리움을 통과하면 라트리나가 나오는데 이것은 공중 화장실이었습니다. 목욕탕에서 싸지 말고 뺄것 다 빼고 들어가는거죠. 하지만 전에 로마의 화장실 이야기에서 이 화장실이 그냥 화장실이 아니었다는 것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라트리나를 통과하면 팔레스트라가 나오는데 여기는 체육관입니다. 목욕 전에 운동을 해서 땀을 뺄 사람들은 빼는거죠. 로마나 그리스 사람들은 건장한 육체를 신성시 한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이 체육관에는 온갖 몸짱들이 몸매를 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더구나 로마의 목욕탕은 후대 황제들이 남녀를 재발 좀 구분해라 라는 부탁... 아니 포고령을 내릴 정도로 남녀가 구분없이 이동했기에 여자들은 여기서 좋은 눈요기를 할 수도 있었죠. 알다시피 스포츠를 할 때는 팬티도 안 입는 경우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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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화장실... 대리석 화장실>


어쨌거나 이제 팔레스트라를 통과하면 테피다리움이 나옵니다. 일종의 온탕인데 뜨거운 곳에 들어가기 전에 몸의 온도를 서서히 높이는 용도로 쓰이는 방이었죠. 물의 온도 또한 살짝 따뜻한 정도로 옆에 난로를 두어 땀이 일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칼다리움이 나옵니다. 여기가 진짜 목욕하는 목욕실입니다. 테피다리움 보다 더운 물이 가득한 욕조가 있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몸을 지졌죠. 로마의 목욕탕 유적에는 물을 떠서 뿌리거나 담아 둘 수 있는 바께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여기가 끝일까요? 아니요 아직 더 남았습니다. 칼다리움에서 목욕을 실컷 즐긴 이후에는 프레지다리움으로 넘어갑니다. 여기는 냉탕입니다. 휴~ 온탕에서 열을 올린 다음 냉탕에 들어가면 얼마나 시원한지 아는 분들은 다 아십니다. 당연히 고대 로마인들도 이것을 잘 알았고 한껏 몸에 올려진 열을 이곳에서 시원하게 식혔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일종의 수영장도 겸하기 때문에 목욕 과정을 다 빼고 그냥 여기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죠.

그리고 이 프레지다리움을 통과하면 (네, 아직도 남았습니다) 운지오니움이 나옵니다. 여기는 일종의 테라피  시설로 요즘으로 치자면 수면방 정도일까요? 여기서 몸에 오일을 발라 피부가 건조해 지는 것을 막고 각종 향수로 멋을 내기도 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의 몸과 머리를 다듬어 주기도 했지요. 물론 누워서 휴식도 취했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벤허가 전차 내기를 위해 아랍 상인과 같이 찾았던 곳이 바로 이 운지오니움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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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남아있는 로마식 목욕탕 유적>

그 다음은 방이라기 보다 일종의 광장으로 산책을 즐기기도 하고 매점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도 있었고 여기에 도서관이 포함된 목욕탕은 책을 빌려볼 수도 있었습니다. 때때로 이 장소는 로마인들이 강연을 듣거나 토론을 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죠. 일종의 다용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쓰는 공간이 아닌 프레프루니움 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목욕탕의 불을 떼는 곳이었죠. 이곳을 중심으로 남녀가 분리되어 있기는 했습니다만 위에서 말했듯 사실 상 구분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재정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재발 좀 남녀 구분을 지켜 달라며 공문을 내리기도 하고 남자 목욕시간과 여자 목욕시간을 따로 구분해 주기도 했습니다만 별로 효과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하드라아누스 황제가 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는데 이후에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똑같은 명을 또 내렸고 세베루스 황제도 또 똑같은 명을 내렸거든요. 남녀 관계는... 어쩔 수가 없었는지...


참! 프레프루니움에서는 하이퍼코스트라는 방법으로 물과 바닥을 덥혔는데 이것은 우리의 온돌과 유사한 형태였습니다. 불을 땔 경우 그 연기가 바닥을 통과하고 하이퍼코스툼이라는 기둥을 통과하면서 물과 바닥을 데우는거죠. 다만 우리의 온돌은 기둥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로마시대의 기둥은 각각의 기둥들이 따로 서 있었기 때문에 난방 효율이 떨어져 방의 모든 부분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굴뚝을 여러곳으로 뚫어 연기가 사방으로 퍼지게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로마가 멸망하고 대규모 건축 공사를 할 여력이 사라져 버리자 사장되어 19세기 폼페이 발굴 이전까지 알지도 못했지요. 반면 우리의 온돌은 가정 난방에 적용되면서 지금까지도 남아있게 되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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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코스트 - 이런 것이 양쪽으로 남탕과 여탕 두개를 데워 줍니다>

하지만 이런 목욕 시설도 로마가 멸망하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 유럽에 퍼져 있던 로마의 목욕 문화는 기독교가 옷을 벗고 서로를 보는 것을 터부시 하는 데다가 그놈의 '남녀 혼탕' 문화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나중에는 창녀들까지 출입하게 됨으로서 기독교로 부터 탄압받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점차 잊혀져 유적만 남게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공공으로서의 목욕문화, 그리고 화려한 목욕탕.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위생 관념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의 거대도시...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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